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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법과 공정

봉건적 주종관계의 귀환과 성폭력 사건의 반복에 관하여 / 정용택

 

정용택(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Ⅰ. 2019년 7월 16일부터 시행된 개정 「근로기준법」 제76조의2(직장 내 괴롭힘의 금지)에서는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규정하고 있다.[각주:1] 요컨대, “통상 소속 근로자를 사용자나 다른 근로자가 업무와 관련해 신체적‧정신적 침해를 주는 모든 언행”이 바로 직장 내 괴롭힘인 것이다.[각주:2] 한편,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약칭 ‘남녀고용평등법’) 제2조에서는 “사업주·상급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 내의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와 관련하여 다른 근로자에게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또는 그 밖의 요구 등에 따르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근로조건 및 고용에서 불이익을 주는 것”을 ‘직장 내 성희롱’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직장 내 괴롭힘과 직장 내 성희롱은 어떤 유사성과 차이점을 갖고 있을까? 

 

우선 직장 내 괴롭힘은 영어로 harassment at work의 번역어인데, 이것은 sexual harassment의 번역어인 성희롱의 ‘harassment’와 동일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sexual harassment을 성희롱으로 번역하면서 성폭력과 구분하여 그저 악의 없이 이루어지는 가벼운 성적 언동의 범주로 간주하거나 특정 성(性)의 과도한(?) 성인지감수성으로 인해 빚어지는 갈등의 소산 정도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지만,[각주:3] 개념상으로 성희롱은 ‘성적 괴롭힘’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놓쳐선 안 된다.[각주:4] 또한 그렇기 때문에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차별금지법의 예시 법안인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조에서도 성희롱 행위를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의 일종으로서 “업무, 고용, 그 밖의 관계에서 공공기관의 종사자,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그 직위를 이용하여 또는 업무 등과 관련하여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또는 그 밖의 요구 등에 따르지 아니한다는 이유로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도 성희롱은 성적 괴롭힘, 특히 ‘차별적 괴롭힘’으로서 직장 내 괴롭힘에 포함될 뿐만 아니라 포괄적인 차별행위의 일환으로 나타난다.[각주:5] 마지막으로 1998년 대법원 판례에서 이미 성희롱을 ‘성적 괴롭힘’으로 이해하면서 그것을 “성적 행위 즉 불쾌한 성적 접근에 응하기를 요구하는 행위, 기타 성적인 성격을 가지는 일체의 언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한 바 있다.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성희롱을 “인격권을 침해하는 일반 불법행위의 한 유형으로 민법 제750조와 제751조에 의한 손해배상을 인정”했던 것이다.[각주:6]

 

이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직장 내 괴롭힘의 경우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성’과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섰다는 점만 입증하면 법률상으로 불법행위의 성립요건을 충족시키지만, 직장 내 성희롱의 경우 직장 내 업무와의 관련성뿐만 아니라 ‘성적 언동’까지 입증해야 산업재해로서 인정받고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따른 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각주:7] 이는 아직까지도 대부분 법원의 판단이 직무 범위를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직무 범위라는 것을 “업무 자체 또는 이에 필요한 행위로 일반적으로 보이는 행위”로 협소하게 해석하면서 직장 내 지위를 이용하되 직무 범위 내에 속하진 않는 성희롱도 발생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그러한 성희롱 행위는 직무 범위 바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용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보고, 산업재해의 범주에서도 결국 배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건의 발생 자체가 이미 업무 관계로 인해 맺어진 것으로 직장을 매개로 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직장 내 성희롱은 명백히 업무 중 사유에 의한 사고, 즉 사용자 책임 하의 산업재해로 간주되어야 한다.[각주:8] 직장 내 성희롱이 그러하다면 더 넓은 범주의 직장 내 괴롭힘 역시 산업재해의 측면에서 접근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Ⅱ. 그 두 개의 법률적 개념을 염두에 두고 최근에 우리 사회가 마주한 어떤 사건에 대해 생각해보자. 지난 7월 12일,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전했다.

