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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과 신학

하나님 나라와 기본소득의 정당성: 기본소득에 대한 성서신학의 변호 / 정용한

하나님 나라와 기본소득의 정당성: 기본소득에 대한 성서신학의 변호 [각주:1]


정용한(연세대학교연합신학대학원)

I. 들어가며


한국의 신약학계는 1997년 당시 외환부족으로 인해 국제통화기금(IMF)의 원조를 받으며 겪게 된 경제 위기를 새로운 성서 해석과 대안 제시로 극복하려한 전통을 갖고 있다. [각주:2] 하지만 성서학계의 바람과 달리 21세기 들어서도 경제 위기는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화두로 남아있고, 10년에 걸친 보수 정권의 경제 정책은 정권 교체와 함께 끝이 나고 새로운 경제 정책이 실험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시작된 세계 금융 위기를 겪으며 한 나라의 경제가 그 나라의 경제 정책만으로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전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경제 공동체를 이루며 겪게 되는 위기 속에서 이제 다시 성서학이 주목하고 준비해야하는 통찰이 무엇인지 관심을 기울여야할 때다. 무엇보다 4차 산업 혁명으로 야기될 사회적 변화 속에서도 지켜내야 할 성서적 가치는 무엇이고, 그것을 보전해 나갈 수 있는 실천적 방안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고민하는 것은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는 모든 신앙인들의 의무가 아닐 수 없다.


이 글은 이미 시작된 금융자본시대 속에서 인공지능의 발전과 그 도입으로 야기될 극심한 불평등을 예상하며, 희년 운동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치기 위한 방안으로 기본 소득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논의하려한다. 공관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희년 선언과 하나님 나라 운동이 갖는 현재성, 전복성, 평등성은 2000년의 역사적 간극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미래 사회에서도 가장 본질적인 가치로 추구될 필요가 있다. 기본 소득과 관련한 논의가 국내에서 정치 사회적 맥락에서 주로 소비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본 소득의 논의가 어떻게 예수의 가르침 특히 하나님 나라 가치와 연결되는지를 살피려 한다. 기본 소득과 관련한 일련의 연구들이 기독교 윤리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바 있으나, 다양한 신학적 논의가 여전히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각주:3]


II. 문제 제기와 연구사


정치, 사회, 문화를 결정하는 하부구조로서 경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신대륙의 발견과 무역업의 발달로 시작된 중세 사회의 변화는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을 거치며 근대 사회로 이어졌고, 봉건제와 장원제가 무너지며 시작된 도시와 시장의 발달은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를 근대 사회에 마련해 주었다. 초기 자본주의는 아담 스미스의 주장처럼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신뢰했으며, 정부의 개입보다 시장의 자율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제 체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발전을 바탕으로 한 산업화와 식민주의(제국주의)의 등장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드러냈고 시장의 자율성과 역할을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19세기 중반이후 부의 창출을 결정짓는 생산수단을 개인에게는 금지하는 경제 체제가 등장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으로 제안된 정부 중심의 경제 체제는 1세기에 걸친 실험 이후 그 수명을 다하였다. 초기 자본주의 체제 역시 세계 대전과 대공황을 거치며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였다. 시장의 자유를 축소하고 정부의 역할을 확대하는 후기(수정) 자본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정부가 세금을 올려 다양한 정책을 수행하고, 고용을 창출함으로 경기를 부양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그러나 사회주의와의 체제 경쟁 속에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노동자와 소외계층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후기 자본주의의 우월성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후기 자본주의의 선두주자였던 미국 경제가 1970년대 이후 장기 불황에 빠지고만 것이다. 정부의 친(親)노동자 정책은 기업의 투자를 위축시켰고, 경직된 노동 시장은 경기 침체를 불러왔다. 다시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 대안으로 정부의 시장 개입을 다시 최소화하고 기업의 역할을 확대하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체제가 출현하였다. 기업들의 무한 경쟁을 장려하며 무한한 가치 추구를 긍정하는 신자유주의는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약속하는 듯하지만 또 다른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다. 작금의 한국 사회가 겪는 문제들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한계를 경험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의 폐해에 대해서는 신학계에서도 이미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2012년에 발표된 경제 선언문에서 신학자들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신학적 평가로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문제점을 꼽았다: 1. 세계 경제를 투기 자본주의화 할 위험성, 2. 과도한 경쟁으로 노동 현장을 잔혹화 할 위험성, 3.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제3세계는 제1세계에 종속시킬 위험성, 4. 약육강식의 정글경제로 인한 경제적 희생자 양산, 5. 공정한 분배라는 성서적 가치 훼손, 6.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 옹호자들의 무책임. [각주:4] 이제 신자유주의 체제의 한계를 인식하고 또 다른 버전의 자본주의를 논의할 때가 되었음을 선언한 것이다.


이제 이러한 평가에 어느 때 보다 빠른 기술 발전으로 야기될 사회 문제들을 더 진지하게 반영할 필요가 생겼다.

그림 1 시장 참여자 비율

 

새로운 생산 수단으로서 ‘금융 자본’과 함께 ‘로봇과 인공 지능’이 논의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러한 생산 수단과 그에 따른 잉여 가치가 어느 때보다 소수층에게만 집중될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로봇 기술의 발전과 인공 지능(AI)의 등장은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해 보지 못한 사회 구조와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예상이 팽배하고 있다.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1퍼센트도 채 안 되는 계층이 대부분의 수익을 독점하는 사회가 펼쳐질 것이라는 예상이다. [각주:5]

예컨대 유기윤은 미래의 노동 시장이 플랫폼을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았다. 여기서 플랫폼이란 아마존이나 페이스북과 같이 클라우드(원격 서버)를 통해 사람들이 정보, 서비스, 상품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통의 기반을 말한다. 플랫폼은 고도화된 정보시스템으로 조직뿐 아니라 개인이 플랫폼화 될 수 있다. 머지않아 노동 시장은 플랫폼을 소유한 상위 기업가와 투자자, 플랫폼에서 대중을 움직이는 스타, 플랫폼에 속해 살아가는 절대 다수의 시민, 그리고 인공지능(“정보시스템으로서 법인격을 지닌 인공생명체”)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림 1은 21세기 말까지 노동 시장이 인공지능에 의해 주도되고, 절대 다수의 시민이 소외될 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각주:6]

