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본소득과 신학

기본소득의 잠재성 / 류보선

기본소득의 잠재성

 

류보선(문학평론가,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이사)

<글의 순서>


1. 기본소득에 관한 부끄러운 고백 셋과 ‘기본소득과 나’
2. 지독한 가난병의 반복 - 기본소득의 필요성과 필연성
3. 기본소득 혹은 우리 시대의 ‘적절 정치경제학’ – 기본소득의 잠재성
4. 팬데믹 세상과 기본소득이라는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1. 기본소득에 관한 부끄러운 고백 셋, 그리고 ‘기본소득과 나’

 

고백할 것이 있다. 세 가지다. 우선, 나는 기본소득에 대해 잘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기본소득에 대한 이해란 나에게 한없이 관대한 내가 보기에도 한심한 수준이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믿기 힘들겠지만 이 정도다. 기본소득적인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기본소득이란 개념이 탄생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노동소득, 자산소득이 이제까지 소득의 전부였으나 이제는 기본소득이 주어질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아니 주어져야 한단다. 그래야 ‘조만큼’ 눈 앞에 와 있는 지구의 파국을 막을 수 있단다. 당장 파국의 상황이 오지는 않을지라도 파멸을 향해 질주하고 있음에 틀림없는 인류 문명은 이제 그 질주를 멈추고 모든 생명체가 공진화할 수 있는 바람직한 사회로 변신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이 역능을 행사할 거의 유일한 처방이 기본소득이라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역사적 필연성은 우리의 희망과 달리 파국, 파멸, 종말, 재난의 상황이며, 그중에서도 인류를 재앙으로 이끌 근원지는 구조적 경제적 불평등 혹은 불평등 경제란다. 그런데 현재의 경제적 불평등이 심각한 것은 지금의 경제적 불평등이 재화가 부족해서 생기는 불평등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산물 혹은 재화는 넘쳐난다. 넘치고 넘쳐서 쓰고 남은 것들, 혹은 쓰지 못하고 남은 것들이 세계 구석구석을 쓰레기로 덮을 정도다. 한데 누군가는, 아니 다수의 하위주체들은 생존의 위기와 바로 내일에 대한 극심한 불안에 쫓기는 쓰레기가 되는 삶, 혹은 벌거벗은 삶을 살고 있다. 맑스가 말했고 피케티가 이어 말했듯이, 아니 굳이 그들의 말이 아니더라도, 공공이 만들어낸 생산물을 개인들이 불균등하고 비대칭적으로 소유하면서, 그것도 소수가 독점하면서, 소수의 소수는 감당할 수 없는 부를 어디엔가 쌓아두고, 그 나머지 다수는 생존을 위한 혈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 도래한 형국인 셈이다. 절대강자, 아니 절대부자는 저 높은 곳에서 뒷짐을 지고 있고, 너무 높은 곳에 있어 그들의 존재를 깨닫지도 못하는 하위주체들은 말 그대로 만인이 만인과 투쟁하는 재난적 상황을 살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불평등은 언젠가, 그것도 머지않은 시기에 경제 전체를 멈추어 세울 수 있으며, 경제가 한순간 멈추면 이번의 코로나19사태가 징후적으로 보여주듯 인류 전체는 순식간에 파국적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아니면 <기생충>에서 보듯 극소수의 오만과 만인과 만인의 투쟁이라는 상황은 혐오와 복수의 정동과 결합되어 세계 전체를 파국으로 치닫게 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인간과의 경쟁에서 밀려난 보다 더 하위주체들은 경쟁할 인간이 없는 자연으로 들어가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자연을 수탈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며, 이러한 인류세적 폭력은 이미 사천성 대지진에서 그 무시무시함을 확인했듯 인류 전체를 한순간에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으리라는 진단도 있다. 하여튼 이 노골적인 경제적 불평등의 구조를 개선하거나 혁신하지 않으면 인류는 재앙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이 재앙을 막을 수 있는 방책이 있으니 기본소득이란다. 이곳에 존재하는 모두가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고 또 그들 모두가 생산에 참여하므로, 그러니까 이곳에 존재하는 모두가 자신들이 생산하는 것들을 나누어가질 자격과 권리가 있으므로 현재 시점 1인당 60만원만 기본적으로 소득을 나누어 받으면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의 상당수가, 비록 기본소득이 시행되면 초래된 변화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상은 각기 다르나, 해결되리라는 기대 섞인 예측 혹은 예측에 따른 기대가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을 끌어모으고 있는 중이라고나 할까. 경제적 불평등(그것이 가져올 재앙에 가까울 처절한 혐오와 복수의 쟁투)이 완화될 것이고, 그러므로 각 인간들은 실질적인 자유를 보장 받게 될 거란다. 그러면 젠더 불평등 문제도 개선될 것이고 난개발에 따른 생태위기도 숨통이 트일 것이라는 전망을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좀 신나는 장면을 그려보는 이도 있다.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게으를 수도 있고, 심지어 상징질서에 의해 끊임없이 강요되는 그것을 하지 않아도 되는 무위의 삶도 가능하다는 것. 말하고 나니 더 부끄럽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에 기웃거린지 3년인데, 꼭 서당개 정도라니!


고백한 김에 더 고백할 것이 있다. 나는 기본소득 세상에 대한 지독한 회의론자이다. 기본소득의 온전한 정착 가능성이 별로 높지 않다고 보는 편이다. 아니 거의 실현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세상이 바뀌어야, 예컨대 인간 모두의 실질적 자유가 보장되는, 그러니까 모두의 몫을 모두에게 나누는 세상이 오지 않는 한, 그리고 기본소득을 도입하지 않아 인류가 파멸하는 헤겔적 의미의 세계의 밤이 되지 않고서는, 기본소득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그리고 누군가 ‘기본소득이 온다’고 말할 때 나는 ‘기본소득은 항상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을 것’이며, 그리고 우리에게 올 때는 이름만 기본소득일 뿐 기본소득의 참정신과 실질적 내용은 빠져나간 ‘무늬만’ 기본소득이 올 가능성이 높다고 짐작하는 편이며, 그 결과 역설적이게도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을 오히려 의심은 눈초리로 바라본다. 기본소득은 도대체가 내가 이득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이 공도동망의 길인 줄 알면서도 태연히 선택하는 현존재들의 심상지리와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하는 행동이 옳지 않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내가 옳은 행동을 한다고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을 터이고 나만 손해볼 텐데, 왜 내가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이랑 다르게 살아야 하지' 하는 계산적 주체, 냉소적 주체가 오늘날 우리의 현존형식이라고 한다면, 이 냉소적 주체와 기본소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법-정신과는 서로 이질적이어도 너무 이질적이다. 그러니까 기본소득은 현존재들의 심상지리와 그 심상지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역사적 필연성을 동시에 거슬러야 비로소 실현가능한 제도이자 정책이라는 것인데, 내겐 이것이 도대체가 가능해 보이질 않는다. 한마디로 내겐 기본소득이란 세상도 바꾸고 그 안에 사는 인간도 바꾸어야 가능한, 아니면 한 사람 한 사람을 변화시켜 결국에는 세상을 바꾸어야만 가능한 터, 그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기엔 나에겐 인간에 대한 믿음도 역사에 대한 신념도 부족한 편이다. 게다가 내가 기본소득의 실현 가능성에 결정적으로 의문을 표하는 건, 모두의 것을 모두에게 배당하는 기본소득 시스템이 형식적으로 구현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그것이 기본소득이 목적하는 세상, 그러니까 모든 개인이 실질적 자유를 구현할 수 있는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는 예측 때문이다. 그럴 것이다. 저 오래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통치성의 원리인 ‘구별짓기’는 더욱 교활해지고 집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본소득이 제도화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또 다른 출발점에 선다는 것에 불과할 터인데, 그곳에서 또 다시 출발하자 할 때 선뜻 또 다시 같이 길을 나서 줄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그땐 기본소득이 제도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꿈꾸었던 기본소득 세상은 아닌 배리관계에서 허덕일 터, 그리고 그렇게 되면 기본소득 자체가 부정당하는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을 터, 결국 기본소득도 저 오랜 역사를 노회하게 견뎌온 자본주의적 통치술에 포섭될 가능성이 짙다. 그렇다면 가도 가도 끝이 없으나 가봐야 결정적인 절망을 맛볼 그 길을 굳이 떠나야 하는 것일까. 여행이 시작되면 길이 끝날 그 여행을 굳이 나서야 하는 것일까. 역시 말하다 보니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는 기본소득이라는 꿈에 대해 회의주의자인 듯하다.