 

서울시청서 근무하던 전직 비서 A씨가 상사 박모씨(64)를 성추행 혐의로 8일 밤 고소했다. A씨는 “2017년 이후 성추행이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박씨가 A씨에게 신체 접촉을 했을 뿐 아니라, 메신저 ‘텔레그램’을 통해 개인적인 사진도 수차례 전송했단 것. 그는 경찰에 “더 많은 피해자가 있지만, 박씨가 두려워 아무도 신고를 못했다”며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피해를 입은지 3년이 지난 뒤에야, 힘겹게 용기를 낸 셈이었다. 그러나 상사 박씨는 10일 오전 12시1분쯤 서울 성북구 소재 삼청각 인근 산 속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박씨는 전날인 9일 서울시청에 출근하지 않았고, 그의 딸이 이날 오후 5시17분쯤 실종 신고를 했다. A씨는 끝내 박씨에게 죄(罪)를 물을 수 없었다. 피의자가 사망해, 수사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됐기 때문이다. [각주:9]

 

위의 기사에서 말하고 있는 박모씨가 누구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기사는 “피의자에 대한 ‘서사’[를-인용자] 배제”하고 작성하여, 다시 말해 “‘서울시장’이란 부분을 철저히 배제한 채 기술”함으로써 오히려 기존의 직장 내 성추행 사건들과 달리 이 사건에 대한 해석에서는 유독 “피의자-피해자 간에 있었던 일이 아닌, 그 외 부분이 상당히 많이 개입”되고 있음을 비판적으로 역설하고자 했다. 경찰 수사가 아직 진행 중이고, 국가인권위원회의 직권조사 역시 이루어질 예정이므로, 이들 기관을 통해 공식적인 수사 및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사망한 피의자에 대해서도 무죄추정의 원칙을 예외 없이 적용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해서 여전히 가해자를 지지하는 많은 이들이 성희롱 및 성추행 혐의에 대해서는 아직도 인정할 수 없다면서 피해자를 향해 보다 실체적인 증거들을 공개하라 요구하고 있는 것을 마냥 긍정해줄 수도 없다.

 

피의자 지지자들 가운데 일부, 특히 그를 정치적으로 지지했던 이른바 ‘진보진영’에 속한 많은 지식인들이 성희롱 및 성추행을 입증할 자세한 증거를 고발과정에서 제출했다고 하니 사건의 진실에 관해서는 좀 더 기다려봐야 한다는 신중한 입장을 피력하기도 한다.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주장하면서, 그들이 결국 그때까지 이 사건에 대해 아무 것도 사유하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문제다. 이미 피의자가 사망했기 때문에 공소권도 소멸되었고, 서울시청 압수수색 영장도 기각되었고, 피의자의 통신기록 영장 청구도 기각되었으며, 휴대전화 포렌식도 중지되어 경찰 수사가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실체적 진실이 완전히 규명될 때까지는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말자는 주장은 사실상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해 영원히 사유 불가능하다고 시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각주:10] 두 차례의 피해자측 기자회견에서 증거로서 폭로된 내용들과 무단으로 유출되어 인터넷에서 돌고 있는 (고소 전 작성한) 피해자의 1차 진술서, 그리고 최근에 한 언론을 통해 공개된 비서 업무 인수인계서[각주:11] 등의 자료들, 그리고 그에 부합하는 서울시청 근무자들의 발언을 전하고 있는 몇 몇 기사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해 반드시 사유해야 할 이유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 국가기관의 수사와 조사를 통해 좀 더 명확한 진상이 규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더라도,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들에 근거했을 때 이 사건을 더 이상 사유 불가능의 영역에 방치할 수 없음이 명확해졌다는 것이다.

 

적어도 “힘들 때 달래주기는 여성 직원 몫이었다”라고 말한 서울시장실 근무 경력 남성 공무원의 인터뷰[각주:12], “해당 비서들이 어떤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시청이나 산하기관 소속 공무원 중에서 시 인사과가 추천하는 방식으로 뽑아왔”던 기존의 절차를 무시하고 내부 차출 방식을 관행으로 삼아서 여성 비서를 “채용할 때 솔직히 외모도 보고 성격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했다는 서울시 관계자의 설명, 그에 덧붙여 “시장실에 갔을 때 젊은 여직원들이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을 보고 좀 마음에 걸렸다”면서 “서울시 비서실에서 젊은 여성을 손님을 환대하는 ‘꽃’으로 본다는 것이, 성인지 능력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았다”고 하는 서울시 내부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전하고 있는 기사[각주:13]까지, 이 모든 자료들을 그동안 피해자측에서 제시한 여러 증거 자료들과 종합적으로 비교‧검토했을 때, 해당 사건이 포괄적 의미에서의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고 본다.

