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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과 신학

신자유주의의 양극화와 해방신학 그리고 기본소득 / 홍인식

신자유주의의 양극화와 해방신학 그리고 기본소득 [각주:1]

 

홍인식

 

들어가면서


“지난 몇 십 년 동안 우리는 기아, 역병, 전쟁을 통제하는 데 그럭저럭 성공했다는 것이다. 물론 완전히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이 문제들은 이제 자연의 불구해하고 통제 불가능한 폭력이 아니라 관리할 수 있는 문제가 되었다.”유발 하라리가 그의 저작 ‘호모 데우스’ 의 서문에서 한 말이다. [각주:2]

하라리는 계속해서 지난 100년 동안 인류는 기술과학의 발달로 생물학적 빈곤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오늘의 문제는 배고파 죽는 것이 아니라 과식으로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라리는 세계에 가난이 아직도 남아있지만 기아로 죽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하는 매우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과연 그런가?


나는 이런 하라리의 언급은 지나친 낙관주의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신자유주의 정책이 가져올 수 있는 전 세계적인 파멸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소홀히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하라리의 기아문제의 접근은 정치경제적 접근을 무시한 것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라리는 기아의 문제는 오늘의 상황에서 인간의 정치, 경제 기술의 발전으로 극복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기에 이제 기아의 문제는 더 이상 인류의 의제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각주:3] 사실인가? 오늘 우리에게 가난의 문제는 더 이상 인류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30여 년 동안 온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심각한 상처를 인류에게 남기고 있다. 젊은 작가가 쓸쓸히 혼자서 죽어간다. 많은 대학생들이 등록금과 또 학자금 대출로 인한 빚의 중압감에 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이것뿐이겠는가? 오늘 우리들이 당면하고 있는 참혹한 사회 현실에 대한 예는 수 없을 것이다. 인류에게 있어서 가난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가난은 여전히 우리의 풍요로운 삶을 위협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참혹한 현실 뒤에는 신자유주의의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 소고에서는 우선적으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대하여 신학적 분석과 비판을 하고자 한다. [각주:4] 특별히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종교적 비판 [각주:5]이 되어야 함을 강조할 것이며 이를 위하여 신자유주의가 내 , 포하고 있는 내재적 신학을 분석할 것이다. 두 번째 신자유주의의에 대한 종교-신학적 비판과 더불어서 이에 대한 신학적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세 번째 대안모색의 연장선상에서 기본소득이 갖게 되는 신학-성경-목회적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신자유주의와 종교


일반적으로 경제모델을 두 가지 영역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부의 최대산출을 지향하는 경제모델이다. 이 모델은 과학기술과 관리체제의 혁신으로 고용을 줄이고 인건비를 감소하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다. 따라서 이 모델은 구조적인 실업률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다. 더욱이 이 모델은 노동인구의 자유로운 순환은 제한하면서 금융시장의 세계화와 자본과 상품의 자유 순환에만 중점을 두고 있으며 자연적으로 소수의 부의 축적을 목적으로 하게 되다. 따라서 이러한 경제 모델 하에서 빈부의 격차의 심화현상 다시 말하면 양극화 현상의 발생과 격화는 필연적이다.


두 번째 우리는 빈곤퇴치를 목적으로 하는 경제모델을 상정할 수 있다. 이 모델은 국가적 차원에서나 국제적 차원에서, 일자리창출과 더 나은 소득의 분배가 경제적, 정치적 결정에 중점적인 기준이 되는 것으로 설정된다. 가난퇴치와 부의 공정한 분배를 목적으로 하는 경제 모델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향상으로 인한 생산력 과 이로 인한 부의 증가가 아니라 인간발전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계층의 상황으로부터 출발하여 한 사회의 경제-정치적 형태를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부와 가난이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는 혼합적인 사회 정황에서 그리고 부의 축적과 부의 분배를 동시에 상정하고 추구해야 하는 모순적인 현실 속에서 기독교회의 복음 선포는 추상적이고 죽음 너머의 세계만을 향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복음 선포는 분명한 의미에서 오늘의 경제, 사회, 문화, 정치 그리고 국제관계의 맥락에서 해석되고 정리되고 선포되어져야 한다. 특히 신자유주의 정책의 지속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상당수가 가난으로 인하여 비참한 삶을 영위해야만 하는 오늘의 삶의 현장을 외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정모는“진정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복음이 되어야 하며 또한 현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죄의 실체를 드러내고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성령의 행동에 대하여 밝혀주는 선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선포로서 세상의 모든 희생자들에게 예수를 통하여 계시된 생명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각주:6]


종교가 된 신자유주의


위에서 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종교비판이 되어야 한다고 전제하였다. 반드시 막스의 이론을 도입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시장으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는 이미 종교의 영역에 그 자리를 잡고 있는 것에 대하여 의심할 수 없다.


오늘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 시장 혹은 신자유주의 정책은 어느 누구도 비판하거나 그 존재에 대하여 의문을 품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존재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특히 오늘 한국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들어서는 정부가 우파적 혹은 좌파적 성격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어떤 정부도 시장 존재자체를 문제 삼을 수 없다. 시장 존재자체를 문제 삼는 순간 그는 절대적 존재 다시 말하면 신성한 존재(신성, 神性)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단자가 되고 만다. [각주:7]



이러한 현상은 시장은 이미 우리에게 종교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구체적인 현상이다. 심지어는 사회주의적 좌파 정책을 구사하고자 하는 정부들도 어김없이 시장 존재자체만은 부정하지 않는다. 시장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 없이 오늘의 사회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 자체가 불경스럽게 여겨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은 종교비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종교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비판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각주:8]

 

시장을 신으로 섬기는 신자유주의의 종교적 성격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작업은 아니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하여 연구하고 또 글들을 발표하였기에 이 부분에 대하여 자세하게 분석하거나 신학적인 증명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에 내재되어 있는 신학을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적으로 살펴보기를 시도할 것이다.


신학만 신학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경제학을 비롯한 모든 다른 학문도 어떠한 철학적 혹은 신학적 가정을 토대로 그들의 이론을 전개하곤 한다. 우리는 그것을 내재적 신학 혹은 내생적 신학 (內生的, endogenous theology)이라고 부른다. [각주:9]


성정모에 의하면 신자유주의는 일반 종교의 전반적인 특징들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낙원에 대한 약속, ‘원죄’의 개념, 혹은 세상에서 고통과 죄의 근본적 원인에 대한 설명,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길이나 치뤄야 할 대가(필연적 희생)’ [각주:10] 등이 그것이다. [각주:11] 성정모는 신자유주의의 내재적 신학을 통하여 신자유주의의 종교화가 이루어짐을 주장한다.