누군가 물을 것같다. 그런데 왜 기본소득 언저리에서 맴도느냐고? 인정한다. 나도 그게 의문이다. 나는 국문학도다. 이 호칭이 더 익숙하다. 나는 내가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라고 소개되는 이 상황이 힘겹다. 나는 내가 국어국문학과 교수이고 문학평론가로 소개될 때 더 편할 뿐 아니라 자존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럼에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로 소개되는 이 자리에 앉은 것은, 내가 오랫동안 미신처럼 떠받들고 있는 네 개의 좌표 때문이다. 아니 그 네 개의 좌표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때문이다. 너무 노골적으로 맹목적인 믿음이어서 되도록 감추어 두고 싶었던 것인데, 오늘은 완전 무장해제하고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한 만큼 이 자리에서 밝힌다. 그것은 이것이다.

 

그뿐 아니라 저일된 시구(市區)라든지, 근대식 건물로든지, 사회설이나 위생시설로든지, 제법 문화도시의 모습을 차리고 있는 본정통이나, 전주통이나, 공원 밑 일대나, 또 넌지시 월명산 아래로 자리를 잡고 있는 주택지대나, 이런 데다가 빗대면 개복동이니 둔뱀이니 하는 곳은 한 세기나 뒤떨어져 보인다. 한 세기라니, 인제 한 세기가 지난 뒤라도 이 사람들이 제법 고만큼이나 문화다운 살림을 하게 되리라 싶질 않다.
……(중략)……
“응……세상의 인간이 통째루 가난병이 든 것 같아! 그놈 가난병 때문에 모두 환장들을 해서 사방으로 더러운 농(膿)이 질질 흐르구……에이! 모두 추악하구……”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게 어디 그 사람네 죈가, 머……”
“가난한 거야 제가 가난한 건데 어떡하나?”
“글세 제가 가난허구 싶어서 가난한 사람이 어딨수?”
“그거야 사람마다 제가끔 부자루 살구 싶긴 하겠지……”
“부자루 사는 건 몰라두 시방 가난한 사람네가 그닥지 가난하던 않을 텐데 분배가 공평털 않어서 그렇다우.”
“분배? 분배가 공평털 않다구?……”(채만식의 『탁류』)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 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김구, 『나의 소원』)

 

바디우에 있어 역시 사건에 대한 충실성의 시간은 전미래다. 미래를 마주보고 우리 자신을 추월하여, 마치 우리가 앞당기기를 바라는 미래가 이미 여기에 와 있는 듯이 현재에 행동하는 것이다.(지젝,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항상 시도했고 항상 실패했다. 괜찮다. 다시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사무엘 베케트)


현실이 얼마나 복잡한가? 그리고 또 얼마나 맹렬한 속도로 변화하는가? 한데 세상의 변화를 냉정하고 미세하게 읽어낼 수 없는 나는 1930년대 한 작가가 그려낸 세계상 혹은 세계감으로 현실을 잰다. 내게 최악의 세상이란 채만식이 그려낸 바로 그 세상이다. 식민지 아닌가? 모든 것이 일본 제국 중심으로 재편된 세상. 그러니 그곳에서 조선인들은 지옥을 살았다. 식민지 시대부터 ‘생산의 공공성과 소유의 사적 성격’이 사회운영원리인 자본주의 시스템 본격적으로 가동되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재앙같은 그 시대에 생산은 조선인이 하는데 소유는 일본인과 일본인에 기생하는 그들이 했다. 나머지 조선인은? 거의 동물이 되었다. 『탁류』에 따르면 많은 조선인들이 딸들을 팔아 생계를 잇는, 그러면서도 그것에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 정도로 치명적인 삶을 살았다. 식민지적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일본의 조선 통치는 근대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라느니보다도 고대에서 볼 수 있는 강한 민족에 의한 약한 민족의 정복의 성질’(임화)을 지녀서 노골적인 수탈이 일상화된 호모사케르적 삶을 살았으니. 한데 해방 이후에도 민중들의 삶을 개선되지 않았다. 독재자들 탓이려니 했다. 우리 민중에게 빨판을 대고 과잉의 이익을 독점하는 신식민지적 상황 탓이려니 했다. 아니면 미국이나 일본에 영혼을 팔고 권력을 산 그놈들 탓이려니 했다. 하지만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가 되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더 이상 독재자 탓을 할 수 없는 데도 부는 몇몇에게 독점되었다. 극단적인 불평등 속에 몇몇은 감당할 수 없는 재화에 한없는 피로와 권태를 느끼고 나머지 거의 대부분의 민중은 지독한 가난병에 시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채만식의 세상이 반복되는 것은 채만식이 말한 ‘지독한 가난병’의 근본 원인은 오로지 식민지 권력 때문만도 아니고 독재자 때문만도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채만식의 세상이 반복되는 것은 소외된 노동으로 만들어지는 잉여이윤 혹은 과잉의 이윤을, 계산하는 자본가가 쓸어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을 비롯한 하위주체를 피땀 흘려 노동하면 할수록 그로 인해 발생하는 잉여의 이윤은 소수의 자본가에게 집중된다. 민중들은 일하면 일할수록 빌어먹을! 가난병에 시달리고, 민중들이 일하는 것을 그저 냉정하게 바라볼수록 자본가에게는 막대한 부가 주어지는 세상.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었다. 제국 일본이 아니어도, 『제국』의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양키들의 노골적인 탐욕이 아니어도, 양키에 기생해서 법의 이름으로 법을 정지시키는 독재자들이 아니어도 채만식의 세상은 반복되는 것이었다. 민주화를 위한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민중들이 사람답게 살기 원하는 권력자가 들어서도, 그들이 정말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했어도, 채만식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생산의 공공성과 소유의 사적 성격, 그것을 바꾸지 않는 한, 인간을 화해할 수 없는 갈등의 상태 혹은 정신적 동물왕국의 상태로 만들 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를 파멸로 이끄는 자본주의의 미친 질주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나 할까. 식민지 탓이라고 여겼던 채만식 세상은 식민지 이후에도 한 번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분배의 불공평성에 관한 한 더 치명적인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나에겐 채만식 세상이 아닌 또 다른 나라, 이곳이 아닌 저곳에 대한 상상과 그 나라에 도달하기 위한 기획이 필요했다. 그때 나에게 운명처럼, 벼락처럼, 외설적으로 다가온 것이 김구의 ‘아름다운 나라’였다. 강하지도 부유하지도 말자는 것. 지금의 부만으로도 잘 나누면 모두가 잘 살 수 있으니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윤을!’ 창출하는 비인간적이며 반생태적인 계산가능성의 논리를 벗어던지고 여유로운 문화의 삶을 향유하자는 것. 이것만이 인류 전체를 전쟁같은 경쟁으로 몰아넣고 지구 전체를 파멸로 이끄는 발전의 신화를 종식시킬 수 있다는 것. 김구의 ‘아름다운 나라’는 내가 접한 최상의, 그리고 최선의 ‘창공의 불빛’이었다. 그러나 이 ‘일말의 희망’은 김구의 암살과 더불어 어둠 속에 묻혔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좀처럼 되살아나지 못했다. 당연 김구의 ‘아름다운 나라’ 이전에도 이후에도 저 세상에 대한 상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에겐 김구의 ‘아름다운 나라’가 채만식의 세상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로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제까지 상상됐고 현실화되었던 저 세상 거의 모두가 채만식의 세상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이성의 파괴라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고 말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는커녕 여전히 채만식 세상이 반복되고 있다는 절망감에 쩌들어 있을 때 만난 것이 있다. 모두들 충분히 예상하실 수 있는 그것, 바로 기본소득이다. 이게, 뭐지, 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이 가능하지 했다. 채만식 세상에서 김구의 나라로 갈 수 있는 의미 있는 미로의 출구를 찾은 듯한 환희의 순간이었다고 할까. 그랬다. 나는 그렇게 기본소득과 우연히, 그리고 강렬하게 조우했다. 그러나 그 흥분이 가라앉는 순간 그 흥분만큼이나 강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매혹적이나, 그러나 현재의 인간의 심상지리나 그것이 만들어가고 있는 역사적 필연성을 거슬러야 하는 것이어서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하는, 그 몹쓸 나의 비관주의에 다시 사로잡히고 만 것이었다.