 

예컨대, “시장이 피로해할 때는 그를 달래고 응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 “일정 관리 등 통상적 비서 업무 외에도 ‘성 역할’에 기반한 감정노동과 돌봄을 요구”당했던 것, “시장의 휴식 시간마다 과일을 깎아 제공하는 등 공식 업무 외에 챙겨야 하는 일”을 했던 것, “마치 심통이 난 아이를 타이르는 부모처럼 격려와 응원을 해야 했”던 것, 피의자가 “체력적, 정신적으로 힘들 때 짜증이나 투정이 섞인 의사표현을 하곤 했는데 사적인 관계에서나 할 만한 행동”을 받아줘야 했던 것, “가족이나 의료진이 하는 것이 맞다”고 의견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 저녁으로 혈압체크”가 여성 비서의 업무로 부여되었던 것, “마라톤을 하는데 여성 비서가 오면 기록이 더 잘 나온다면서 주말 새벽에 나오도록 요구”당했던 것, “운동 등을 마치고 온 후 시장실에서 그대로 들어가 샤워할 때 옷장에 있는 속옷을 비서가 근처에 가져다 줘야 했”던 것, “업무시간 외(늦은 밤) 텔레그램 메시지”를 받았고, 심지어 “비서직을 그만둔 뒤 심야 비밀대화에 초대”받았던 것 등등.[각주:14] 피해자가 고소장과 기자회견을 통해서 자신이 피의자로부터 당한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의 주된 내용으로 주장했던 “업무시간에 집무실에서 일어나는 성추행 및 성희롱적 몸짓”과 “텔레그램 메시지를 통하여 음담패설과 본인의 속옷차림 셀카를 보내는 것”을 일단 제외하고, 방금 열거한 비서 역할들만을 놓고 보더라도 언론과 SNS에 등장하고 있는 ‘수발’, ‘기쁨조’, ‘심기 보좌’, ‘궁녀’ 같은 원색적인 표현들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라고 판단된다.[각주:15]

 

실제로 성희롱 및 성추행 혐의에 대해서는 신고인측이 (자신들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명백한 증거를 (역시 자신들에게)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희롱 및 성추행 사건 자체가 발생했는지 여부를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일부 극단적인 피의자 지지자들조차도 피해자의 고소장이나 인수인계서에서 드러난 비서 업무의 구체적인 내용들에 대해서만큼은 그 진위를 의심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그런 업무를 여성 비서가 수행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그들의 전반적인 인식이다. 그들은 비서 업무를 수행하다보면 당연히 이런 역할들도 요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렇기에 전적으로 “시장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으로 구성됐”던 비서 업무가 그 성격상 이미 “성차별이며 성폭력 발생과 성역할 수행에 대한 조장과 방조, 묵인이자 요구에 해당한다”는 점을 정직하게 인식하는 것은 고사하고,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업무수행을 빙자하여 강제된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는 사실마저도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고 있다. [각주:16] 그러나 더욱 결정적인 문제는 이렇게 관련 법안을 조금만 들여다봐도 피해자가 놓여 있었던 노동환경의 문제점을 지배와 억압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정치의 수준에서 진지하게 사유할 수 있을 텐데, 피의자와 그가 속한 진영에 대한 맹목적 지지가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Ⅲ.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영에 따르면, 지배(domination)란 사람들이 어떤 행위를 할지 결정할 때 또는 행위의 가능성 및 불가능성의 조건들을 결정할 때 행위주체로서 자유롭게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는 구조적 현상을 지시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도록 막는 제도적 조건 하에 놓여 있을 때 그 사람은 외부로부터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억압(oppression)은 물질적 박탈이나 차별적인 분배를 포함하여 사람들이 가치 있는 모든 기능을 확보할 수 있는 자유, 즉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나 획득된 자원을 자유로 전환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을 가로막는 제도화된 사회과정을 표상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뜻하는 역량(capability)으로서의 실질적 자유 그 자체의 불평등을 경험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무언가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지배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지 결정하는 데 참여하며, 또 자신이 행동하게 될 조건들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는 것”을 방해하는 제도적인 제약이라면, 억압은 “자신의 역량을 계발하고 행사하며, 자신의 체험을 표현하는 것”을 저지하는 제도적인 제약이라 할 수 있다.[각주:17]