 

낙원에 대한 약속


중세시대에는 낙원이나 유토피아는 죽음 이후에 성취되는 종말론적 희망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 낙원에 대한 약속은 시장체제에 의해서 우리의 역사 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자본주의의 결실로서 신자유주의는 그리스도교가 죽음 후에 대하여 약속했던 약속의 이행자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적 전망으로부터 경제세계화의 과정을 변호하는 자들은 오늘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여러 모양의 문제들은 시장체제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체제의 불완전한 실천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따라서 완벽한 신자유주의적 시장체제가 완성되면 모든 인류는 낙원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인류에게 죽음후가 아닌 오늘의 인간의 역사에서 이루어진 낙원에 대한 약속과 희망을 주고 있다. 이것은 종교적 약속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시장에 대한 한없는 믿음과 신뢰이다.


Milton Friedman은 자본주의비평가들을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한다. “자유 시장을 비난하는 논증의 대부분은 그와 같은 자유에 대한 믿음의 부족 때문이다.” 밀톤의 이 같은 증언에 의하면 이제 시장은 신적인 영역으로 들어섰음이 증명되고 있다. 시장은 이미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그 존재자체에 대하여 논증하거나 토론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마치 신의 존재는 신학의 전제사항이기에 신학의 주목적이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경제학은 시장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시장은 이제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희망과 믿음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신학의 중심적인 관심의 대상이 하나님 또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 형상에 대한 분별이듯이 경제학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시장의 구체적인 실천과 실현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이제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시장에 대한 체험과 시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계시(성서에 나타나는 계시)와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와 전통(교회의 전통)과 더불어 우리의 생활과 교회, 그리고 사회 속에 나타나거나 잠재되어 있는 시장(하나님)의 다양한 형상을 분별하기위한 노력을 계속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죄


낙원에 대한 약속이 사회적, 경제적 문제로 인해서 상처를 입은 현실과 맞부딪힐 때 그 고난과 악의 원인을 해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해결방법(시장체제의 완성)을 제시하는 것 외에도 사회의 문제와 위기의 근원을 설명해야한다.


모든 이념들이나 종교들처럼, 신자유주의 역시 사회문제의 근본적 원인에 대한 진단으로부터 출발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죄악의 근원이 되는 근본적인 악(종교적용어로는 죄)에서 시작한다. 성경말씀중 이 주제를 다룬 것이 아담과 하와의 신화이며 그리스도교신학에서는 시간적 의미가 아니고 ‘근원’이라는 논리적 의미에서 이를‘원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사에서 저질러진 첫 번째 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죄에 대해 말하고 있다.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여받는 자리에서 Hayek은 신자유주의의 신학과 인식론, 인류학의 기초를 언명하는 강연을 하였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연상케 하는 ‘지식 소유의 시도’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하여 그는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려는 의식적인 목적을 가지고 수립되는 경제정책의 시도는 경제위기를 발생케 하는 근원이 되고 있으며 그것은 사회에 많은 해를 끼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 시도는 시장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 이외에도 인간의 지혜가 미치지 못하는 시장의 메커니즘에 대한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는 시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겸손하게 시장에 굴복하고 시장의 매카니즘으로 하여금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게 내버려 둠으로서 우리의 사회적 문제를 무의식적으로 해결하도록 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은 없다.


‘원죄’에 대한 다시 읽기는 시장에 대한 지식소유와 그것을 통하여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도록 하는 시도는 모든 경제-사회적 문제의 근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거의 모든 죄는 ‘선을 행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시장의 법칙을 이행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가장 힘 있는 자들의 생존과 가장 약한 자들의 죽음이라는 체제를 규정짓는 법칙을 따르고 선을 행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선을 찾기보다는 단지 악을 피하는 길을 찾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악은 무엇인가? 악은 선을 행하기를 원하며 그리고 그런 방법으로 시장의 방향을 주도하고 시장에 간섭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한 선은 자유 시장을 방해할 수 있는 원인이 되는 선을 행하길 원하는 유혹에, 나와 모든 다른 사람들이 빠지지 않도록 싸워야하는 것이다.


‘원죄’의 재해석으로 인하여 우리는 사랑의 명령의 전도를 목격하게 된다. 사랑은 더 이상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연대가 아니다. 사랑은 선을 행하는 유혹에 빠지는 것을 피하면서 시장의 본래의 이익(시장경쟁)을 보호하는 것이다.

 

필연적 희생


인간의 모든 욕구의 만족이 기술 발전으로 인한 부의 무한정축적으로 가능하다고 믿을 때, 최고의 과학기술발전을 만들어내는 사회체제가 낙원 즉‘풍족한 삶’으로 가기위한 진정한 길이라는 것을 믿게 된다. 다른 대안이 없이 시장체제가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을수록 모든 것은 시장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합법화 될 것이다. 이렇게 시장체제는 우리를 풍족한 삶으로 이끄는‘길과 진리’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는 시장논리의 절대적 군림은 사회경비절감과, 무능력한자(가난한자)들과 자본의 축적과정에서 필요 없는 사람들에 대한 배척을 의미함을 알고 있다. 가난한 자들의 고통과 죽음이, ‘구원자적인 발전’의 동전의 다른 한 면처럼 여겨질수록, 그 고통과 죽음은 그 발전을 위한 ‘필연적 희생’이라고 해석되어진다. 가난과 즉음은 여러 다른 사실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어떤 이들은 그 사실을‘살인’이라고 말하고 또 다른 이들은‘필연적 희생’이라고 해석한다.


죽음과 고통을‘필연적 희생’이라고 해석할 때 우리는 그릇된 순환 논법 앞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 희생이 시장체제의‘성직자’들이 약속한 결과를 내어놓지 못할 때 그 희생의 정당성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 희생이 헛된 사실처럼 여겨지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그로 인해‘성직자’들이 수백만 명의 살인자들로 간주되지 않기 위해서는 시장과 희생의 구원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재천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충분한 희생이 없었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말하며, 이와 같은 방법으로 앞선 희생이 쓸모없는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각주:12]



필연적 희생의 논리에 대한 충성심이외에, 우리는‘오만한자’(시장 앞에 겸손을 표하지 않고 시장에 간섭하기를 시도 하는 자들을 의미한다)들을 희생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원흉들이라고 비난하는 행위를 보게 된다. 투쟁적인 조합들, 민중운동, 민중교회와 공동체, 좌익당파들은 일반적으로 필연적 희생을 역행해 감으로서 낙원이 임하는 것을 지연시키는 죄인들처럼 취급된다.