이 비관주의에서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한 말들이 있다. 지젝과 베케트의 말이다. 그 말들을 만나는 순간 나는 ‘하지만 실현 불가능하면 어떤가? 실현불가능해 보이더라도 거듭 시도하고, 거듭 실패하면 되지 않겠는가? 해서 거듭거듭 ‘멋지게 실패하다’ 보면 어느새 기본소득 세상 가까이 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지를 다질 수 있었다. 기본소득이 채만식 이래 악순환의 형태로 반복되는 그 지독한 가난병을 해결할 미래적 사건이라면, 나를 추월하여 기본소득 세상이 이미 도래한 듯 행동하다 보면 내가 그토록 바라는 기본소득 세상에 좀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것 아닐까 하고 말이다. 아니, “참된 행위는 그에 관해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어떤 투명한 상황 속의 전략적 개입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참된 행위가 지식의 틈새를 메우는 것이다”라는 지젝의 말처럼 거듭거듭 기본소득 세상을 위한 시도들을 하다 보면, 기본소득은 어느새 세상을 바꾼 채로 우리 곁에 와 있지 않겠는가 하고 말이다.


이렇게 나는 기본소득을 잘 알지도 못하고 그것의 실현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면서도 기본소득의 세상이 마치 이미 여기에 와 있는 듯 행동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이 기본소득 세상을 향한 밀알을 싹 띄울 작은 터전이 되기를 염원하면서.


2. 지독한 가난병의 (악순환적, 악무한적) 반복 - 기본소득의 필요성과 필연성

 

글의 서두를 잘못 잡은 것같다. 고백하다 보니 계속 고백하게 된다. 나에겐 세계관이 없다. 도대체가 내가 이 세계의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가늠하고 측량하고 계산할 역사철학적 맥락이 나에겐 없다. 하지만 나에겐, 시인 이문재가 세계관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세계감이 있다고, 믿으려 하는 편이다. 나는 가급적 내 앞에 많은 텍스트를 가져다 놓고 그걸 읽으면서 세상을 읽고 세계에 대해 느낀다. 해서 내 비록 세계에 대한 인식론적 지도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나, 그에 못지 않다고 믿으려 하고 있는 중이긴 한데, 세계에 대한 정동의 지도를 가지려 노력하고 있다. 그 마음의 지도 혹은 정동의 지도가 그리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는 이렇다.


여기,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있다. 한국 최초의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과 미국 아카데미 4관왕으로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이 영화는 우리 사회의 극단적인 불평등 문제를 다룬다. <기생충>은 세 가족 이야기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 가족의 몰락기이다. 여기, 세 가족이 있다. 한 가족은 바우만의 ㄴ레트로토피아』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늘 더 큰 구별과 특권을 원하는 1퍼센트’의 ‘외부인 출입제한 지역’에서 품위 있게 살고, 또 한 가족은 ‘반지하’에서 허덕이며 살며, 나머지 한 가족은 ‘지하’에 갇혀 산다. 한 가족은 순수하고 단순하며, 또 한 가족은 교활하고 집요하며, 나머지 한 가족은 비굴하고 필사적이다. <기생충>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세 계급 혹은 세 계층으로(두 계급 혹은 두 계층이 아니다!) 분할하는 바, 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예컨대 <기생충>은 우리 사회를 저 위에 ‘극도로 부유한’ 분(?)들이 있고, 그에 기생하기 위해 피 터지게 싸우는 하층의 두 계급이 있다고 구조화한다. ‘나 빼놓고 다 망해라’라는 명령을 좇아 사회의 거의 모든 부를 한 계급이 독점하고 있건만, 그래서 그들 빼고 망해버린 아니 그들 때문에 망해버린 두 계급이 있건만, 정작 전선은 상층부와 (두) 하층 사이에 형성되지 않는다. 대신 싸움은 두 하층 사이에서 그야말로 처절한 생존경쟁 혹은 생존투쟁의 형태로 벌어진다. 그리고 상층부는 그 싸움을 전혀 모르거나 간혹 표면으로 나타나면 저 위에서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기생충>은 이처럼 상층부와 하층부 사이를 가로지르는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지 않기에 더욱 강력한 구별짓기-선에 주목한다.


<기생충>의 서사는 반지하에 사는 또 한 가족의 생존투쟁기에서 시작한다. 반지하에서 지하로 추락하기 직전, 이 가족에게 어느날 ‘운수좋은 날’처럼 동아줄이 내려온다. 모든 가족이 매달릴 만큼 튼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닌 이들 네 명의 가족은 이 끈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필사적이므로 이들에게 예의라든가 품격이라든가 하는 것은 없다. 인정사정 보지 않는다. 자신들이 매달린 동아줄에 같이 매달리려는 또 하나의 가족을 가차 없이 밀어낸다. 아등바등, 천신만고 끝에 이들 가족은 아주 잠시 동안 1%의 삶에 대한 흉내내기의 시간을 갖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추락이 시작된다. 그저 잠시 동안 1%의 삶을 흉내냈을 뿐인데, 그를 위해 나머지 한 가족을 저 지하로 밀어버렸을 뿐인데, 지하로 밀어내기 위해 누군가를 의도치 않게 죽음에 이르게 했을 뿐인데, 이들에게 도래한 신성모독의 결과는 참담하다. 지하의 가족은 더 추락할 곳이 없으니 죽고, ‘반지하’의 가족은 지하로 쫓겨난다. 그러면, 상층부는? 상층부의 가족 역시 피해를 입는다. 하지만 그는 죽음 중엔 최고의 죽음(?)을 맞는다. 즉 그는 죽음으로 더욱 순수한 사람으로 승화된다. 세 가족 모두가 가족구성원 중 누구를 죽음으로 잃지만 그중 숭고한 죽음 혹은 희생양으로 기억되는 것은 상층부 구성원의 죽음뿐이다. 하충부의 죽음은 그 처절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애도되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의 정당한 심판으로 받아들인다. 죽음들의 결과 상층부는 희생양을 통해 더욱 신성해지고 그에 따라 당연히 상층부와 하충부 사이의 구별짓기는 견고해진다.