절대 다수의 시민이 프레카리아트로 전락한다는 사실과 함께 이들의 처지마저도 인공 지능에 의해 위협 당할 것이라는 예상이 주를 이룬다. 사회학자들에게 유행어처럼 사용되는 “프레카리아트”는 ‘precarious’(불안한)와 ‘proletariat’(무산계급/노동자)를 조합해 만든 신조어이다. 이 단어를 고안한 가이 스탠딩은 프레카리아트가 1) 대량 실업으로 소득을 벌 기회가 없고, 2) 해고당하기 쉬우며, 3) 명시된 직무 기술서가 없고, 4)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며, 5) 진급의 기회가 없고, 6) 임금 인상을 보장 받지 못하며, 7) 집단적 의사 표현의 수단이 없는 계층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각주:7] 물론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위와 같은 특징을 갖는 프레카리아트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유기윤의 예상과 함께 고려해 볼 때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앞으로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은 자명해 보인다. [각주:8]

지금까지 기독교는 새로운 사회 변화와 함께 시대마다 교회의 역할을 고민해 왔다. 교회는 초기 자본주의의 부작용을 경험하며 경건주의 전통(18세기)을 탄생시켰고, 자본의 힘과 함께 선교의 세기(19세기)를 이끌었다. 지난 세기에는 사회주의와 수정 자본주의의 대결을 경험하며 다양한 신학과 함께 사회 운동을 일으켜온 경험이 있다. [각주:9] 이제 남반구를 포함한 세계 교회는 21세기 신자유주의 체제의 명암을 통해 새로운 신학과 대안의 필요성을 고민하고 있다. 분명 지난 400 년간 지속된 자본주의는 기독교의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자본주의 체제가 등장하고 사라지는 과정에서 교회가 어떤 역할을 감당해 왔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국내에서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각주:10]

유발 하라리는 21세기 들어 종교의 경전이 "진정한 지식의 원천이 아니라 다른 것을 뒷받침하는 권위의 원천 정도로 강등됐다"고 평가하며 기독교 경제학, 이슬람 경제학, 힌두 경제학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각주:11]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아무리 다양한 성경 구절을 제시한다손 치더라도 정부나 기업은 경제 이론과 현대사회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정책 결정을 해나갈 것이기에 기독교 경제학에 대한 논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과연 최근 이루어지는 경제 정책들이 종교적 가치 혹은 교리와는 상관없이 경제 이론과 역사적 경험만을 기준으로 결정되고 있을까? 경제 정책을 결정하는 정부와 기업이 실은 종교적 경험과 신념을 가진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이 질문에 대해 쉽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 주체들이 갖는 종교적 경험과 신념이 그들의 경제 정책에 직간접적으로 반영될 것이기에 오히려 기독교 경제학의 논의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경제 주체들이 있었기에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다양한 신앙 운동이 등장하며 역사의 진보를 이루어 왔다. 막스 베버가 밝힌 종교와 경제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성찰이 유발 하라리의 주장과 달리 21세기에도 유효한 것이다. [각주:12] 사회의 하부 구조를 이루는 경제 문제가 여전히 종교적 경험과 신념을 가진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결정되는 한 종교와 경제의 관계성은 부정될 수 없다.


21세기 들어 경제 정의에 대한 의식이 더욱 높아지며 성서학에서도 다양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큰 틀에서 최근의 경제 관련 성서학 논의는 다음의 두 가지 경향성을 보인다. 첫째, 구약학에서는 희년법(안식년법)에 대한 관심과 그 적용의 가능성을 중요한 논제로 삼고 있다. [각주:13] 많은 구약학자들이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주어진 명령을 이 시대를 위해 새롭게 해석하고 그 적용을 논의하는 것은 자연스러우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각주:14] 학자들은 노예해방, 채무면제, 토지개혁을 명령한 오경의 희년법이 갖는 사회 개혁적인 의미와 그 적용 방법을 논의하고 있고, 정중호는 실천적인 대안으로 한국 사회의 토지 개혁과 조세 개혁을 제안하였다. [각주:15]


김회권은 희년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밝히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희년법이 레위기 17-26장의 성결 법전(the Holiness Code)에서 주어졌지만 포로기 이후 상황을 반영하며, 그 중 희년법이 계약의 동시대화(contemporization)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설명한다. 이스라엘의 모든 세대는 희년 공동체로 시내산 계약에 참여하고, 이를 위해 시대마다 모세와 같은 예언자들이 그 계약을 새롭게 부여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구약성경을 하나님 나라라는 틀로 요약하였고, 그 운동을 펼친 이들이 바로 사도들이었다. 김회권은 결론적으로 희년정신을 하나님 나라 운동 안에서 구현시킬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하는데, 그것은 세속사회에 앞서 구원을 경험한 교회공동체가 우선적으로 “우애와 협동, 상호돌봄과 지지를 전제한 공동체”를 만들고 그 경험을 토대로 세속사회를 향해 입법운동을 펼치자는 것이다. [각주:16] 한국 사회를 향한 사회 운동으로서 희년과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제안한 고무적인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각주:17]



동시에 희년법이 갖는 현재성과 함께 그 역사적 변천을 살피는 연구도 진행되었다. 제2차 성전기(중간기)를 통과하며 희년법은 사회 개혁을 위한 현실적 대안으로 여겨지는 대신 차츰 영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을 보였다. 김병하는 그 원인을 세 가지로 분석하였다. 첫째, 이스라엘은 여러 제국의 식민통지를 경험하며 정치, 경제, 사회적인 문제를 겪어야했다. 그 사이 종말에 대한 기대가 커지며 희년 사상은 “종말에 이루어질 궁극적인 회복을 묘사하기 위한 세대 구분을 나타내는 기재로서 사용되었다.” 둘째,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쌓은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려고 희년법을 언급하지 않았고 영성화시켜 버렸다. 지혜 문학은 이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해 자선을 강조하는 것으로 희년의 사회적 개혁성을 대신하였다. 셋째, 에녹과 쿰란 공동체와 같은 묵시적 분파들은 희년 주기를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의 종말론적 회복을 설명하는 주기로 사용하며 사회개혁적인 의미를 희석시켰다. [각주:18] 식민지하에서 유대인들은 희년법의 실천이 어렵다는 현실에 좌절하고, 지혜 문학과 묵시 문학을 통해 영성화된 희년 개념에 익숙해져갔다. 이러한 희년의 영성화는 신약 성서에서도 확인된다. [각주:19] 지금까지 구약학의 논의가 한국 교회로 하여금 사회 정의와 사회 참여의 중요성을 공감하도록 한 공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한 희년법의 현대적 적용을 위해 토지법과 조세 개혁이라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도 중요한 공헌점이다.