그 희생의 논리가 세계전체가 아니라 주로 서구의 사회적 정신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거의 대다수의 종교에서 우리는 희생의 신학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서구의 그리스도교전통은‘희생 없이는 구원은 없다.’라는 개념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종류의 신학은 고통을 어떻게 극복해야할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의미를 주는 장점이 있음과 동시에 억압체제를 정당화 시키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사회적 정신의 기초에 끼친 희생의 논리의 영향에 대한 출현이 미칠 영향에 대한 인식은 우리사회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왜 자본주의 논리에 저항하지 않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시장체제의‘소비의 꿈’을 나누어 가지는 것 이외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낙원을 얻기 위함이나, 속죄함을 받기위해(무능력, 패배, 가난한 자가 되는 죄) 희생의 요구가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각주:13]

 

신자유주의의 종교적 신조들[각주:14]

 

1920년대 월터 벤쟈민(Walter Benjamin)은 “종교로서의 자본주의”(Capitalism as Religion, 1921)라는 저서를 발간한다. 그는 이 저서에서 자본주의를 막스베버가 지적한 것처럼 특정한 종교에 의해 형성된 이념을 넘어서서 ‘본질적으로 종교적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의 저서에서 종교개혁은 자본주의의 발생을 지원한 것을 넘어서서 종교자체가 자본주의화를 이루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벤쟈민의 이론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인류역사에 존재했던 제의적 종교에서 가장 공리주의적 종교이다. 자본주의의 제의는 영구적이며 그것은 주중의 어떤 특정한 날에만 이루어지는 제의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제의적 종교 안에서 가장 숭배되는 것은 ‘성공’과‘ 소비능력’이다. 이 같은 벤쟈민의 지적은 오늘에도 유효하다. 더욱이 제의적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을 통하여 그 종교성을 강화시켜가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로서 신자유주의의 교리를 요약해 보자.

 

1. 신자유주의는 그의 비인간적이며 경직된 유일신 종교로서의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의 속성으로 알려져 있는 전지, 전능, 무소부재 와 섭리의 개념이 시장에게 적용되면서 시장은 그 어떤 경쟁자도 용납하지 않는 질투의 유일신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시장 밖에는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장이 제시하고 있는 구원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세계 3분지 2 이상의 인류에게는 제공되지 않는 구원일 뿐이다.


2. 종교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소수의 구원을 위하여 다수의 필연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과정적인 희생이며 결국에는 모두를 구원하기 위한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수에게 제공되는 구원은 필연적으로 빈부의 격차와 더불어서 양극화 현상을 발생하게 만든다. [각주:15]

 

3. 종교로서 신자유주의는 어떠한 경우에도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자유로운 경제의 흐름을 방해하고 가로막는 악마적인 요소로 간주한다. 그것의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신성 모독적 행위이다. 따라서 어떤 형태의 노동조합의 행위도 성스러운 신의 질서를 파멸시키려고 하는 도발행위로 간주된다.


4. 종교로서 신자유주의가 신의 자유로운 활동을 지원하고 함께 하기 위해서 공권력은 합리적인 세제 운영, 상품거래의 완전 자유화, 노동과 고용 시장의 유연화, 경제의 민영화를 위하여 사용되어져야 한다. [각주:16]



5. 종교로서 신자유주의는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도구들을 통하여 투자자와 주식 시장의 소비자들을 위한 성스러운 지침들을 제공한다. Wall Street Journal, The Financial Times, The Economist 등과 같은 경전들(bibles) 사용하여 신자유주의의 ‘행복의 복음’을 전파한다.

 

6. 새로운 종교로서 신자유주의의 성사(聖事, sacraments)는 소비자들에게 매순간 신선하게 제공되는 상품들이다. 각종 광고를 통하여 소비자들의 소비욕망을 부추기며 새롭고 신비로운 소비의 세계로 그들을 안내한다. 성사(聖事)로서 상품은 거룩한 제단과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다. 성사에 참여는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사(聖事)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지 못한다. 그것은 소비능력을 갖추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신의 은혜일뿐이다.


7. 새로운 종교로서 신자유주의의 성전은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이다. 신자유주의의 성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은행에 대한 존경과 경배를 아끼지 않는다. 모든 종교의 경우처럼 신자유주의 성전에서도 희생제사가 이루어진다. 희생제단에 바쳐지는 제물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자연의 생명들이다. 이들은 생산성 향상과 부의 축적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하여 아낌없이 희생된다. 낙원의 성취를 위하여 필연적 희생은 기본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8. 종교로서 신자유주의는 철저한 개인영역의 개체화와 신성화를 추구한다. 신자유주의는 인류의 공동체적인 차원을 지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을 메순간 원자화(atomized)하여 의미 없는 단지 귀여운(cute)존재로 만드는 제도화된(institutionalized) 개인주의를 지향한다. 신자유주의 안에는 공동체적 혹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개념은 사라진다.


9. 종교로서 신자유주의는 시장에 대한 근본적이고 교리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신자유주의의 근본주의는 종교의 근본주의와 유사하다.[각주:17] 자신들의 주장을 강제하며 다른 주장을 용납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이념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매우 근본적이고 강압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서 경직성을 나타낸다. 경직성은 경제이론의 상황 적용에 있어서도 그 모습을 나타낸다. “변화되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 이론이 아니라 상황자체이다.”라는 말에 종교적 근본주의와 경직성이 드러난다. [각주:18]

 

10. 종교로서 신자유주의의 복음은 경쟁력이다. 신자유주의적 사회의 모든 영역 즉 초중고등 학교, 대학, 전문인 양성과 교육, 과학연구, 발전 등 모든 것은 경쟁력에 의해 좌우된다. 교육의 목표는 가치관을 소유하고 있는 온전한 인간의 형성이 아니다. 경쟁력 있는 인간의 생산이다. 경쟁력은 시장의 종교가 외치는 유일한 복음이다. 이 복음 외에는 인간을 구원할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경쟁의 복음 없이 경제적 성장, 사회복지와 정치적 독립은 존재할 수 없다. [각주:19]

 

기독교 신학과 경제


인간의 가치관과 기독교적 가치관의 악마적인 도치현상과 인간의 제도를 신성화하며 그의 이름으로 부의 무제한적 축재의 약속에 대한 대가로 인간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시장체제의 도전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리스도교의 믿음이 그 ‘제국’에 대항하는 투쟁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것에 어떠한 원리적 근거가 있었다고 한다면, 신성화된 체제에 직면하여 우리는, 이미 Marx가 지적했던 것처럼 ‘종교에 대한 비판은 모든 비판에 대한 전제조건이다.’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우리는 신성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만 비판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의 ‘성스러운 종교적 서광’을 거두어 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종교성이라는 것은 타락한 우상숭배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비로소 그 체제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우리의 사회 속에서 배가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적 믿음과 신학이 자본주의의 이론과 활용에 대한 비판을 위하여 독특한 공헌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특히 윤리적-영성적인 차원에서 그러하다. 기독교는 윤리-영성적 차원에서 인간을 희생물로 간주하는 제의적 종교로서 신자유주의의 도전에 효과적인 대응을 하며 대안적 삶에 대하여 제시해 줄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유발되는 윤리-영성적 행위와 대안적 삶에 대해서 논하지 않을 수 없다.

 

1. 해방의 윤리적 영성


해방신학은 물론 기독교 윤리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무엇보다도 한 사회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난하며 아무런 사회적 보호 장치도 갖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행해지는 모든 종류의 억압과 얽매임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로부터 출발되어진다. 예수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그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삶을 살아왔다.