한마디로 <기생충>은 역사의 반복 혹은 반복의 역사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상층부와 하층부 사이의 견고한 구별짓기, 하층부 사이의 격렬한 생존투쟁과 비극적인 죽음들, 그리고 상층부와 하층부 사이의 더욱 견고해지는 구별짓기. <기생충>이 그려낸 이 역사의 반복이 비극적인 것은 이 반복이 나선형의 위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쪽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다시말해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사회적 불평등이 극심해진다. 뿐만 아니라 그 반복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지랄(?)같은 전도도 더욱 극심해진다. 사실 우리 사회의 기생충은 상층부다. 그들은 하층부의 소외된 노동과 권리에 해당하는 공유부 등을 사적으로 독점하고 빨아먹으며 몸집을 키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의 몸짓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더니 어느새 우리 세계의 거의 모든 부를 독점하게 되고, 그 결과 <기생충>이 그린 것처럼 1%의 상층부 분들에게 하층부의 그 무수한 존재들이 기생하는 꼴이 된다. 종합하자면, 기생충이 숙주로 보이고 숙주가 기생충으로 얹혀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이 전도가 더욱 가속화되면서 종말 혹은 파국을 향해 질주하는 시대, 이것이 <기생충>이 그려낸 우리 시대의 초상 혹은 자화상이다. 이러한 <기생충>의 현실인식은 지젝의 파국론을 연상시킨다. 슬라보예 지젝은 2011년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 연설에서 특권층이 아닌 99%의 우리가 루저가 아니라 전인류를 파탄에 몰아넣은 1%의 특권층이 바로 루저라고 올바로 규정하는 대대적인 인식상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인류의 파국은 막을 수 없다고 말하거니와, 이를 감안하면 <기생충>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분명해진다. 우리가 기생충이 아니라 저들이 바로 기생충이라는 것, 그러므로 지금 이대로의 상징질서가 아닌 선순환적인 상징질서를 위한 한 걸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 이러한 인식상의 전환과 대안적 상상력의 발명이 있지 않는 한 하층부의 존재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비극, 그러니까 파국적 상황은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


그런가 하면, 여기, 또, “한국문학사에서 ‘회사소설’이라는 장르를 새로운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해놓았다”(인아영)는 평가를 받은 장류진의 『일과 기쁨과 슬픔』(창비, 2019)이 있다. 장류진의 『일과 기쁨과 슬픔』은 소위 90년대생들의 실존형식을 중핵으로 삼는다. 그들은, 특히 그녀들은 하나같이 불안정하다. 그녀들은 백한번째 이력서를 내고서야 겨우, 비로소 첫 출근을 한다. 어렵게 얻은 직장이므로 안정감과 자부심을 느낄 만하건만 취업을 했다는 이유로 불안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그녀들이 어렵게 들어온 직장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너무 많은 까닭이다. 언제 대체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러므로 어떻게든 견디어야 한다는 결단은 그녀들의 일상적인 감각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회사 대표가 그를 거슬리게 했다는 이유로 월급을 포인트로 지불해도 견디고, 같이 입사했건만 연봉에서 남자 직원보다 앞자리 숫자 하나가 차이가 나도 견딘다. 인생의 장기적인 계획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이런 계획을 세워볼 뿐이다.

 

연봉도 많이 올랐다. 2,663만원. 그러면 이제 세후 월 201만원. 월세 50, 관리비 7, 공과금 10, 인터넷 1, 핸드폰 요금이랑 할부금 7, 남친은 없지만 혹시 모를 언젠가를 대비한 결혼자금용 적금 55, 그리고 이번에 취직 축하 겸 오랜만에 만난 학교 선배를 통해 가입한 환급형 보험과 실비보험이 12, 새 블라우스랑 구두, 치마, 바지 하나씩 해서 17, 마트에서 식재료랑 생활용품 이것저것 장 보면 7, 이렇게 쓰고 나면 남는 게 35, 앞으로는 교통비 포함 하루 만천원씩 쓰는 게 목표였다. (장류진의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의 일절)

 

장기계획이 불가능한 삶, 그런 까닭에 ‘소확행’을 강요당하는 삶, 상상하기 힘든 비인간적인 대우나 근거없는 차별을 받아도 오로지 견뎌야 하는 삶. 장류진의 소설은 우리 시대 젊은 그녀들의 삶을 이렇게 묘사해놓는다. 그래서인지 장류진의 소설을 읽으면서는 <미안해요, 리키>를 보면서 느끼는 그 불안감을 같이 느끼게 된다. 그녀들이 결심하고 다짐할 때마다, 그리고 사소한 것에서 희망을 징후를 볼 때마다 그녀들이 소모되고 소진되는 것 아닐까, 그래서 결국은 또 다른 그녀로 대체되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감. 이처럼 장류진의 『일과 기쁨과 슬픔』은 우리 시대의 노동자들은 그/그녀들이 비정규직이 아니라 정규직이어도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예외없이 프레카리아트로 살아가고 있음을 아프게 환기시킨다.


그런가 하면 권여선의 『아직 멀었다는 말』도 읽어볼 만하다. 『아직 멀었다는 말』의 해설을 맡은 평론가 백지은은 이 소설집의 중핵이 ‘생의 비극성에 대한 이해와 연민’이라고 개념화, 맥락화하고 있었다. 『아직 멀었다는 말』은 현존재들의 생의 비극성에 핍진해 들어가서 그토록 비극적인 삶을 반복하는 우리네 현대인들의 삶을 같이 아파하는 소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나는 『아직 멀었다는 말』에 집중적으로 그려낸 그녀/그들의 비극적인 삶에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그녀들처럼 “내가 어쨌다구? 내가 뭘, 뭘, 뭘? 뭘? 뭘? 뭘?”라고 절규하듯 읊조리는 상태로 빙의되고 말았다.


하지만 현존재들의 생의 비극성을 다룬 작품들은 많은 터이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현존형식인 만큼 현존재들의 생의 비극성을 다룬 작품은 넘치고 넘친다고 해야 하리라. 한데 나는 왜 유독 권여선의 소설에, 그리고 『아직 멀었다는 말』 속의 비극성에 속수무책으로 무장해제된 것일까. 나름 추론해 보자면 그것은 『아직 멀었다는 말』이 ‘현존재들의 생의 비극성’을 위치시키는 문제틀과 관련이 있고 동시에 그 문제틀을 뒷받침하는 역사지리지의 깊이에 기원한다. 『아직 멀었다는 말』에 등장하는 그녀/그들은 거의 대부분 우리 사회의 최점지점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극한상황에 가까운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생존하는 그/그녀들은 당연히 이 최저지점으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짜내며 최선을 다하지만 그 절망의 상태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의 생사를 건 쟁투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절망에서 벗어나는 일은 요원하다. 즉 ‘아직 멀었다.’

 

새해가 되면 소희는 스물두 살이 된다. 혹탑방 계약은 소회가 스물셋 스물다섯 스물일곱 도니느 6월마다 돌아온다. 이 년마다 보증금을 오백만원씩 올려도 대출금 갚는 건 두 배로 늦어지고 월세를 올려도 마찬가지다. 처음 계획대로 갚는다 해도 스물네 살 여름에나 다 갚을 수 있는데, 그 두 배가 걸리면 스물일곱, 스물여덟 살이나 되어야 한다. 그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이십만원으로 한 달을……치약도 휴지도 생리대도 아껴쓰고, 아침엔 우유와 시리얼, 밤엔 호빵이나 식빵, 계란 한 판 사서 한 달을 먹고, 일주일 한 번 제일 싼 찌개용 돼지고기를 사고, 늘 두부와 콩나물, 김치를 아껴 먹고 깍두기를 담가 먹으며, 친구도 못 만나고 친구도 못 만들고, 십원 백원 포인트를 쌓으며, 스물일곱, 스물여덟 살까지, 병원비 칠만원 가지고 이렇게, 아니 대여섯 번이면 삼십오만원에서 사십이만원……다신 안 온다. 다시는……
소희는 어느새 빌딩 쇼윈도 앞에 바짝 붙어서 있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이 닦인 유리 너머로 외제 자동차들이 손에 잡힐 듯 반짝거린다.
내가 어쨌다고? 내가 뭘, 뭘, 뭘? 뭘? 뭘? 뭘?
소희는 다친 개처럼 유리에 대고 짖었다. 뭘, 뭘, 뭘, 외칠 때마다 유리에 김이 서렸다. (……중략……) 손톱 없어도 된다. 엄마 없이도 살았고 언니 없이도 살았는데 그깟 손톱 없어도 된다. (『손톱』의 일절)