둘째, 신약학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비판하며 윤리적 선택과 새로운 경제관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었다. 신약학 분야에서 희년 자체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현우는 “끄떼마”(막 10.22)가 재물이 아닌 토지를 가리키기에 예수도 희년 토지법을 지킬 것을 명령했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희년법을 현대에 적용하기 위한 방법으로 “최소한 기독교인들 간에는 토지법을 지켜야”하고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가 세례를 받을 경우에는 그가 가질 수 있는 분량(평균치)을 제외한 토지를 포기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각주:20] 더 많은 연구들은 신약시대 희년법의 실시 여부보다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로마 제국 당시의 상황과 비교하며 예수의 가르침이 한국 사회를 향해 갖는 유의미성을 밝히려 노력하였다. 1세기 상황에서 주어진 복음서의 교훈이 21세기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근거 중 하나는 로마제국과 현대 사회가 공유하는 극단적인 양극화의 문제에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각주:21]



나아가 예수의 가르침과 비유를 바탕으로 다양한 경제적 원리와 가치들이 제안되었다. 김득중은 신약성서의 경제 윤리로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의존하지 말 것, 재물을 소유와 축적이 아닌 분배와 나눔의 대상으로 여길 것, 재물에 대한 성도의 태도를 신앙의 척도로 여길 것을 제안하였다. [각주:22] 특히 신약성서 중에서도 가난한 자들의 복음서로 알려진 누가복음서가 경제와 재물에 관한 논의에 있어 중요한 본문으로 다뤄졌다. 김경진은 누가복음이 재물의 바른 사용 방식으로 구제를 강조한다는 것과 이것이 제자도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각주:23] 이러한 예는 부자 청년의 기사(마 19.16-29/막 10.17/눅 18.18-30)에서 잘 드러나는데, 예수의 제자는 재물을 “다” 판 후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각주:24] 유사한 연구들을 통해 구제와 나눔의 가치는 기독교 담론에서 이미 충분히 다루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의 연구가 구제가 전사회적인 차원으로 어떻게 확대될 수 있을지에 대한 방안을 제안하는 데까지는 나가지 못하고 있다.


성서학자들 또한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 체제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비판하였음에도 새로운 체제에 대한 거시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는 주저하였다. 희년의 가치를 실천하기 위한 토지 개혁 혹은 조세 제도의 정비를 대안으로 제안한 연구들이 있었으나 새로운 생산 수단과 그것이 독점되는 미래 사회의 문제를 향한 대처는 여전히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성서학자들을 포함한 공적신학과 교회 연구소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에 이어 다음과 같은 한국 교회의 나아갈 길을 제안한 바 있다. 1) 신자유주의의 반(反)신앙적 본질에 대한 교육 강화, 2) 세상의 경제 질서와 하나님의 경제 정의 사이에서 생명살림의 목회적 모델 창조, 3) 경제적 양극화 해소를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 마련, 4) 시민단체 및 에큐메니칼 단체들과의 협력, 5) 하나님의 경제에 대한 희망 선포가 제안되었다. [각주:25] 한국의 첨예한 정치적 진영 논리를 고려할 때 종교 영역에서 더 이상의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기가 부담스러웠을 가능성이 있다. [각주:26] 하지만 미래 사회의 노동 시장이 다수의 프레카리아트로 이루어질 것이고 이들이 경험할 소외를 예상할 때 이러한 제안이 충분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과연 어떤 법적, 제도적 장치가 미래 사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 대안이겠냐는 질문이 남아 있다. 토지와 금융을 바탕으로한 부유층과 로봇 기술과 인공 지능으로 대변되는 기술 자본을 지닌 계층에 의해 부의 분배와 축적은 전혀 다른 양상을 띨 것이다. 지금은 예상되는 미래의 위기 상황을 극복할 성서적이며 실천적인 방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필자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 안에서 이루어진 성서학적 논의의 특징과 한계를 인식하며 예상되는 미래 사회의 문제들을 풀 대안으로 기본 소득의 도입을 제안한다. 2016년 6월 스위스는 기본 소득을 놓고 국민투표를 진행하였다. [각주:27] 18세 이상의 국민과 미성년자에게 각각 매월 2,500 스위스 프랑(약 300만원)과 650 프랑(약 78만원)의 소득을 제공하는 안이었다. 여러 복리후생비를 대체하며 한층 발전된 복지를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와 노동 의욕을 감퇴시키는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이 부딪쳤다. 결과는 23.1 퍼센트의 국민만이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나 부결되었다. 결과에 대한 평가도 입장에 따라 달랐다. 찬성하는 이들은 이번 국민 투표로 기본 소득이 중요한 사회 이슈가 되었고, 23.1 퍼센트의 국민들이 찬성한 것만으로도 고무적이라고 평가한다. [각주:28] 이제 기본 소득에 관한 논의는 유럽을 중심으로한 서구 사회를 넘어 한국 사회로 넘어 온 상황이다. 성남시와 서울시는 각각 청년배당과 청년수당이라는 이름으로 특정 세대와 계층에게 기본 소득을 제공하는 실험을 시작하였고, 20대 총선(2016년)에서는 노동당과 녹색당이 각각 기본 소득을 공약으로 내세워 기본 소득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도록 도왔다.