여기서 예수의 가난한 사람들과의 동일시를 단순한 비유로 간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삶을 지탱하고 있었던 근본적인 논리와 동력이다. [각주:20] 해방의 윤리적 영성에서 양심은 단순한 특정 상황에 대한 도덕적 원리의 적용만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서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표정에 대한 응시와 아픔을 함께 하는 답변을 포함하고 있다. [각주:21]

2. 정의와 평화의 윤리적 영성


불의와 부정은 어느 덧 우리 인류의 삶에서 일상적인 현상이 된 것 같다. 불의는 조직화 되어 있고 더욱이 메델린에서 개최되었던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문서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미 제도화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인간 존재는 이러한 폭력과 불의에 영원히 매여 사는 것을 거부하고 저항하고 있다. 인간은 정의를 갈망하고 또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인간의 정의를 향한 열망은 성서와 그리스도가 추구하는 영성과 일치한다. 정의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마태 6;33)


Rene Padilla는 사회의 모순을 단순히 경제적 혹은 정치적인 문제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이 문제는 오히려 사회정의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늘의 현실과 사회윤리의 측면에서 볼 때 오늘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모든 경제 관계에 있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정부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가난한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사회 정의를 실천하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현실이 우리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현 경제시스템의 악마적인 성격을 고발하는 책임을 면제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인 그리고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우리의 가진 것들을 활용해야 한다는 청지기적인 책임을 회피하도록 만들어 줄 수는 없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기독교 공동체는 복음을 통하여 다른 사회구조를 변혁시킬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구조라는 것”(John H. Yoder)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각주:22]


모든 인간의 역사는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 폭력의 역사를 언급하지 않고서 인간의 역사를 말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폭력은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의 선교사역이 현대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폭력의 문제와 분리되어 질 수 없음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많은 성서적 혹은 신학적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신약적 전망으로부터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함과 그리고 그러한 삶이 필연적으로 평화의 실천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평화는 조화, 평안함, 번영 그리고 생의 풍요로움이 함께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 뿐만 아니라 평화는 정의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정의와 평화는 서로 분리되어 질 수 없는 관계성 속에 놓여 있다. 이사야의 말을 빌리자면, 정의의 열매는 평화이며, 정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 아니겠는가.(이사야 32:17)

 

3. 은혜의 윤리적 영성


우리 사회는 점차 은혜가 사라지고 있는 사회이다. 모든 것은 대가를 치뤄야 한다.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다. 모든 것에 가격이 매겨진다. 가장 짧은 시일 안에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관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부채는 1원까지도 남김없이 갚아야 한다. 여유와 쉼은 그 자리를 잃어가고 오직 경제발전을 위하여 모든 것들은 희생되어지고 유보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대안적 윤리적 영성을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예언자 전통과 이 전통을 이어가는 나사렛 예수의 윤리적 영성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안적 윤리적 영성!, 그것은 은혜의 윤리적 영성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상업적 관계가 아닌 사회의 유토피아적 꿈을 외친다.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 어찌하여 너희는 양식을 얻지도 못하면서 돈을 지불하며, 배부르게 하여 주지도 못하는데, 그것 때문에 수고하느냐? "들어라,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으며, 기름진 것으로 너희 마음이 즐거울 것이다.(이사야 55:1~2)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삶이 모습을 돌아볼 것을 말하면서 값없이 받은 것을 값없이 베풀 것을 요구한다. 대가를 치러야 하는 오늘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기독교는 은혜의 윤리적 영성, 대가를 치루는 것을 넘어서는 대안적 윤리적 영성을 말해야 한다. 대가를 치루지 않는 사회, 그것은 하나님과 나사렛 예수가 꿈꾸는 사회이다.

 

4. 동정과 자비의 윤리적 영성(고난의 동참과 나눔의 영성)


세계화는 인류의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세상을 제안하였지만 우리는 곧 그것이 환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세계화는 인류의 빈부격차를 더욱 벌어지게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계화 과정 내부에 태생적으로 자비의 영성의 부재로 인한 것이다.


자비의 부재는 세계화 과정 자체가 ‘나와 다른 인간’, 동물, 그리고 자연세계의 필연적인 희생에 의해서 생성되고 유지 지탱되어 진다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를 행하여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세계화된 사회구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소외되어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동정과 연민의 영성을 추구하고 있다. 해방신학은 동정적인 행동, 다시 말하면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동참과 나눔의 행동으로 표현되는 신학적 그리고 인간론적 원리인 자비의 영성을 실천하고 있다.


이러한 해방신학의 자비와 동정의 영성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의 전통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사야는 희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당시의 유대교를 비판하면서 (이사야 1:10~15) 믿음의 핵심적인 주제로서 정의의 추구, 억압받는 자의 인권 보호, 고아와 과부에 대한 돌봄을 제안하고 있다.(이사야 1:17) 더 나아가서 호세아는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호세아 6:6)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예수에게서도 이러한 동정과 자비의 영성은 손쉽게 발견되어진다. (마태 9:13, 12:7)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동정과 자비의 영성을 강조한다.(누가 10:29~37) 그리고 말한다. “가서 너도 이같이 하라”

 

5. 이웃의 윤리적 영성


보프는 그의 최근의 저서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위한 덕목 II"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를 대치하는 좀 더 나은 세상을 가능케 하기 위한 덕목으로 친절함(베풂), 더불어 삶(상생), 존중 그리고 관용을 지목하고 있다. 그는 존중의 덕목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개념으로서 “이웃”을 강조한다. 이웃의 존재에 대한 인정 없이 “더 나은 세상”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각주:23]



“더 나은 세상”은 이웃에 대한 인정, 각 인간 존재의 내재된 소중한 가치에 대한 인정과 이웃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중으로부터 출발되어진다고 강조한다. 신자유주의는 이웃을 배제한다. 이웃에 대한 존중은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문화를 지향한다. 나 자신만의 행복과 세계에 전념하며 모든 것은 “나의 세계”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신자유주의 세계에서는 수동적이고 무표정한(무감각한) 인간성이 형성되어진다. 신자유주의적인 인간은 이제 더 이상 현 세계의 개혁(변화)을 도모하려 하지 않으며 “나의 세계”를 변화시키려 할뿐이다. 그에게 가장 중심적인 삶의 주제는 “나의 세계” 일 뿐이다. “나의 세계” 의 강조는 현 사회에서 반문화운동의 사라짐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homo politicus의 종말과 더불어 homo psicologicus와 homo oeconomicus의 출현을 의미하고 있다.[각주:24]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어떤 윤리적 영성의 목회를 지향해야 하는 것일까?


기독교가 “더 나은 세상”의 건설을 위하여 가져야 할 모습은 Boff가 지적하는 “이웃의 윤리적 영성”이다. 이웃의 영성은 우리로 하여금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인정, ‘섞어짐’(mestizage)의 실천, 받아들임, 인종간의 교제와 소통, 문화 간의 대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잊혀 있던 억눌린 이웃, 소외 받고 있는 이웃, 침묵을 강요당한 이웃, 모욕당하고 억압당하고 있는 이웃들에게 우리의 관심을 집중하도록 만들 것이다. [각주:25] 해방신학은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 을 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삼음으로서 “이웃”을 발견하는 영성을 지향하고 있다.