 

이렇게 먼 출구를 바라보는 것만 해도 힘겨운데, 경우에 따라서 이들은 또 하나의 ‘아직 먼’ 듯한 시간관이랄까 세계내적-위치 때문에 더욱 더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예정된, 예비된 비극에 이르려면 ‘아직 멀었다’는 감각. 하루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라는 불안감만 해도 어마무시한데 이 자리가 맨바닥이 아니고 한참은 더 날개도 없이 추락할 것이라는 공포는 이들의 삶이 가지는 비극성을 더욱 고조시킨다. 이중억압의 상황이다. 이렇게 힘겨울 때 누구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면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연대하여, 하위주체들에게만 무자비하게 어떤 관용도 없이 작동하는 상징질서에 맞서 잠시 숨돌릴 틈이라도 찾을 텐데, 그녀/그들에겐 그 누군가가 없다.

 

“투표권이 없는 사람들이라면……누구요?”
“많지요. 이를테면 방과후 코디라든가 배움터 지킴이, 초단기사서, 발명 실무사, 스포츠 강사, 그런 사람들까지 투표에 참여시키는 건 안 되는 거거든요.”
N은 이 새로은 가름선은 또 뭔가 싶었다. 그건 정규 비정규의 경계도 아니고 비정규 내에 추가로 설정된 라인이었다. 행정실 비정규직이나 이 개월 기간제인 자신에게는 투표권을 주고 그 사람들을 배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N은 알 수 없었다. 사안과의 밀접도를 보면 식당이 본관 1층으로 오든 새 건물에 있든 그 완공을 볼 수도 없을 자신이야말로 투표권이 없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N은 무엇 묻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너머』의 일절)


이 망할 놈의 ‘저비용 고효율’의 사회는 더 이상 떨어진 곳이 없는 하위주체들 사이에 계속 ‘새로운 가늠선’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법은, 법을 만드는 국가는 그 비인간적이며 반인간적인 ‘새로운 가늠선’들을 합법성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한다. 그러니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한 사업장 내의 단결과 연대도 불가능하다. 만인과 만인이 투쟁하고 경쟁하는 각자도생의 삶만이 가능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을 내리눌러야 하는 정신적 동물왕국의 상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아직 멀었다는 말』의 그녀/그들이 더욱 힘겨운 것은 그들이 이 이중억압 상황 속에서도 윤리적 존재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그/그녀들은 희망은 거의 없고 자칫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질 수도 있는 상태에서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N은 계약기간이 지나 자신이 학교를 그만둔 후의 상황을 상상해보았다. 그 선생님 좋았는데 왜 그만두셨어요, 라고 묻는 반장의 쨍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반장이나 다른 아이들이 그렇게 묻는다 해도 N은 그 사실을 알 수 없겠지만, 만약 그렇기만 하다면 학교를 그만 두어도 보람은 남을 것이다. 그런 목표로 남은 기간을 아이들과 즐겁게 보내자, 비록 비정규직 잡급직이어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나 있다는 걸 보여주자, 어머니도 당신 자식이 그런 작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뛰었다.(『너머』의 일절)

 

이제 어머니는 없다고 N은 생각했다. 오래전, 그게 언제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간에 어머니는 삶을 놓아 버렸고 그 자리에 가끔 응응대며 울고 가래 때문에 그르렁거리는, 한쪽은 나무토막처럼 굳고 다른 쪽은 가시처럼 마른, 움직이지도 못하고 갑작스러운 경련만 일으킬 따름인 기저귀를 찬 작고 마른 생물체만 남았다. 어쩌면 그 생물체는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일 수도 있었다. 활기도 자유도 없이 바짝 쪼그라든, 기한이 없는, 무기의 죽음을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N의 머릿속에 소름끼치도록 확연하게 떠올랐다. N은 특 뱉어내듯, 순식간이야, 하고 말했다. 그 말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튀어나온 말 같았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다만 그 말이 마음에 들어 견딜 수 없다는 듯, 모든 게 순식간이야, 순식간에 끝난다고, 순식간에. 하고 N은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가슴 한쪽에선 잔혹한 마음이 불처럼 일어나고 다른 한쪽에선 두려운 마음이 돌처럼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끝나……
모든 걸 쓸어버리는 폭풍의 시간이 지나간 후 N은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듯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늦가을 오후의 볕이 온실처럼 내리쪼이고 있었다.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N은 흐느끼면서 생각했다.(『너머』의 일절)

 

그녀/그들은 어떤 순간 ‘저비용 고효율’이라는 상징질서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신체가 되어, 그러니까 물신 혹은 자본주의-기계가 되어 괴물에 가까워지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인간이어야 한다는 결단으로 괴물이 되고자 하는 충동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다시 용기를 낸다. 하지만 이 용기와 결단이 그/그녀들의 삶을 희망적인 그것으로 만들 가능성은 높아 보이진 않는다. 상징질서의 벽이 완강하고 견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그녀들은 결국에는 패퇴하고 말 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그/그녀들의 인생은 더욱 비극적인 그것이 된다.


이렇듯 권여선의 『아직 멀었다는 말』은 현존재들의 생의 비극성에 주목하되, 그 생의 비극성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를 주도면밀하게 추적하여 맥락화하고 그것을 핍진하게 보여준다. 그 결과 『아직 멀었다는 말』을 총괄하는 ‘아직 멀었다’는 말은 세 가지 뉘앙스를 동시에 품는다. 고생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고, 모두가 여기가 제일 밑바닥이라고 믿고 싶어하지만 밑바닥에 다다르려면 아직 멀었고, 이 막막함 속에서도 인간적이기를 원하지만 자신이 목적하는 바 인간됨의 수준까지 올라서려면 아직 멀었다는 속뜻이 같이 담겨 있다. 어떤가. 이게 우리의 실존형식, 그리고 우리의 현실 아닌가. 고개를 약간만 돌려도 이렇게 힘겨운 비극적 상황, 인간됨을 유지하고자 하는 그 염원을 꿈꿀수록 더욱 비극적인 상황에 빠지는 존재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 시간이 흘러갈수록 어쩐 일인지 그런 존재들이 얼마나 빠르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는가.