구약학과 신약학에서 이루어지는 논의 모두 성서적 가르침이 이 시대의 경제 체제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전제를 공유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 속에서 경제 정의를 이루기 위해 강조해야하는 희년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기본 소득의 가치와 어떻게 조우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III. 희년과 하나님 나라(통치)의 자유와 회복


공관복음서가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예수의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꼽는 것에는 이견(異見)이 없다. [각주:29] 마가는 예수의 첫 일성(一聲)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보고하며(막 1.15)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한다. 두 자료설의 관점에서 마태도 마가복음을 자료로 했기에 예수의 첫 사역을 하나님 나라의 선포라고 설명한다(마 4.17). 마태는 뒤이어 예수의 가르침과 전파의 내용이 “천국 복음”이라는 사실을 추가적으로 명시한다(마 4.23). [각주:30] 다만 누가는 마가복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의 첫 일성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예수의 첫 가르침을 보고해야하는 마귀의 시험 후 사역으로 누가는 이사야서 61장 1절과 2절의 희년 선포를 취임 설교로 소개한다(눅 4:18-19). 공관복음서를 통합적으로 읽을 수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하나님 나라와 희년의 연관성을 짐작할 수 있다. 논리적 추론으로 갖는 둘의 긴밀한 관계성은 이제 내용적 차원으로 확대 해석될 필요가 있다. [각주:31]


공관복음서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내세적, 개인적, 영적 차원으로만 인식한다면 예수의 사역이 반영하는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파악했다고 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사역을 현세적, 사회적, 물질적 차원으로만 이해한다면 그 또한 하나님의 나라 의미를 왜곡시킬 위험성이 크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차원을 함께 고려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국 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편향적으로 이해하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종합적 이해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희년법을 이해할 때도 양자택일하듯 구약시대 이스라엘에서만 유효했던 것으로 국한 짓거나 미래의 종말론적 구원 사건으로만 단정 지으려는 경향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학자들조차 예수의 나사렛 취임 설교를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위한 내용으로 보기보다는 예수와 함께 시작된 종말론적 현실을 선포한 상징적 선언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각주:32] 중간기 동안 진행된 희년법의 종말론화와 영성화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하나님 나라와 함께 희년이 갖는 ‘자유’와 ‘회복’의 현실 참여적이며 사회 개혁적인 요소를 강조한 설교로 예수의 가르침을 시작한다.

LXX 이사야 61.1-2 누가복음 4:18-19
1 Πνεῦμα κυρίου ἐπ᾿ ἐμέ, οὗ εἵνεκεν 
ἔχρισέ με· εὐαγγελίσασθαι πτωχοῖς 
ἀπέσταλκέ με,
18 Πνεῦμα κυρίου ἐπ’ ἐμέ, οὗ εἵνεκεν 
ἔχρισέν με εὐαγγελίσασθαι πτωχοῖς, 
ἀπέσταλκέν με

ἰάσασθαι τοὺς συντετριμένους τὴν καρδίαν,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κηρύξαι αἰχμαλώτοις ἄφεσιν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καὶ τυφλοῖς ἀνάβλεψιν,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κηρύξαι αἰχμαλώτοις ἄφεσιν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καὶ τυφλοῖς ἀνάβλεψιν,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cf.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MT 이사야 61:1b)
ἀποστεῖλαι τεθραυσμένους ἐν ἀφέσει,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2 καλέσαι ἐνιαυτὸν Κυρίου δεκτὸν  19 κηρύξαι ἐνιαυτὸν κυρίου δεκτόν.
καὶ ἡμέραν ἀνταποδόσεως τῷ Θεῷ ἡμῶν, 
παρακαλέσαι πάντας τοὺς πενθοῦντας,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위의 도표는 누가의 예수가 전한 희년(“주의 은혜의 해”) 선포를 칠십인역(LXX)과 비교한 것이다. 예수가 회당에서 읽었다고 하는 이사야서 61장은 예수 혹은 누가에 의해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도록 편집되었다. 첫째,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와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는 칠십인역의 본문을 생략하였다. 둘째, 칠십인역은 일찍이 히브리어 본문(MT),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를 빼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로 달리 번역하였다. 누가복음은 이 본문을 그대로 사용하였지만 동시에 히브리어 본문(“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을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라고 번역하여 추가하였다. 셋째, 누가는 히브리어 본문이 달리 사용한 히브리어 단어들(“해방”, “석방”)을 “자유”(ἄφεσις)라는 같은 단어로 번역하였다. 누가는 “아페시스”를 “용서”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다만 누가-행전에서 “아페시스”가 용서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모두 “죄”(ἁμαρτία)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된 경우이다(눅 1.77; 3.3; 24.47; 행 2.38; 5.31; 10.43; 13.48; 26.18). 이 구절에서만 유일하게 “하마르티아” 없이 “아페시스”가 사용되어 “자유”를 의미한다. [각주:33] 누가는 히브리어 본문과 칠십인역의 희년 본문 전통을 동시에 반영하며, 포로된 자들과 갇힌(억눌린) 자들에게 선포된 ‘자유’와 함께 칠십인역만이 강조한 눈먼 자들에게 선포된 ‘회복’을 강조한 것이다. [각주:34] 누가의 예수가 희년을 통해 강조하려는 가치가 자유와 회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가 행한 하나님 나라와 희년 사역은 자유와 회복을 위해 먼저 이 땅에서 지금 경험해야하는 가치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아와 함께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된 사건으로 선포되었다. [각주:35] 나아가 예수는 그의 공생애 내내 현실적인 어려움에 갇힌 이들과 상처 받은 자들의 해방과 치유에 관심 갖고 활동하였다. 특히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실현되는 양상을 희년법으로 이해하였다. 예수는 희년법을 영적으로만,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적으로만 이해하지 않았으며, 지금 이곳에서 제자들이 따르고 실천해야할 삶의 방식으로 가르쳤다.