6. 연대와 공동체의 윤리적 영성(포함의 영성)


욕망의 시대에서 보다 더 구체적인 현상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빈부격차의 벌어짐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빈부격차 현상은 점차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인 차이에 근거한 사회적 계급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의 시대는 “신 부족사회” [각주:26] 를 형성하게 만들고 있다. 경제적 차이로 인하여 형성된 새로운 부족(사회계급)들은 각기 고유한 문화를 형성한다. 교육, 문화, 예술, 취미생활 심지어는 식생활에서도 급격한 차이가 발생하게 되고 부족 간의 관계는 단절되어진다. 새로운 부족시대의 등장이다. [각주:27]



유대교의 이방인에 대한 소외와 차별의 사회적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시민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8:11~12)라고 외치면서 부족을 넘어서는 서로 다름이 어울려 살아가는 연대와 공동체의 사회를 가르쳤다.


해방신학은 이러한 계급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한 가난한 자들의 연대를 구체화한다. 기초공동체의 형성을 통하여 가난한 자들의 역사적 위력을 강화시켜 왔다. 연대만이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도록 해 줄 것이다. 해방신학은 결코 혼자만의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영성을 포기한다. 해방신학은 연대 속에서 함께 이루고 함께 가는 하나님나라를 꿈꾸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과 실천도 그의 영성이 연대와 공동체를 지향하는 “포함의 영성”(inclusive spirituality)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듯이 해방신학의 영성도 그러하다.

 

7. 생명의 윤리적 영성


생명은 하나님의 은사 중 가장 값진 은사중의 은사이다. 우리가 보존해야 할 가장 최우선의 가치는 생명이다. 생명은 모든 윤리적 권리의 기초와 근원이 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윤리의 버팀목이기도 하다. 생명의 보호와 방어는 모든 윤리적 행위의 출발점이며 귀결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생명은 최대이익 창출을 위하여 언제든지 희생당할 수 있는 요소이다. 특히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생명, 소비사회에서 소비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의 생명은 고귀하게 취급받지 못한다. 그들은 신자유주의 경제발전과 최대이익의 창출을 위하여 언제든지 자본과 시장의 제단위에 바쳐질 수 있는 필연적인 희생제물이다. 이러한 생명 경시와 도구화는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양극화 현상을 강화시키고 있다.


기독교에 있어서 생명의 보호와 방어는 하나님 존재 자체에서도 그 정당성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죽음의 우상들을 대항하여 생명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한다. (마태 12:27) 생명존중의 문화는 기독교가 신자유주의와 시장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이 세계를 향하여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외침이다. 소수의 이익을 위하여 생명을 함부로 그리고 손쉽게 파괴하는 이 세계를 향한 가장 강력한 항거의 근거를 제공해 준다. 예수의 복음 선포에서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그 어떤 것에 우선적 가치를 갖고 있다. 인간 생명의 구원은 안식일 실현에 앞서 있다. 예수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인간 생명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수는 자신을 진리와 생명의 길이라고 말하면서 이 세계에 풍요로운 생명을 주기 위하여 왔다라고 말한다. 그의 부활 역시 죽음에 항거한 생명의 승리와 죽음의 피해자들의 회복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예수의 윤리적 영성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을 보호하라. 삶을 살라 그리고 살 수 있도록 협력하라.”를 외치게 하고 있다.



8. 억압적 권력의 윤리의 비판과 대안으로서의 약함의 윤리적 영성
(독재적 권력을 향한 비판과 대안으로서)


권력에 대한 유혹만큼 강력하면서도 섬세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유혹은 없을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을 향하여 손짓하는 유혹들 가운데서 권력에 대한 유혹만큼 인간관계를 파괴시키는 유혹도 드물 것이다. 기독교적 삶의 분야에 있어서도, 권력(그 권력이 자신의 직분에서 올 수도 있고 또한 어떠한 영적인 카리스마에서 오는 권력일 수도 있다)은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되어 질수도 있으며 많은 경우 성서구절과 신학적 뒷받침을 동반하는 ‘경건’이라는 옷을 입게 된다. [각주: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권력,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을 지라도 그것은 악마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동일하게 되려고 하였던 아담과 하와의 시도를 계속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각주:29]

 

권력 남용에 대하여 예수는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각주:30] 그는 부패한 권력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무시하기도 한다. [각주:31] 그러면서 예수는 독점적이고 폭력적인 권력의 대안으로서 섬김과 약함의 신학을 소개한다. [각주:32] 예수는 승리적인 메시아니즘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윗의 전통에 의한 메시야 칭호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각주:33] 오히려 그는 자신의‘메시야 됨’을 고난 받는 종의 모습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출애굽, 예언자, 지혜서 그리고 시편의 영성적 전통 등과 같은 종교적 전통의 선상에 두고 있다.

 

9. 충돌과 예언적 비판의 영성(경제적 종교 비판, conflictive spirituality)


충돌과 갈등은 예수의 윤리적 영성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각주:34] 예수가 살던 당시의 사회는 다원화된 사회였으며 또한 여러 분야에서 갈등의 요소를 다분히 소지하고 있었다. 예수는 당시 사회의 갈등에 대하여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응하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갈등을 유발함으로서 문제의식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각주:35]


예수의 갈등유발 혹은 충돌은 여러 측면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는 민중의 자유를 위한 정치권력을 향한 도전과 충돌, 정의를 위한 경제 권력과의 충돌, 인간과 믿음 공동체의 자유를 위한 종교권력 및 공식신학과의 대결, 여성의 존엄성과 주체성을 위하여 가부장적 사회와 충돌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자신을 포기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도전적 질문을 던짐으로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깊은 관계에 대하여 성찰하도록 한다.


이렇듯 예수는 수많은 질문과 충돌, 그리고 갈등을 유발시키면서 당시의 사회에 도전하였다. 예수의 해방적 영성을 진심으로 따르고자 하는 교회는 욕망의 사회를 향하여 질문을 던지고, 대결하며 충돌하고 갈등을 유발시키는 시도를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시급하게 회복 되어야 할 목회적 기획과 시도는 이 같은 충돌, 예언자적 비판과 갈등유발의 영성을 반드시 포함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10. 비-양립성(Incompatibility)의 윤리적 영성
(하나님의 나라와 맘몬 사이에서)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나님과 돈(맘몬)의 비-양립성(Incompatibility)은 매우 과격하게(radical)하게 주장되어 왔고 이에 대한 어떠한 예외도 용인되지 않았다.[각주:36] 이러한 생각은 단지 원리로만 주창되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서 실천되어졌다. 제자들은 가난한 자의 삶을 살아야 했고 필요 이상의 어떠한 물건의 소유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거주할 장소도 마땅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늘 떠돌이로 살아야만 했다. [각주:37]