<기생충>, 『일과 기쁨과 슬픔』, 『아직 멀었다는 말』이 그린 현존재들의 실존형식은 이처럼 암울하다. 위험하고, 불안하고, 위태롭고, 혐오심과 복수심에 가득 차 있고, 세상에 대한 원망과 인륜적 관계인 가족에게마저 원한을 품고 있는 정도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위태로운 정동들이 한층 더 증폭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소위 ‘알바노동자’라는 벌거벗은 생명을 핍진하게 그려낸 󰡔이것은 왜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박정훈)를 보면 현존재들의 실존 형식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 위태위태한 상황으로 내몰릴 것이라는 점을 예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 책에 따르면 현재 직업으로 인정되지도 보장되지도 않는 ‘알바노동자’가 대다수 하위주체들의 실존형식이 되리라고 진단한다. 우선 이 책에 따르면, 알바노동시장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너무 크고, 알바 노동시장의 노동자, 이 책의 표현의 따르자면 ‘직업없는 사람들의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다양하다. 『이것은 왜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는 알바노동시장이 거대해진 이유로 ‘대기업 프랜차이즈가 이들을 조직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말한다. 그 결과 알바노동은 ‘프랜차이즈 산업 성장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고 이들이 활동하는 공간을 ‘제1노동시장인 정규직, 제2노동시장인 비정규직과 구분해서 ‘제3노동시장’이라 이름붙’인다. 말하자면 정규직, 비정규직과 비견할 정도로 알바노동 시장이 커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알바노동자들의 고용 시간이 점점 더 초단기적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알바노동 시장이 이렇게 커진 이유는 간단할 것이다. 저비용 고효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윤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않는, 그것을 오히려 합리적 경영이라고 절대 신봉하는 이 신자유주의적 세상에서 일이 있을 때 사람을 고용해 쓰고 일이 없으면 곧 버리는 알바노동 시장은 얼마나 매혹적인 노동시장일 것인가. 그런데 여기에 알바노동자를 점점 더 초단기적으로 쓸 수 있는 기술적 보완이 이루어지니 바로 ‘플랫폼 노동 시스템’의 도입이다. 『이것은 왜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의 표현에 따르면 신자유주의적 합리성과 플랫폼 노동이 결합되면서 “지금까지 비정규직을 2년, 알바노동자를 3개월 내지 6개월 단위로 쓰고 버렸다면, 플랫폼 노동은 1초 단위로 쓰고 대기하게 한다‘고 말한다. 인공지능이 발달하게 되면 자연 실업자들은 많아질 것이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플랫폼 노동 시장으로 밀려들 것이며 이렇게 되면 거의 모든 노동자가 일회용으로 쓰이고 버려지는 노동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알바노동 시장은 폭발적으로 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플랫폼 노동자들은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법적으로 노동자로 보장받지 못한다. 당연히 플랫폼 알바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점점 더 열악해지고 있거니와, 이는 전태일 열사가 ‘우리가 기계가 아니다’라도 외쳤던 그 상황이 무색하다. 이처럼 서서히 향후 현존재들의 일반적인 실존 형식이 되어 가고 있는 알바노동자들은 노동의 과정과 노동의 결과로부터의 철저하게 소외되어 갈 뿐 아니라 법에 의해 그 어떠한 인격적 보호도 받지 못하는 호코사케르적 존재로 전락해가고 있다.


우리가 살펴본 몇몇 텍스트들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가 극도의 ‘위험사회’ ‘피로사회’ ‘불안사회’, 그리고 급기야 ‘재난적 상황’으로 치닫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눈을 들어 눈에 힘만 모으면 어디서든 볼 수 있다. 이런 데다가 『이것은 왜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에서 징후적으로 암시하고 있듯, 목하 ‘모든 고정된 것을 연기처럼 사라지’게 하는 4차 산업혁명은, 지금 역사가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게 된다면, 거의 대부분의 인간 존재들을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그러니까 쓸모없는 실존으로 격하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일찍이 지젝은 빌프레도 빠레또의 사회적 삶의 80 대 20의 법칙을 빌어, ‘우리 시대에 폭발적으로 치솟은 경제 생산성으로 인해 우리는 80 대 20 법칙의 극단적 실례와 마주하게 된다-다가오는 세계 경제는 단지 20%의 노동력이 필요로 되는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는 상태를 향해 갈 것이며 따라서 80%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그리하여 잠재적 실업상태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의 이노우에 도모히로는 범용 AI 도입이 본격화되는 2045년 쯤에는 ‘실속 있는 직업으로 먹고살 만큼 수입을 얻는 사람이 10퍼센트 정도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종합하자면 머지않아 인류는 탈노동사회로 접어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10%의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인간 존재들은 쓸모없는 실존으로 전락하거나, 바우만이 말한 새로운 가난병에 시달리며 쓸모없는 실존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문명이 향해 가고 있는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이 재난적 상황을 향해 치닫고 있는 역사적 필연성을 거슬러 행동하려는 인간 모두의 결단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젝의 말처럼 ‘80%의 사람들을 무의미하고 쓸모없게 만드는 체제는 그 자체가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것’이라는 명확한 인식 하에 체제를 부정하고 혁신하여 나머지 80%의 사람들도 인간답게 생존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자존적인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길을 찾아내는 일일 터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인간이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전락한다는 것은 그냥 물리적으로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살려다가 살려다가 추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서 <기생충>이나 『아직 멀었다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 살려다 살려다 추락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를 하는 것이기도 하며, 인륜을 저버리고픈 강렬한 충동과 유혹 앞에 서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에게 무엇보다 시급하고 절실한 일은 무엇보다 생의 비극성에 절망하는 하위주체들을 어떻게든 보호하는 일이다. 여기가 밑바닥이라고 믿고 겨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데 더 내려갈 밑바닥이 저 밑에 있고,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그곳에서 벗어나려면 아직 멀었고, 그런 절망감 때문에 괴물이 될 수 있겠다는 공포에 식은땀을 흘리는 그녀/그들이 더 이상 아직 멀었다는 절망감에 빠지지 않도록 그녀/그들을 응원하고 후원하는 일, 그리고 나라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그녀/그들을 보호할 제도적 법적 장치를 마련하라고 촉구하는 일. <기생충> 『아직 멀었다는 말』 등은 바로 이것이 우리 모두가 총력을 기울여야 할 바로 그 일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기생충> 등의 텍스트에 등장하는 그녀/그들과 같이 울고 웃다가, 웃다가 울고 보니, 아하,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왜 무엇보다 먼저 기본소득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3. 기본소득 혹은 우리 시대의 ‘적절 정치경제학’ – 기본소득의 잠재성

 

‘비존재보다는 재난이 낫다’고 말한 이는 알랭 바디우이다. 바디우의 이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마도 바디우 특유의 사건의 철학과 관련시켜 읽어야 할 터이고, 그와 관련하여 지젝은 바디우의 말을 이렇게 읽는다. ‘즉,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과 같은 공리적 쾌락주의의 무미건조한 생존 속에서 무기력하게 살기보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진리-사건을 향한 충실성에 몸을 던지는 것-비록 충실성이 파국으로 끝난다 할지라도-이 낫다는 것이다. 우리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하는 것은 정치를 모든 긍정적인 기획을 포기하면서 단지 최악을 선택을 피하고 차악을 선택하는 것으로 전락시키는 피해의식에 가득 찬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이다’라고. 이 말에 따르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긍정적인 기획을 발명하여 그것을 온몸으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비록 그것이 인간의 본성과 그것에 의해 움직여가는 역사적 필연성을 거스르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어떤 기획이 있어 우리를 비존재적 실존으로부터 탈-존시킴과 동시에 지금 이대로라면 필연적으로 조우할 수밖에 없는 재난적 상황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물을 필요도 없을지도 모른다. 위험을 감수하고 그것에 몸을 던져야 한다.


언제부턴가 재난의 현장이라면, 그 재난으로 인해 이겨낼 수 없는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나 누구보다도 먼저 임재하는 분 중에 정혜신 박사가 있다. 정혜신 박사의 책 중에 『당신이 옳다』(해냄, 2018)라는 책이 있다. 부제가 붙어 있다.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적정심리학? 그렇다. 적정심리학이다. 이 개념은 적정기술에서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나의 적정한 기술이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을 한 순간에 구원하는 기적으로 일으킨다는 것, 그러므로 전문적인 기술, 큰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고통에 눈길을 포개는 섬세한 뜨거움’이 담긴 기술이 필요하는 것. 정혜신의 그런 ‘적정심리학’을 꿈꾸었고 그런 심리학을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니 ‘누군가의 고통에 눈길을 포개는 섬세한 뜨거움’을 지닌 심리학을 실천하고 있었기에 ‘적정심리학’이라는 개념을 찾아냈다고 해야 하리라. 하여튼 정혜신 선생의 개념을 빌자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모든 분야에서 ‘누군가의 고통에 눈길을 포개는 섬세한 뜨거움’을 지닌 그것, 그러니까 적정 기술 혹은 적정 정책을 발명하는 것일 터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런 긍정적인 기획이 있다면?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달려가는 수밖에.