 

정치는 바로 이와 같은 지배와 억압의 사회과정 및 구조적 체계에 대응하여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실현되기 위한 제도적 조건들을 구성해나가는 인민 대중들의 집단적 실천 및 행위를 일컫는다. 한나 아렌트가 정치를 서로 간에 평등한 관계를 갖는 자유로운 인간들 사이에 성립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배와 억압의 현재 상태를 지양(止揚)하는 현실의 운동, 곧 ‘자유와 평등의 동일성’이라는 명제에 기초해 지배 없는 자유와 억압 없는 평등의 상태를 동시에 지향하는 실천의 보장이 정치를 성립시키는 필수요건이라는 것이다.[각주:18] 그러한 의미의 정치가 활성화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법에 모든 사람이 구속되는 것”, 즉 “법치의 체계”의 확립이 전제조건으로서 요구된다.[각주:19] 너무나도 상식적인 말이지만,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원리가 보편적으로 관철될 때 법치(法治)는 구현된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듯이, 이러한 법치에 근거한 정치적 사유가 진영논리 앞에서 무력화되고 있다. 피의자로 고발된 이가 자신들이 지지하던 인권변호사 출신에 시민운동가이며 3선 서울시장이자 대권주자라는 이유로 피해자의 고발에 대해 통치자의 비서 업무를 하다 보면 으레 겪을 수 있는 일을 가지고 “100조원이 있어도 복원할 수 없”는 사람을 억울한 죽음으로 몰아붙였다는 식의 2차가해가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영논리적 비(非)사유가 마침내 반(反)정치적 이데올로기로 귀결된 이런 주장을 접할 때 우리가 지금 자유와 평등의 정치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적 법치국가가 아니라 권력자에게는 법이 예외가 되고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는 봉건적 주종관계와 동일시되고 있는 전(前)근대적 인치(人治)국가를 살고 있는 것인가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공공부문에 종사하는 한 여성 비서노동자가 4년에 걸쳐 업무와 전혀 무관한 성적 괴롭힘(성희롱)을 포함하여 업무로부터 이어지되 적정범위를 넘어선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해 신체적‧정신적 고통뿐만 아니라 인격권까지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는 사건을 두고서 노동자의 안전과 존엄성을 위협하는, 특히 젠더 차원에서 여성노동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현행 노동체제의 보편적 위기구조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즉 이 사건을 “사회구조가 지니는 모순의 표출이나 징후(symptom)”[각주:20]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 권력자의 정치생명과 그와 연관된 정치진영의 성패를 둘러싼 정치공학적 계산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 그들은 민주주의를 법치(法治)에서 인치(人治)로 환원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경영자나 관리자가 주도하는 조직 내 의사결정 과정 및 자원분배 과정에 자유롭고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자율성과 역량을 갖춘 전문직으로서 비서 노동자를 바라보지 않고 단지 “인사권자의 ‘기분’이 업무의 핵심”이기 때문에 “노동자로서 내가 할 이유가 없으며 해서도 안 되는 일들”마저도 기꺼이 할 수 있고 마땅히 해야 하는 것으로 비서 노동에 대한 이해를 그들이 공유하고 있음이 드러날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각주:21] 그들은 비서 노동자의 모든 업무를 법률로 규정된 노동에서 권력에 의해 자의적으로 재규정된 공/사 경계 없는 ‘기능수행’(functioning)으로 변환하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프랑스의 법학자 알랭 쉬피오의 가설과 정확히 일치한다.