 

예수는 자유와 회복을 위한 사역으로 제국의 가치를 무력화시키거나 부정하는 전복성과 급진성을 보인다. 하나님 나라와 희년의 가치를 통해 로마 제국의 지배 질서와 맘몬의 가치를 상대화시켜 버린다. 로마 제국이 “카이사르(로마 황제)의 나라”라는 사실이 명백한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한 것은 그 외침 자체로 급진적이다. 예수의 선포가 종교적 의미로만 받아들여질 수 없는, 다시 말해 종교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가 쉽게 구분될 수 없던 역사적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그 자체로 전복적이었다. 예수는 지속적으로 로마 제국의 체제와 그 체제 안에서 당연시되던 가치들을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로 상대화하고 대체시켜 나갔다. 제국의 힘을 통해 식민지화 과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린 로마의 지배계급과 유대 지도자들에게 자유와 회복의 가치를 선포하고 실천한 것이다. 예수의 활동이 유대교 내부의 소종파적 운동의 갈등으로만 여겨졌다면 그는 스데반처럼 유대인들에게 처형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의 총독은 예수의 사역이 로마 제국과 그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였기에 주로 반란군(정치범)들에게 가해진 십자가형을 그에게 구형하였다. 예수는 로마 제국이 가하는 폭력과 억압 속에서 해방(자유)과 회복을 가르쳤기에 제국의 사형집행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각주:36]


예수의 자유와 회복을 위한 급진성과 전복성이 로마 제국이라는 정치 체제를 향해서만 드러난 것은 아니다. 예수는 ‘맘몬’(재물)을 향한 경고를 통해 로마 제국의 경제 질서를 고발하고 부정하였다. 마태와 누가 모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전한다(마 6.24; 눅 16.13). “섬기다”(δουλεύω)는 “노예”(δοῦλος)와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이다. 맘몬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은 하나님과 바알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경고했던 엘리야의 외침(왕상 18.21)을 상기시킨다. 맘몬은 신적 우상적 존재로 묘사되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볼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인 존재로 격상되어 나타난 것이다. 맘몬의 힘에 대해 예수가 갖고 있는 우려를 엿볼 수 있다. 예수는 엘리야와 같이 하나님이 주인이면 그를 따르고 맘몬이 주인이면 그를 따르라는 질문을 제자와 청중들에게 던진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식민지화 과정에 따른 부의 집중화 과정이었다. 1세기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체제 아래서 어느 때보다 극심한 양극화를 겪고 있었다. 맘몬의 힘 앞에 스스로 자유롭다거나, 어떤 상처도 입지 않았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었다. 예수는 이런 삶의 자리에서 맘몬을 거부하고 참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가르친다. 제국의 강압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가난해지고, 맘몬의 노예가 되고, 재물에 눈이 멀어가는 상황에서 예수의 자유와 회복을 향한 가르침은 충분히 급진적이고 전복적이다.


나아가 예수는 물질에 대한 욕구를 상대화시키는 것으로 자유와 회복의 가능성을 고민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나라는 밭에 감추인 보화와 극히 값진 진주 하나와 같다(마 13.44-45). 농부와 상인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깨닫는 순간 자신들의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소유하려 들게 된다. 이 땅의 소유와 비교할 수 없는 값어치를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통해 소유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을 제안하였고,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자들에게 나눔과 구제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였다. [각주:37] 예수는 가장 중요한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자신의 소유를 다른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으로 실천 할 수 있다(막 12.28-34; 마 22.34-40; 눅 10.25-28)고 가르쳤으며, 더 많이 소유해야 한다는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도록 도전하였다. 누가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부자의 가난한 자(나사로)를 향한 무관심을 죄로 규정한다(눅 16.19-31). 그 근거는 마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설교(마 23-25장)의 결말에 등장하는 종말론적 심판은 가장 작은 자에게 베푼 환대를 양과 염소로 나누는 기준으로 삼는다(마 25.31-46). 공관복음서의 예수에게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환대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경험하고, 하나님 통치를 이 땅에서부터 확장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식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희년은 모두의 자유와 회복을 위한 보편성과 평등성의 특징을 지닌다. 이 특징은 제국의 체제를 지탱하는 약육강식의 경제 질서가 아니라 배려와 돌봄의 경제 질서에서 드러난다. 포도원 일꾼의 비유(마 20.1-16)는 이러한 경제 질서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가르침이다. [각주:38] 하나님 나라 운동에 열심을 낸 제자들이 자신들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요청하는 앞 단락(마 19.27-30)과 본 비유는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앞 단락의 결론구(19.30),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가 본 비유의 결론구(20.16)로도 등장하기에 두 단락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 나라 운동에 앞장선 열 두 제자들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자들에게 주어진 것은 “영생”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미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하고 있지만 그 값어치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또 다른 보상을 요구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는 영생(하나님의 통치)을 다시 약속한다. 그리고 결론구는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는 있지만 그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경고가 된다. 포도원 일꾼들에게 요청되는 태도도 그들이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고 못 받고 가 그들의 관심이 될 필요는 없다. 품꾼들은 포도원 주인과의 약속으로 자신들이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보상까지 받았다는 사실을 감사하면 그만이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제자들이 가져야하는 자족과 감사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하지만 이 비유는 행간을 통해 또 다른 의미를 전달해 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늦은 오후까지 장터를 서성이는 품꾼들이 있었다. [각주:39] 늙은 나이 혹은 병약한 몸 상태가 품꾼들이 선택 받지 못하고 남아있어야 했던 이유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벌이를 고대하고 있을 가족들을 위해 늦은 오후까지 품꾼들은 장터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포도원에 늦게 투입된 품꾼들이 제공할 수 있는 노동은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주인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들이 생계를 위해 필요로 하는 임금을 동일하게 지불하였다. 비유는 포도원에서 일하는 모든 품꾼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주인과 그것을 보고 불평하는 품꾼들을 대비시킨다. 주인의 처사가 품꾼들의 기대나 당시의 경제 질서와 달랐기에 주인이 강조하는 그의 “뜻”(마 20.14-15)은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 충격 속에서 포도원 주인이 모두를 향해 베푼 돌봄과 배려가 돋보인다. 청중들이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돌봄과 배려를 포도원 주인에게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억압과 상처로부터 자유와 회복이 필요한 모두에게 하나님은 동일한 돌봄과 배려를 제공한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제자들이 가져야할 자세로 자족과 감사 외에 서로를 향한 배려와 돌봄의 가치도 상기시킨다. 같은 태양과 비를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허락하는 하나님의 배려와 돌봄(마 5.45)이 21세기 한국 사회 속에서 얽매이고 상처 입은 모든 구성원들에게도 조건 없이 주어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IV. 기본 소득의 자유와 회복


지금처럼 대부분의 소득이 취업에 따른 노동의 대가로만 주어진다면 구직자들 사이의 취업 경쟁은 더 치열해 질 것이고, 취업 후 그들에 대한 고용주의 권한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통해 지금까지 경험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무한 경쟁을 통한 이윤 추구를 더 이상 문제시하지 않는다면 치열한 경쟁과 불합리한 억압으로부터 탈출할 돌파구는 마련되지 않을 것이다. 노동이 인간을 소외시키다 못해 노예화하는 역설적 상황이 지속되고 말 것이다.