정치경제의 영역에도 그런 정책이 있다. 바로 기본소득이다. 나는 기본소득이 정혜신 박사가 말하는 ‘적절 정치경제 정책’에 가까운 긍정적인 기획이라고 믿는다. 여기서 또 한 번의 고백. 처음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에 가서 한편으로 놀라웠고 한편으로 의심스러웠던 것은 그 어떤 사회적 문제를 얘기해도 기본소득으로 결론이 난다는 것이었다. ‘기-승-전-기본소득’이라고나 할까. ‘기-승-전-기본소득’은 그래도 논리를 갖추거나 예의를 갖춘 경우에 해당했다. 많은 경우엔 ‘기-승-기본소득’이거나 ‘기-기본소득’이거나 하기도 했다. 마치 장터에서 뜨내기 약장수가 만병통치약을 파는 장면 같았다. 그 어떤 것에 완전 몰두해 있는 들린 존재에게서 느껴지는 엄숙함과 결연함이 ‘최후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비루하고 비겁한 나에 비하면 훨씬 더 의지적이다 싶긴 했으나 딱 그만큼의 의구심도 있었다. 그러나 눈을 들어 눈에 힘을 주고 세상을 보다 보니 그러한 논리적 귀결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예컨대 이런 대목. 불평등 경제 문제, 복지의 사각지대, 생태위기, 이성애적 질서와 퀴어적 실천, 젠더 문제, 장기불황 등등 우리 앞에 닥친 모든 문제들에 대한 대책, 해결책이 논의될 때마다 기본소득이란 개념이 등장하는 걸 보게 됐다. 흥미로웠다. 기본소득을 옹호하건 아니건 우리 시대의 재난적 상황 모두에 기본소득은 나름 개선 효과를 낼 수 있는 처방임을 감지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기본소득은 우리가 안고 있는 사회적 문제 모두를 온전하게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 혹은 최대한의 조건을 만들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정책이었던 것이다. 정혜신 박사의 표현을 빌자면 기본소득은 우리 시대의 유일한 ‘적정 정치 경제 정책’인 것이다.


아니면 기본소득은 인간 사회에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로서의 역능을 행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책이기도 하다. 기본소득이 추구하는 정책은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하고 분명하다. 기본소득은 ‘자산조사나 근로 요구 없이 모든 개인에게 무조건적으로 지급되는 주기적 현금급여’이며, 크게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 정기성, 현금 지급, ‘중앙정부, 지방정부, 혹은 초국적 정치단위에서 제공되는 것’, 그리고 충분성 등 일곱 개의 속성을 지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만 지키면 된다. 그 외의 것은 따지지 않는다. 전체 기관과는 상관 없이 이러한 신체적 기능만 행사하면 된다. 물론 이러한 원칙이 형성된 역사와 기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사적 맥락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동기 역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이 속성이 지키며 모두의 몫을 모두에게 배분 혹은 분배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전체와 동떨어진 부분에의 지향, 역사와도, 총체성과도 단절된 자족적 정책은 흔히 현실가능성 혹은 전체와의 조화를 따지면서 발생하기 마련인 현실적 타협과 정책적 후퇴의 길을 차단한다. 해서 현실적 조건 운운 하며 차악을 최선으로 전도시키는 거의 대부분의 정책이 걷는 불합리성과 부조리함과도 분명한 차별성을 지닌다.


게다가 기본소득이 구현해야 할 일곱 가지 속성이 가지는 혁신성과 보편적 가치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이 일곱 가지의 형식적 조건은 이제까지 발명된 그 어떤 정책보다도 파괴적이며 혁신적이다. 이 일곱 가지에는 인간 사회가 정치적 민주화는 물론 경제적 민주화로 나아갈 수 있는 진정한 출발점이 잉태되어 있기도 하고, 또한 각 개인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러니까 게으를 수 있는 자유마저 보장하는 철학적 기반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이렇게 기본소득은 복지 정책의 한 대안의 형식을 띠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사회 전체를 혁신시키고 진화시킬 수 있는, 하여 인간 사회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점으로 이끌만 한 힘을 내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전의 복지 정책이 지니는 한계를 부분부분 수정한 듯 보이지만 그것이 모아졌을 때, 세상 전체를 파국에서 이상적인 사회로 되돌릴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게 되었다고나 할까.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 현재의 질서에 한계를 느낀 수많은 존재들이 새로운 사회적 질서를 꿈꿀 때 맨 먼저 기본소득이 눈에 띄는 것도, 그리고 그들이 세상에 출사표를 던질 때 그 매개물로 기본소득을 앞세우는 것도 말이다. 그만큼 기본소득은 원포인트적인 정책인 듯하나 혁명적이고, 부분적인 듯하나 세상 전체를 바꿀 힘을 가지고 있다. 현재적 상황에서 보자면 기존의 질서를 부정하고 해체하는 강력한 잠재성을 지닌 바로 그 정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이 현실의 정치경제 정책으로 도입될 경우 그 본래적 취지- 실질적인 자유의 보장과 실질적인 경제적 민주화-가 왜곡되고 훼손될 가능성도 크다는 것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 역시 기본소득이 ‘기관 없는 신체’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과 관련이 깊다. 모든 통치기술은 유기적 조화를 꿈꾸고 영토 안에서의 위계질서가 분명한 구획을 시도한다. 그래야 전체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닫힌 세상을 열고자 하는 존재들은 언제나 기존 세상을 탈영토화시키려 하고, 그것을 탈영토화하려는데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그를 통해 기존의 세상이 탈영토화되고 힘을 잃은 이후, 새로운 사회 모델을 위한 재구성에 들어갈 때 그들은 또 다른 영토화 그러니까 재영토화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니까 탈영토화의 욕망이 강할 때 그들은 기본소득과 같은 원포인트 정책에 강력한 원조자이지만, 새로운 통치성을 구획할 땐 기본소득과 같은 영원히 탈영토적 정책과 대립할 개연성이 높아진다. 그러므로 만약 현실 정치 쪽에서 기본소득을 도입하려 할 경우, 그러니까 기본소득을 그들의 전체 기획 안에 한 정책으로 포섭하고자 할 경우, 그때 필연적으로 ‘기관에 의한 신체의 통제’를 시도하거나 일정 정도의 타협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그때마다 기본소득 주의자들은 기본소득을 방패로 차악을 선택하려는 자들과 끊임없는 쟁투를 벌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기본소득 정신 그것이 근본적으로 훼손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우리가 생존을 위해 지불해야 될 대가가 우리의 삶이 될 것이므로’.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민주화를 가능케 할 기본소득 세상을 꿈꾼다는 것은 현실 정치와의 끊임없는 싸움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아마도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민주화가 동시에 구현되는 세상은 인간 모두가 실질적 자유를 원할 바로 그 시점 쯤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므로. 그렇다면 우리는 그 순간을 위하여, 매번 시도하고 매번 실패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듭 멋지게 실패하면서 인류 전체가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을 향해 간다는 것, 그것 역시 멋진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 아닐까. 모두의 몫을 모두에게 주어야 한다고 계속 외치면 어느 순간 우리를 이 재난으로부터 구원할 기본소득 세상이 성큼 다가올 것이라고.