그러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보여 주었던 비-양립성은 후대 교회에 의하여 왜곡되어졌고 “만족의 문화”에 안주하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그 실효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현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맘몬 사이에 존재하는 비-양립성에 대한 성서적 그리고 역사적 교훈을 소홀히 하고 말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물질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과 신앙의 선배들의 실천적 삶에 대한 역사적 교훈의 빈혈증을 앓고 있다. 우리들은 물질에 관련한 교회의 풍요로운 가르침과 경험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물질과 부가 가져 올 수 있는 위험에 대한 예수의 경고를 무시하고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복음서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물질적인 번영이야 말로 하나님의 복의 명백한 증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에 반해 가난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성실의 대가라고까지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번영의 신학’이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오신 ‘예수의 복음’의 가르침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돈-신의 개념을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절대적으로 물질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회가 물질적인 목적의 실현을 향한 개인의 욕망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someone)’가 되기 위해서는‘무엇인가(something)’를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를 소유하기 위한 과정에서 이웃의 존재는 쉽게 무시되거나 소홀해 진다. 이러한 가치관이 오늘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관들이 오늘의 경제 시스템을 유지하고 강화 시키는 것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서 물질소유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을 회복시키려는 노력은 시급하다. 우리는 오늘 인간 존재의 경제적인 면과 관련되어 있는 인간의 시도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근본적인 동기가 무엇인가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리들의 삶의 스타일이 무엇인가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를 포함한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관들과 오늘의 우리의 삶이 얼마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맘몬 사이에 존재하는 비-양립성에서부터 출발되어 질 것이다.

 

11. 친절과 품음의 윤리적 영성


친절은 인간존재의 인간화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요소이다. Leonardo Boff는 “Otro mundo posible”(가능한 다른 세상)라는 저서의 서문에서 “무엇이 세계화 현상으로 하여금 인간의 얼굴을 갖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각주:38] 그는 4 가지 덕목을 열거하면서 이 덕목에 기반을 둔 윤리적 영성을 발전시키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인간의 관계는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적이 되지 못하며 또한 그 어떤 세계화도 인류에게 유익하지 않으며 인류의 미래를 위한 약속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은 나그네와 외국인 환대를 자연스러운 의무로 여기고 있었으며 그러한 가치관은 이스라엘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창 18:1~6, 19:1~11, 사사기 19:1~30) 나그네 환대의 거부는 하나님의 강력한 처벌 대상이 되었다. 나그네와 외국인 환대는 신약의 복음 전통에서도 핵심적인 가치로 나타난다. 여러 차례에 걸쳐서 예수는 환대는 하나님나라의 중요한 덕이라고 가르친다. 그의 종말론적 비유에서 나그네 환대는 인간의 구원의 가장 핵심적인 판단 기준으로 등장한다. (마태 25:31~46) 나그네와 작은 자들에 대한 거부는 예수 자신에 대한 거부로 간주된다.


Boff는 친절함의 덕목을 실현하기 위하여서 그 기초로서 “다른 사람들”(Others)의 “되찾음”을 언급한다. 경쟁을 복음으로 여기고 그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체제를 형성하고 있는 오늘의 욕망의 시대에서“다른 사람들”은 설 자리를 갖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은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고 사라지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을 잃어버린 욕망의 시대의 극복을 위한 대안적 모델은 “다른 사람들”을 회복하는 친절함고 받아들임의 영성으로부터 시작되어 질 것이다.


잃어버린 “다른 사람들”의 회복을 위한 친절과 받아들임의 영성을 위한 Boff의 제안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기에 여기에 인용해 본다. “세계화의 현장에서 친절함과 받아들임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많은 장애에 접하게 될 것이다. 다양한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애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서 몇 가지 실현되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1. 무조건적인 실천 의지 배양하기 2. 풍요로움으로 다름을 받아들이기 3. 다른 사람의 소리에 신중하게 귀 기울이기 4. 솔직하게 대화하기 5. 정직하게 거래하기 6. 공동체를 위하여 이기적인 관심을 포기하기 7. 의식적으로 책임 있는 행동하기 8. 용감하게 자신의 생각과 의견의 상대성을 인정하기 9. 지혜롭게 상황의 변화를 도모하기” [각주:39]

 

12. 하나님나라를 향한 유토피아적 윤리적 영성


윤리, 영성, 희망 그리고 유토피아는 기독교와 분리되어 질 수 없는 중요한 개념들이다. 특별히 윤리적 영성은 ‘좀 더 나은 세상’의 실현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행동하도록 우리를 부추기는 요소들이다. 희망은 윤리적 영성 그리고 유토피아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러한 요소들의 조합을 우리는 예수의 생애에서 발견한다. 윤리적 영성의 사람, 예수 그는 희망을 가진, 꿈꾸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부활을 통하여 희망 자체가 되었다.


예수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늘 ‘하나님의 나라’의 유토피아에 대하여 희망을 걸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희망과 꿈 을 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유토피아적인 희망과 꿈을 포기하도록 종용하고 있다. 오늘의 상황은 우리가 원하던 그렇지 않던 현 체제만이 현실에서 가능한 유일한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치사회 행동을 통해서 변혁시키려는 노력보다는 현 체제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옳은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각 개인의 경제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함으로 신자유주의 체제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 희망을 상실하게 만든다.
만일 자본주의 체제가 인류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인류는 숙명적으로 맘몬 신의 지배 하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인류는 착취와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예언자적인 상상력’(Walter Brueggemann)을 동원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예언자적인 상상력’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바탕으로 미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설정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다.

 

예언자적인 상상력과 유토피아적 꿈에 대한 포기는 우리로 하여금 맘몬에 의해서 조작되어진 현 정치 사회경제체제에 대하여 대항하는 의지와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가 꿈꾸었던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꿈을 꾸어야 한다.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종언을 고하면서 혼란기에 접어들고 있는 요즘과 같은 시기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을 살려 내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는가.

 

양극화 사회에서 기본소득이 가지는 신학적 의미


신자유주의적 시장 경제의 신학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은 우리로 하여금 시장의 운리적 영성은 기독교의 윤리적 영성과 함께 갈 수 없음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나사렛 예수의 포함(inclusive)의 윤리적 영성은 신자유주의 시장의 배제적 윤리와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시장의 배제적(exclusive) 성격은 오늘의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양극화 현상을 초래하고 강화시키고 있다. 양극화 현상은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풍요로운 생명의 기회를 앗아갈 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죽음의 세력 아래 무릎을 꿇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해방, 연대, 친절, 동정과 자비 그리고 포함의 기독교 윤리적 영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대안들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기독교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소외시키고 배제하는 가장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로부터(아래로부터) 출발하여 연대의 세계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급격하게 그리고 자주 논의되고 있는 기본 소득에 대한 논의는 이러한 연대의 세계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은 기본소득에 대한 보다 성경적이며 신학적 그리고 목회적 차원에서 보다 깊은 논의와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본소득에 대한 토론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강원돈 교수는 그의 글을 통하여 기본소득의 구상을 토마스 무어에게까지 소급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기본소득에 대한 구상은 7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기본소득에 대한 이야기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 다시 말하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문제와 직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문제와 인간다움이 분리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우주 창조이야기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에덴동산에서의 삶의 이야기는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 우주와 인간, 인간과 인간, 우주와 우주 사이에 아무런 부끄러움과 경쟁이 없는 그래서 인간다움과 우주다움의 삶이 이루어진 이상향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사람으로 하여금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마음대로 먹게 한 것을 기본소득의 보장으로 이해하면서) 에덴동산의 삶은 기본적 삶의 문제가 해결되어 벗고 지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주님의 기도, 하늘의 뜻과 일용할 양식


주기도문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오심을 위해 기도드린다. 그리고 그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요원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다.