먼저 무한 경쟁과 맹목적 이윤추구를 통해 경험하는 다양한 억압과 한계 상황을 문제시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상황을 당연한 삶의 방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함께 바꾸려는 급진적이고 전복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그것은 취업과 노동을 통해 얻는 보상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현 상황을 극복하고 다변화시켜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기본 소득이 도입된다면 일차적으로 구직자들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노동을 선택할 때 실질적 자율성을 갖게 된다.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수익이 각자에게 보장된다면 누구나 경쟁과 억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강제된 노동과 과열된 노동 시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이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여유와 자유가 주어질 것이다. [각주:40] 관건은 사회의 불평등을 문제로 여기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적자생존의 경쟁 체제를 당연시하지 않을 수 있느냐이다. [각주:41] 이런 점에서 기본 소득을 위한 논의는 경제적일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회복을 논의하기에 철학적이고 종교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인식적 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기본소득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강제적 노동으로부터 해방과 회복을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는 노동의 가치를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도록 돕는다. 인간의 노동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고 드러내는 창조적인 활동일 때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를 위해 노동하셨고 그것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게도 노동은 같은 의미로 다가와야 한다. 이것은 모두가 차별 없이 누려야하는 인간의 기본 권리인 것이다. 경제는 생산 수단의 소유가 정부, 기업, 개인에 의해 독점될 때 많은 문제를 경험해 왔다. 경제 수단의 독점으로 잉여 가치를 특정 계급이 전유했기 때문이다. 중세의 생산 수단인 토지는 국왕이, 근세의 생산 수단인 공장은 부르주아가, 현대의 생산 수단인 금융은 거대기업이 독점하였기에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각주:42] 시대마다 생산 수단을 누가 얼마나 소유하느냐가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온 것이다. 미래사회를 준비해야하는 지금 새로운 생산 수단으로 로봇과 인공지능이 거론되고 있다. 새로운 생산 수단도 극소수(상위 1프로)에게 집중될 우려가 크다. 더 이상 생산 수단을 소수가 독점하기에 야기한 문제들을 반복할 수는 없다. 생산 수단에 따른 잉여가치를 같은 경제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나누며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노동 활동을 보장 받아야 한다. 기본 소득은 미래 사회의 경제적 위협 속에서도 각자가 자신을 자유로운 경제 주체로 인식하며 스스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적 장치가 될 것이다.


그래서 기본 소득은 이 땅 가운데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갇히고 억눌린 이들을 향해 자유와 회복을 선포하는 예수의 이상을 담을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 된다. 로마 제국의 지배보다 더 교묘하게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작금의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와 희년의 이상을 담을 수 있는 경제 체제라고 보기 어렵다. 이제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와 희년을 함께 고민하고 그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와 회복의 방편을 확보해 줄 필요가 있다. 모두가 자신이 가진 자격과 놓인 상황으로 차별받지 않고 자유롭고 건강한 주체로 공동체 안에서 역할 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기본소득이 미래 사회에 예상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유일한 대안일 수는 없다. 오히려 기본소득을 통해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가 추구하는 자유와 회복의 가치를 함께 고민할 때 문제들은 해결 될 것이고, 서로가 노동으로 인해 더 이상 소외되거나 상처 받지 않도록 돌보고 배려할 때 이 땅에서부터 희년과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IV. 나오며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하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로봇 기술과 인공 지능의 발전으로 예상되는 미래 사회의 경제 상황 또한 대단히 우려스럽다.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프레카리아트로 전락하고 인공 지능의 위협 앞에 내몰릴 가능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앞으로 겪게 될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다양한 논의와 구체적인 준비와 시도가 논의되어야할 시기이다. 그간의 성서학적 연구가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비판하고 선언적 제안들을 소개하는 수준에 머무른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라도 한국 교회는 희년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새로운 경제 질서의 중요한 원리로 제안하며 진정한 자유와 회복을 위한 방안으로 현실적인 기본 소득 제도의 도입을 제안할 필요가 있다.


기본 소득이 추구하는 가치는 공관복음서의 희년(눅 4:18-19)과 하나님의 나라(막 1:14-15; 마 4:17) 운동에 부합한다. 희년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개인적이며 영적인 사건으로 국한되지 않고 공동체적이고 사회 개혁적인 사건으로 나타나며, 로마 제국의 정치 체제와 맘몬의 경제 질서를 대체하고 상대화시키는 급진성과 전복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의 삶을 통해 모두가 함께 자유하고 회복될 수 있는 돌봄과 배려를 실천해 보였다. 기본 소득은 경쟁을 정당화하며 이윤 추구를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경제 질서 속에서 프레카리아트의 자유와 회복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작동할 수 있다. 기본 소득은 물질만능주의를 부정하고 상대화시키는 급진성과 전복성을 바탕으로,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한 최소한의 돌봄과 배려의 장치로 기능할 것이다.