 

4. 팬데믹 세상과 기본소득이라는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하수상한 시절이다. 코로나19로 그야말로 전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역사적 연속성이 갑작스레 중단되는 예외상태적 상황이기도 하고 재난적 상황이기도 하다. 연이은 초유의 사태, 미증유의 사태로 세계 전체가 공포에 휩싸여 있으며 그로 인한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의 그림자도 점점 짙어지고 있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불안과 공포의 대부분은 미지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보다 근원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차마 인정하지 않았던 것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불안과 공포도 있다. 우리는 코로나19 때문에 갑작스레 재난적 상황이 도래했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한다. 앞서 <기생충> 『아직 멀었다는 말』 『이것은 왜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에서 살펴보았듯 우리 사회는 이미 거의 대부분의 생명체가 자존은 물론 생존도 힘겨운 이미-재난의 상황이었고, 만약 이 표현이 너무 과하다면 적어도 우리 사회의 상당수는 이미-재난의 삶을 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코로나19로 갑작스레 재난적 상황에 빠진 것이 아니라 코로나19로 이미-재난적 상황의 실재 혹은 실체가 드러났다고 해야 한다. 즉 코로나19로 일상적인 질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역사적 연속성이 갑작스레 파쇄되자 그것들에 가려 보이지 않던 우리의 노골적이고 치명적인 맨모습이 드러났을 뿐인 것이다.


흔히 하나의 상징질서가 흔들려 무시무시하고 외설적인 실재들을 목도하고 나면 우리는 더 이상 이전의 상징질서로 복귀할 것이라고 상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정이 꼭 그렇지는 않다. 하나의 사건은 한 사회를 격동시키지만 그 사건이 한 시대를 단절하는 그것으로 작동하려면 상당수의 사회구성원들이 그 사건에 깃든 사건성을 충분히 내면화하고 더 나아가 그 의미망이 제도로 구현되어야 한다. 역사의 복원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막강하다. 도대체가 결정적인 균열처럼 보일 때도 대부분 원상복구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우리 역사 속에서도 그런 경우를 여러차례 경험한 바 있다. 광주를 보고 그리고 그 광주를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왜곡하는 상징권력의 악마의 얼굴을 보고서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날 때까지 그 악마적 권력이 다스리는 질서는 지속되었다. 또한 세월호 사건을 통해 인간의 생명을 단순 도구로 전락시키는 신자유주의라는 전체주의적 괴물을 보고도 우리는 세월호 이전의 신자유주의적 통치 질서로 돌아가고 말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혼란스럽다고 이전 질서로 빨리 회귀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 만들어낸 커다란 균열을 집요하게 들여다보고 그곳에서 발견한 실재적 진실을 자기화하고 제도화하여 이전과는 다른 상징질서를 발명하는 일이다. 우리는 코로나19를 계기로 <기생충> 『아직 멀었다는 말』 『이것은 왜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 등이 짚어낸 증상이 우리의 실재적 진실임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코로나 사태의 수습이 아니다. 우리는 이 재난적 상황을 과장하여 이미-재난적이었던 그때로 그대로 복귀해서는 안된다. 수습해서는 안되고 수정해야 하고 수술해서 보다 건전하고 바람직한 상징질서로 발돋움해야 한다. 이 재난적 상황을 수습하는데 동원된 수많은 정책 중 과연 어떤 대책이 가장 유효했는지 찾아내고 그것을 이미-재난적인 상징질서를 치유하는 대안으로 획정하는 것에 혼신을 힘을 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사건에 의해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현재적 의미로 충만한 진리는 곧 역사의 연속성 속에 묻혀버리는 까닭이다.


최근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은 코로나19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코로나바이러스와 관련된 인류의 미래가 어떠할는지에 관해서는 석학들도 말을 더듬거리고 있지만, 강대국 중심의 세계 무역 질서와 국제 분업의 구조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한국의 앞날에는 지금까지 겪어낸 것보다 훨씬 더 큰 장애와 시련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경제를 기어코 살려내려는 노력은 소중하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에는 좀 더 가난하고 불편한 미래를 받아들이고 정부와 국민이 거기에 대비해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국가 경제의 위축이나 노동 현장에서의 위험, 물가와 공공요금의 인상,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가 소득 서열의 하위층을 강타해서 삶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사태는 경험적으로 증명되어 있다. 고통 분담은 아름답고 고귀한 이상이지만, 한국 사회는 계층 간에 고통을 분담함으로써 사회경제적 난국을 극복한 역사적 경험이 전혀 없거나 매우 빈약하다. 1997년의 외환 위기 때도 국가 재정을 투입해서 거대 기업, 거대 금융 자본을 살리고 중소기업과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그때 사회안전망을 크게 확장했지만, 자식들은 날마다 학교에 가야 하고 밥은 매일 먹어야 하는 것이므로 밥벌이의 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의 어려움을 국가의 공적 부조로 해결할 수는 없었고, 결국 고통은 아래쪽으로 전담되었다. 그것이 토털 개념으로서의 위기를 신속히 벗어나는 방식이기는 했지만, 빈부 양극화와 세습 빈곤은 토착되었다.
좀 더 가난한 미래를 받아들인다고 할 때, 거기에 따르는 고통과 희생의 총량을 사회 계층 간에 배분하는 문제 안에는 커다란 갈등과 분열의 마그마가 잠복해 있고, 여기에 대처하는 방식에 따라 코로나 이후의 한국 사회의 모습은 결정될 것이다. 강자의 자선심에 호소하는 것은 언 발에 오줌 누는 정도의 효과가 있고 각자 용이 되어서 개천을 탈출하라는 방식은 아무 효과 없다. 힘이 다해서 쓰러진 사람들에게 힘내라고 소리 질러도 힘이 없어서 일어서지 못한다. (김훈, 『무서운 역병의 계절을 나며 희망의 싹을 보았다』)

 

흔히 코로나19가 끝나면 코로나19가 가져온 혼란과 그 혼란 속에서 발견한 깨달음은 곧 망각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고, 코로나19로 인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뉴노말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고백하면 나는 앞의 예측을 믿는 편이다. 물론 삶의 새로운 풍경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새로운 풍경이 지배적일 것이고, 그것이 새로운 일상을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몇몇 생활상의 사소한 변화일 것이며, 인간의 본성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역사적 필연성의 흐름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니 오히려 김훈 선생이 전례의 예에서 암시한 대로 더욱더 재난적 상황이 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렇지 않은가. 코로나19로 이미-재난적 상황이 드러났는데, 그것들을 수술할 계획은 없고 오로지 어떻게든 이전으로 돌아가려고만 하지 않는가. 그뿐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이미-재난적 상황이 돌아가야 할 이상적인 그곳으로 떠받들어지는가 하면, 방역의 성공을 내세워 우리 사회를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그곳으로 읽어내기에 바쁜 것도 사실이다. 이런 마당에 코로나19를 통해 우리 사회가 이제까지의 방향을 거스르고 또 다른 사회로 도약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는 것은 그야말로 몽상이라 할밖에 없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우리는 가야 할 길, 그러니까 또 다시 실패할 길을 나서야 한다. 앞서 김훈 선생이 말하고 있는 그 길, ‘좀 더 가난한 미래를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고통과 희생의 총량을 사회 계층 간에 (혁신적으로, 혹은 기본소득의 방식으로- 나는 이 사이에 이 말을 넣고 싶다) 배분하는 문제’를 해결하러 말이다. 일찍이 지젝은 어느 책에선가 68년의 구호를 다시 끌어다 쓴 적이 있다. ‘현실주의자가 되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것이 아닐까. 오늘날의 역사적 필연성을 거스를 수 있는 유일한, 그러나 현재의 사회질서로는 실현 불가능한 그것, 기본소득이라는 진리내용에 몸을 던지는 것. 바로 저기 기본소득이 오고 있다고 외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