오늘의 상황은 절망적이다. 신자유주의적 소비사회에서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잇는 오늘 우리들의 사회의 변화에 대한 희망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상황변화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변화에 대한 가능을 포기한 채 그저 하루하루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 현상을 보면서 후기 근대적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의 발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회정의나 역사의 실현 같은 개념들은 이제 중요한 의미를 주지 못하고 있다. 그저 나의 개인적인 삶이 침해 받지 않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이기적인 자아의 실현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쾌락이다. 이러한 쾌락은 소비본능을 만족시킴으로서 오늘 우리의 사회를 더욱 소비 중심적 사회로 만들고 생명을 소홀히 여기도록 마들고 있다. 생명의 가치는 오직 소비능력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위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기도하라고 한다. 그러기에 이 땅의 삶은 포기하거나 허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펼쳐 나갈 믿음의 삶의 현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이 땅의 삶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현장으로 만들어갈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풍요로운 삶이 거부되고 억압받는 신자유주의의 사회에서 오늘 우리는 하늘의 뜻이 땅에도 이루어지기를 바라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투쟁할 것을 요구한 예수는 우리에게 뒤이어 일용할 양식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일용할 양식의 밀접한 관계에 우리의 눈을 돌려야 한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일용할 양식을 통하여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들로 다가오고 있는 밥에 관한 것을 주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주님께서는 자신 자체가 가난한 사람으로서 살아오셨고 가난한 사람들이 당시 유대민중들의 90%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도미니크 크로싼은 예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최하위층에 속해 있었고 심지어는 예수는 공식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아 문맹자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각주:40] 그만큼 예수에게서 있어서도 밥 먹는 일은 절박한 일이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고 투쟁해야 한다. 이 투쟁은 오늘의 사회에서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되어지기도 한다.


주기도문에 의하면 기본소득은 오늘을 위한 양식이 되어야 한다. 1980년대 이후부터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세계경제가 눈부시게 발전하도록 했다. 수 십 년 전과 비교해 볼 때 세계경제규모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의 수는 더 늘어났다. 잘 살게 되었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아지게 된 이런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나오는 것처럼 하루 24시간 동안 필요한 양식이라는 개념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그 많은 재물들이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고 있고 이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이다. 쌓아두는 음식, 하루 24시간이라는 음식의 수명의 한계를 망각한 사회는 결국 썩어져 가는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성서에서는 이러한 하루 일용할 양식의 개념을 분명히 하고 있고 또 하루가 지나면 그 양식들의 썩음으로 인하여 그 사회가 혼란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출애굽기의 본문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만나를 이틀 분을 쌓아두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 만나는 썩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약한 냄새를 풍겨내고 말았다.


오늘 세계의 경제계가 그렇다. 소수의 큰 손들이 재물의 한계, 하루라고 하는 한계를 망각한 채 부를 쌓아두고 있기 때문에 한없는 축적의 욕망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삶이 썩어가고 있다. 하루의 개념을 망각한 ‘재물 쌓기’는 결국 인간의 한없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기본 소득은 오늘의 양식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급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의 양식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소득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신자유주의적 욕망을 극복할 때 가능해 질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종교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또 다른 의미에서 기본소득은 일용할 양식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필요한’ 혹은 ‘존재에 필수적인’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의 성경-신학-목회적 의미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일용할 양식 다시 말하면 ‘존재에 필수적인’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기본소득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한 것이다.


인간은 두 가지 요인에 의해서 살아간다. 첫째는 필요성이다. 둘째는 욕망이다. 그런데 욕망과 필요성의 차이를 구분 짓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성정모 교수는 말한다. “만일 우리가 무한한 욕구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하면 한계는 사라지고 무한정적으로 그 어떤 것들을 원한다. 그리고 끝없이 원할 때는 나누어 주기 위한 것은 절대로 남아 돌지 않으며 항상 무엇인가가 모자란다. 그래서 그들은 소득과 부의 재분배에 대한 대화를 용납할 수 없다.” [각주:41]

 

마지막으로 주기도문에 나타난 기본소득의 성서-신학-목회적 의미는 모두의 양식을 위한 것임에 있다.


성서는(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십일조와 안식년 그리고 희년제도를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는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민족들 사이에 가난한 사람이 없도록 하는 사회보장제도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 이 제도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양식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보장하고 있다. 결국 성서는 같은 민족 가운데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전 이스라엘 민족의 배고픔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성서의 가르침은 이처럼 먹는 것을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전 민족적 차원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일용할 양식(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 모두는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본소득은 이 땅위에서 배고픈 사람,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이 없어지는 그 날을 성취하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이다.