기본소득을 위한 성서학의 논의는 여전히 해석학적 차원의 논의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과연 성서(과거)와 성서의 독자(현재)가 놓인 상황을 미래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느 정도까지 연결시키고 반영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성서의 의미들이 지금까지의 경제 체제와 사회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미쳐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독자라면 그 의미들이 미래 사회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이것이 성서학자가 미래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석학적 부담을 안고서도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실천적 고민을 이어가는 이유이다. 다른 신약 성서 본문들이 기본소득을 위한 논의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뒤따르길 소망해 본다. 반면 기본 소득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가장 많이 인용하는 본문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살후 3:10)일 것이다. 노동의 의미와 일하지 않을 권리와 의무에 대해서는 바울 서신을 중심으로 한 연구에서 따로 다룰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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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본 글은 다음의 논문을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정용한, “기본소득 논의를 위한 성서적 제안: 공관복음서의 희년과 하나님 나라 운동을 중심으로,” 「신학논단」 95 (2019), 251-279. [본문으로]
  2. 한국신약학회 편, 『신약성서의 경제 윤리』 (서울:한들, 1998). [본문으로]
  3. 대표적 연구들은 다음을 참고하라: 강남훈, “기본소득,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의 권리,” 「가톨릭 평론」 “기본소득 구상의 기독교윤리적 평가,” 「신학사상」 150 (2010), 177-215; 곽호철, “신자유주의의 기독교적 한 대안: 수정된 기본소득제도,” 「신학논단」 83 (2016), 121-154; 김성호, “한국사회의 기본소득 논쟁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실천방안 연구: 기독교사회복지실천을 중심으로,” 「기독교사회윤리」 38 (2017), 113-142. [본문으로]
  4. 공적신학과 교회연구소 편, 『성서 역사신학적 관점에서 본 하나님의 경제 I』 (서울: 북코리아, 2013), 14-16. [본문으로]
  5. 구본권, 『로봇시대, 인간의 일』 (서울: 어크로스, 2015), 146. [본문으로]
  6. 유기윤, 김정옥, 김지영, 『미래 사회 보고서』 (서울: 라온북, 2017), 17-21. 그림 1은 17쪽에서 발췌한 것이다. [본문으로]
  7. G. Standing/김태호 옮김, 『프레카리아트: 새로운 위험한 계급』 (고양: 박종철출판사, 2014), 10. [본문으로]
  8. 통계청의 비정규직 비중과 노동계의 비정규직 비중에도 큰 차이가 있다. 2016년 기준 통계청은 비정규직의 비중이 32.8 퍼센트라고 발표한 반면 노동계는 44.5 퍼센트라고 발표했다.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778590.html 2018년 12월 31일 접속. [본문으로]
  9. 김용복은 이러한 대안들이 서구 사회의 노동자들에게 대안이 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시도가 노동자들 스스로가 아닌 그들에게 관심 있는 기독교 엘리트들의 머리에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김용복, 『지구화시대 민중의 사회전기-하나님의 정치경제와 디아코니아 선교』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7), 174. [본문으로]
  10. 자본주의의 등장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연구로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1920)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경제의 주체인 정부, 기업, 가계(노동자)의 관계를 결정하기 위해 신학자들이 어떤 논의를 했고, 구체적으로 성서학자들은 어떤 해석들을 제시했는지에 대한 연구를 찾기는 쉽지 않다. [본문으로]
  11. 유발 하라리/전병근 옮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서울: 김영사, 2018), 202-203. [본문으로]
  12.  자본주의의 등장과 칼빈주의가 관계있다면,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세기 경건주의 운동과 미국의 청교도 운동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도 고려되어야 한다. 새로운 경제 질서에 대한 요구와 변화에 신앙 운동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하다. [본문으로]
  13. 오경의 희년 사상은 다음의 구절들을 참고하라: 출 21.2-11(종에 대한 법규); 22.25-26(이자 금지법); 23.10-11(토지 휴경법); 신 15.1-11(부채 탕감법); 12-18(노예 해방법); 레 25(안식년과 희년 규례). 김병하, 『희년 사상의 영성화-오경에서 누가복음까지: 중간기 문헌을 중심으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5), 33. [본문으로]
  14. 장성길, “구약성경에 나타난 희년법,” 김근주 외, 『희년, 한국 사회, 하나님 나라』 (서울: 홍성사, 2012), 71-103; 이사야, “구약의 땅과 사회윤리: 안식년과 희년을 중심으로,” 「기독교사회윤리」32(2015), 277-305. [본문으로]
  15. 정중호, “한국 토지 개혁과 희년 실시 방안,” 「장신논단」 46/2 (2014), 35-60; “희년 공동체와 한국-노비해방, 채무면제,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구약논단」 55 (2015), 93-120. [본문으로]
  16. 김회권, “희년과 하나님 나라,” 김근주 외, 『희년, 한국 사회, 하나님 나라』 (서울: 홍성사, 2012), 15-70. [본문으로]
  17. 김근주, “하나님의 나라와 공평과 정의,” 김근주 외, 『희년, 한국 사회, 하나님 나라』 (서울: 홍성사, 2012), 105-137. [본문으로]
  18. 김병하, 『희년 사상의 영성화-오경에서 누가복음까지: 중간기 문헌을 중심으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5), 129-130. [본문으로]
  19. 김회권은 70년 이후 희년법을 실천할 사회정치적 맥락이 사라졌기에 바울을 중심으로 희년정신은 “국제주의적인 영적 공동체의 구성원리”로 활용되었다고 평가한다. 김회권, “희년과 하나님 나라,” 15-70. [본문으로]
  20. 신현우, “신약성경에는 희년법이 없는가?” 『희년, 한국사회, 하나님 나라』 (홍성사: 서울, 2012): 141-175. [본문으로]