예수는 오천 명의 군중이 굶주리고 있을 때 제자들에게 말한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오늘도 예수는 우리들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1. 본 소고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해방신학적 접근과 해석의 관점에서 기술되었다. 따라서 본 소고에서 인용되는 문헌들은 스페인어 서적이 다수 임을 밝혀둔다. [본문으로]
  2.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김명주 옮김 서울: 김영사, 2017. 15쪽 [본문으로]
  3. 같은 책, 16~19쪽 [본문으로]
  4. 구약의 예언자들에 의한 경제 권력의 우상적 성격에 대한 비판은 Walter Bruegemann의 The Prophetic Imagination, 2nd Edition, Augsburg Fortress, 2001 과 J.L Sicre "con los porbres de la tierra", La Justicia social en los profetas de Israel,(‘땅위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의 사회정의) Cristiandad, Madrid, 1975 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5. 이에 대하여서는 Enrique Dussel, Las metaforas teologicas de Marx,(막스의 신학적 은유) Verbo Divino, Estella, Spain, 1993 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6. 성정모, 시장, 욕망, 종교: 해방신학의 눈으로 본 오늘의 세계, 서울: 서해문집, 2017, 21쪽 [본문으로]
  7. 하비 콕스. 신이 된 시장: 시장은 어떻게 신적인 존재가 되었나. 우강은 옮김, 문예출판사. 2016을 참고하라. [본문으로]
  8. Hugo Assmann, La idolatria del mercado(시장의 우상숭배), DEI coleccion Economica-Teologica, San Jose, Costa Rica, 1997. 131 쪽 [본문으로]
  9. 성정모, 위의 책, 27쪽. 성정모는 이 표현을 우고 아스만에서 빌려온다. [본문으로]
  10. 같은 책, 28쪽 [본문으로]
  11. 본 소고는 성정모의 같은 책 27쪽에서 87쪽 까지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소개한다. [본문으로]
  12. Hugo Assmann, op.cit., 181쪽 [본문으로]
  13. 지금까지 살펴본 신자유주의 시장의 모든 신학은 자본주의 시장체제가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성육신이라는 이론을 옹호하는 신학 서적과 그러한 내용의 논문들을 계속하여 발표하는 미국의 Michael Novack과 같은 전문적인 신학자들도 있지만 어느 특정한 신학자의 주장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과 그들의 이론에서 발췌한 것이다. [본문으로]
  14. 종교로서 신자유주의가 주창하는 종교-경제적 신조는 신자유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폐해인 양극화 현상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경제적 부가 증가하는데도 불구하고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는 이유에 대한 연구는 신자유주의가 갖고 있는 고유한 생각과 이념들을 분석해 보아야 한다. [본문으로]
  15.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결과로서의 양극화 현상의 심화에 대해서는 한스 피터 마르틴, 하랑드 슈만 공저. 세계화의 덫, 강수돌 옮김, 영림카디널, 1998. 장 지글러, 탐욕의 시대: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 2005. Franz J. Hinkelammert, El mapa del Emperador(제국의 지도, DEI, 1996.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16. 1989년 와싱톤 합의에 의한 사항들이다. 워싱턴 합의(Washington consensus)는 미국과 국제금융자 이 미국식 시장경제체제를 개발도상국 발전모델로 삼도록 하자고 한 합의를 말한다. 냉전시대 붕괴 이후 미 행정부와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등 워싱턴의 정책 결정자들 사이에서는 '위기에 처한 국가' 또는 '체제 이행 중인 국가'에 대해 미국식 시장경제를 이식시키자는 모종의 합의가 이뤄졌다. 미국의 정치 경제학자 존 윌리엄슨은 1989년 자신의 글에서 이를 'Washington consensus'라고 불렀다. 이 합의에서 주장하는 주요 내용은 사유재산권 보호, 정부규제 축소, 국가 기간산업 민영화, 외국자본에 대한 제한 철폐, 무역 자유화와 시장 개방, 경쟁력 있는 환율제도의 채용, 자본시장 자유화, 관세 인하와 과세 영역 확대, 정부예산 삭감, 경제 효율화 등이다. [본문으로]
  17. Jose Tamayo, Fundamentalismo y dialogo entre religiones,(근본주의와 종교간 대화) Trotta, Madrid. 2004 는 종교근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근본주의를 잘 비교하고 있다. [본문으로]
  18. Joseph Stiglitz, El malestar en la globalizacion(세계화의 폐해), Taurus, Madrid, 2002. [본문으로]
  19. Ricardo Petrella, "El evangelio de competitividad"(경쟁의 복음): Le Monde Diplomatique, 2004년 1월. Petrella는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신자유주의의 십계명을 소개하고 있다. 1. 어느 누구도 자본, 시장, 금융과 기업의 세계화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이를 방해하는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2. 기술의 계발과 발전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원가와 노동임금의 절약을 통한 최대이익 창출을 위하여 노력해야한다. 3. 공공의 간섭과 보호정책을 배제하면서 시장의 완벽한 자유화를 추구하라. 4.모든 권력은 시장으로 이양하라. 정치권력은 잔지 시장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사용하라. 5. 모든 영역에서 공공재산을 재거하고 사회의 통치권을 민간 기업에게 이양하라. 6. 치열한 경쟁세계 안에서 생존하기를 원한다면 강한 존재가 되라. 7.사회정의 옹호를 포기하라. 그것은 쓸모없는 미신이다. 이상주의 혹은 종교적 행위 또한 비생산적인 행위들이다. 8. 공동체 혹은 사회적 차원을 배제한 채 절대적 가치로서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라. 9. 모든 행위에서 정치적 윤리적 차원보다 경제적 차원의 우선순위를 옹호하라. 10. 모든 영역에서 시장 종교의 모든 제의와 성사와 거룩한 독서, 성전과 성직자들을 존중하고 경배하라. [본문으로]
  20. 사 1;17, 누가 4:16~21, 7:18~32, 마태 25:31~46 [본문으로]
  21. Leonardo Boff, Virtudes para otro mundo posible I (다른 세상의 가능을 위한 덕목들 I), Sal Terrae, 2005, 138 쪽 [본문으로]
  22. Rene Padilla, Discipulado y Mision(제자도와 선교), Karios: Buenos Aires, 1997, 56~57쪽 [본문으로]
  23. Leonardo Boff, 언급된 책 II, 43쪽~66쪽 [본문으로]
  24. Lipovetsky가 지적하는 것처럼 ‘집단적 나르시즘’의 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25.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보여 지듯이 잊혀지고 거부당한 이웃들에 대한 관심과 존중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마태 5:1~9) [본문으로]
  26. Viktor Frankl, El hombre en busca de sentido(의미를 찾는 인간), Barcelona, Herder, 1986. 8 쪽. 그가 말하는 부족성의 출현은 신자유주의 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상임을 밝혀둔다. [본문으로]
  27. 실질적으로 우리는 서울에서도 강남과 강북, 강남에서도 동네에 따라서 삶의 문화와 형태가 달라짐을 목격하고 있다. 최근 발표된 강남과 강북 학생들의 학력 차이는 이러한 새로운 부족 사회의 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본문으로]
  28.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이름으로 자신이 가진 권력을 정당화하고 합리화 시킨다. [본문으로]
  29. 신자유주의의 권력지향성은 권력의 남용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본문으로]
  30.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마가 10:42) [본문으로]
  31. 헤롯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식일에 율법이 금지한 일을 함으로서 체제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본문으로]
  32.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마가 10:43~45) [본문으로]
  33. Juan Jose Tamayo, Etica liberadora del cristianismo frente a teologia neoliberal del mercado,(시장의 신자유주의적 신학과 기독교의 해방적 윤리) 미간행 논문, Madrid, 2008, 27 쪽 [본문으로]
  34. 이에 대하여 Juan Jose Tamayo는 예수에 대하여 인내와 순종의 이미지가 강조되어 왔음을 지적하면서 이는 명백한 해석학적 오류하고 주장한다. (Juan Jose Tamayo, Jesus y los conflictos, Bases para una etica teologica de los conflictos(예수와 갈등, 갈등의 신학적 윤리를 위한 기초): Frontera 14(abril-junio, 2000) 23~44쪽 [본문으로]
  35. 안식일 병자 치유 사건 등은 예수의 의도적 갈등유발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본문으로]
  36. 마 6: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눅 16:13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본문으로]
  37. Justo Gonzalez는 자신의 저서 Faith and Wealth (Harper & Row, 1990)에서 초기 4 세기동안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이 같은 물질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실제로 적용하면서 살아왔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본문으로]
  38. Leonardo Boff, 언급한 책 I, 11쪽. [본문으로]
  39. Leonardo Boff, 언급한 책 !, 135쪽~143 쪽 [본문으로]
  40. John Dominic Crossan, Jeus A Revolutionary Biography(1994), 37~52 쪽 [본문으로]
  41. 성정모, 욕구와 시장, 그리고 신학, 홍인식 역 일월서각, 2000, 81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