  21. 조태연은 갈릴리 경제의 특징을 분석하고 그 결과로 “중산층이 몰락하고 사회 계층 구조가 양극화되었고... 부의 편중화와 사회 계층 구조의 양극화를 가져왔다”고 평가하였다. 조태연, “갈릴리 경제학,” 한국신약학회 편집, 『신약성서의 경제 윤리』 (서울:한들, 1998), 62-88. 특히 86. 또한 김명수는 로마제국과 금융자본주의의 공통점으로 공(公)의 사유화를 꼽고 있다, 반면 하나님 나라는 “사(私)의 공유화 질서”로 정의한다. 김명수. “초기기독교 예수운동에 나타난 공(公)경제윤리,” 「신학사상」 150 (2010), 83-115, 특히 109. [본문으로]
  22. 김득중, “신약성서의 경제 윤리,” 한국신약학회 편집, 『신약성서의 경제 윤리』 (서울:한들, 1998), 25-26. [본문으로]
  23. 김경진은 누가-행전의 특징으로 “부자들에 대한 목회적 배려”와 “가난 자들에 대한 사랑의 관심”을 꼽았다, 누가는 재물의 낭비(탕자의 비유, 불의한 청지기 비유, 부자와 나사로 비유), 집착(만찬의 비유, 부자 청년 기사, 씨뿌리는 비유), 축적(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을 비판하면서 재물의 올바른 사용으로 구제(눅 3.11; 10.30-37; 14.12-15, 15-24; 18.22; 19.8; 11.41/마 23.26; 12.33/막 6.19-21)를 가르친다. 김경진, “누가 신학의 재물관-청지기도와 구제,” 한국신약학회 편집, 『신약성서의 경제 윤리』 (서울:한들, 1998), 97-111. [본문으로]
  24. 김경진은 “공관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재물 관계 자료의 대부분이 사실상 제자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김경진, “누가 신학의 재물관-청지기도와 구제,” 95. 제자들은 예수를 따를 때 “모든 것”을 버렸다. (눅 5.11, 28; 14.33; 18.22; 막 10.28) [본문으로]
  25. 공적신학과 교회연구소 편, 『성서 역사신학적 관점에서 본 하나님의 경제 I』, 18-21. [본문으로]
  26. 기독교 내에서 조차 경제 정책에 있어 ‘분배’ 혹은 ‘생산’을 강조하는 것으로 복음주의 좌파와 우파가 갈등하고 있다. 조상국, “복음주의와 자본주의,” 「통합연구」 5/3 (1992), 113-129. [본문으로]
  27.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토머스 모어(1478-1535)의 『유토피아』(1516)였다. [본문으로]
  28. 오준호,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 (서울: 개마고원, 2017), 16-22. [본문으로]
  29. 그리스어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를 번역한 “나라”는 죽음 이후의 내세를 뜻하는 것으로 고착되어 있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시간과 공간을 모두 아우르는 “통치”로 번역하는 것이 복음서 전체의 의미에 부합한다. 본 연구에서는 편의상 두 번역을 혼용하겠다. [본문으로]
  30. 마가복음의 다른 고대 사본들(A, D, K, W 등)은 예수의 첫 가르침의 내용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막 1:14)이라고 보고한다. [본문으로]
  31. 김대옥은 예수가 선포한 희년의 특징으로 다음의 열 가지를 제안한 바 있다: 하나님 나라의 의(분배적 정의 구현기대), 지금 여기에서의 즉각적이고 상시적인 실천, 국가적 전면적 실시보다는 상황적 실천으로서의 희년, 구제와 자선을 넘는 총체적 회복으로서의 희년, 선제적 은혜의 선순환 기대, 영생의 길로서의 희년 실천, 유대 특수주의를 넘는 보편명령으로서의 희년,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의 전제, 희년 실천 거부에 대한 통렬한 비판, 지상명령으로서의 희년 명령. 김대옥, “하나님 나라 도래 현실로서 예수가 선포한 희년의 특징 고찰,” 「신학사상」 174 (2016 가을), 1-38. [본문으로]
  32. 윤철원은 4장18절을 해석하며 예수가 “영적인 속박의 상태, 즉 사탄의 제압으로부터 해방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윤철원, 『누가복음서 다시 읽기-내러티브의 구조와 세계』 (서울: 이레서원, 2001), 93. [본문으로]
  33. 바울서신(롬 8.21; 고전 10.29; 고후 3.17; 갈 2.4; 5.1, 13)에 등장하는 “자유”(ἐλευθερία)는 공관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34. ‘상한 마음을 위한 치유’와 ‘슬퍼하는 이들을 위한 위로’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과 ‘눈먼 자들을 위한 회복’에 수렴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 [본문으로]
  35. 하나님 나라가 갖는 미래성은 ‘철저 종말론’이란 이름으로 바이스(J. Weiss)와 슈바이처(A Schweitzer)에 의해, 현재성은 ‘실현된 종말론’이란 이름으로 다드(C.H. Dodd)를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다. [본문으로]
  36.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이 내세 지향적이기만 했다면, ‘인민의 아편’으로 로마 지배층의 지지를 얻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37. 위에 소개한 김경진의 연구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38. 김선정, “포도원 주인의 두 가지 길,” 「신약논단」 13/4 (2006), 785-810; 김판임, “포도원주인의 비유(마 20:1-15)를 통해서 본 경제정의에 대한 예수의 이해,” 「신학사상」 154 (2011), 143-177; 김학철, “정의롭고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 「신약논단」 23/4 (2016), 895-931; 전병희, “포도원 주인의 비유와 마태의 의도,” 「신약논단」 24/2 (2017), 203-236; 양재훈, “그들은 왜 투덜거렸는가?,”「신약논단」 23/2 (2016), 295-329; 이형일, “포도원주인의 비유(마 20:1-16),” 「개신논집」 15 (2015), 155-170. [본문으로]
  39. 어떤 이유에서건 하나님 나라 운동에 늦게 초대받은 사람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 [본문으로]
  40. 오준호는 필리프 판 파레이스의 논의를 빌어 기본 소득은 형식적 자유를 실천할 수 있는 실질적 자유를 위한 수단이 된다고 강조한다. 오준호,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 184. [본문으로]
  41. 바우만은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해 다음의 4 가지 가정을 극복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불평등과 경쟁에 대한 문제 제기 외에도 경제 성장을 모든 문제의 해결책인 것처럼 간주하는 것과 지속적인 소비가 인간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가정이 그것들이다. Bauman, Zygmunt, Does The Richness of the Few Benefit Us All? (Malden, MA: Polity Press, 2013), 31-32. [본문으로]
  42.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금융자본과 토지자본을 바탕으로 한 경제적 불평등이 노동을 통한 수입으로는 극복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피케티 토마/정경덕 외 역, 『21세기 자본론』 (서울: 글항아리, 2014), 690.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