 

Ⅳ. 쉬피오가 주장하는 바, 현대 국가는 ‘법에 의한 통치’(government by laws), 즉 법치(法治)의 이상을 ‘숫자에 의한 협치’(governance by numbers), 곧 ‘수치’(數治)의 이상이 대체하는 과정 중에 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애초부터 인격과 결부된 자의적 권력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원천에서 비롯되는 규칙으로 지배되는 사회라는 이상을 법치와 공유한다는 점에서 “수치는 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효용 계산에 따라 법이 결정되게끔 한다. 그래서 인간 사회의 작동을 주재한다고 간주되는 ‘경제적 조화’를 위해 법이 복무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격적 지배의 흔적을 말끔히 제거한 숫자에 의한 협치는 “사회의 프로그래밍을 다수의 의사, 즉 민주주의에서 벗어나게 만들”면서 “법률이 주권성을 상실하고 프로그램의 실현을 위한 도구가 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수치의 이상을 오늘날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한 것이 바로 기업의 경영 원리인 ‘협치’ 또는 ‘거버넌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협치 개념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또는 신공공관리론(New Public Management: NPM)의 성행과 더불어 국가 및 공공부문을 위시하여 사회의 전역에서 기존의 법치나 통치를 대체하는 새로운 지배구조로 자리를 잡았다.[각주:22]

 

쉬피오에 따르면, 계산에 의해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꿈꾸며 비인격적 권력을 추구하는 가운데 마침내 법에 의한 통치를 숫자에 의한 협치가 대체하는 데 성공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숫자에 의한 협치는 권력자의 자의적인 지배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는 비인격적 통치의 이상을 실현하기보다, 오히려 인격적 예속관계 또는 봉건적 주종관계의 재등장을 추동하고 있다. 쉬피오는 어떻게 숫자에 의한 협치가 역설적으로 직접적인 인격적 지배관계의 귀환을 유도하는지 설명한다. 말하자면, 수치의 세계에서는 만인을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율칙에 구속시켰던 초월적인 심급=제3자의 심급으로서의 법의 상징적 권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기에 약자들의 권리도 보장할 수 없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홉스적’ 세계, 곧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세계, 사회적 관계들의 적대가 연대의 메커니즘 안에서 조절되지 않은 채 날 것 그대로 분출되는 세계, 모든 갈등이 개인화되면서 각자도생(各自圖生)과 승자독식(勝者獨食)이 객관적 법칙이 된 ‘사회의 죽음’ 이후의 세계가 펼쳐지면서 사람들은 이제 다시 인격적 의존관계의 그물망 속으로 편입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대선후보 경선 당시 “협치의 비전 제시한 내가 제일 구체적”이라고 자부했던 전(前)충남도지사와 “협치는 시대의 정신이자 민선7기 시정운영의 핵심”이라고 선언했던 전(前)부산시장과 “정책 실패는 용서해도 협치 실패는 용서할 수 없어”라고 일갈했던 전(前)서울시장을 하나로 묶어주는 키워드도 바로 ‘협치’였다. 그렇게 한 목소리로 외쳤던 협치의 세계 한 가운데서 그들은 모두 절대군주와도 같은 봉건적 주종관계를 구축하고 휘하에 두었던 여성 직원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각주:23] 과연 이런 사건들의 반복이 우연일까? 유사한 사건들이 반복되고 있다면 사실상 구조적으로 필연적인 원인이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알랭 바디우는 사건을 현대철학의 중심적 문제로 제기해온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그는 구조에는 필연적으로 초과적인 그 무엇인가, 즉 존재 질서 자체의 비일관적 다수성을 나타내는,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 역사적 상황 안에서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공백(le vide)이 있으며, 사건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상황 안에서 공백의 ‘우연적인 돌발’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바디우의 철학 체계에선 사건의 발생의 시차적 효과(parallax-effect)로 인해 사건을 사건이 일어나기 전(前)의 시간과 사건이 일어난 후(後)의 시간의 관점에서 모두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상존한다.[각주:24] 한편으로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시간의 렌즈로 보면, 사건의 발생은 우연적이며 어떠한 법칙성도 따르지 않는 새로운 상황의 도래로 해석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건이 일어난 후의 시간의 렌즈로 보면 구조는 이미 사건이 출현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그 내부에 공백으로서 지니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2년 사이 광역지방자치단체장 세 명이 성폭력 의혹에 휩싸여 낙마했”고, 그들은 “모두 민주당 소속 남성 정치인”이었으며, “피해자 역시 모두 함께 일하던 부하 직원”이었던 일련의 반복적인 사건들[각주:25]은 현대 자본주의적 노동사회가 겪고 있는 수많은 중병의 현재진행형 증상의 하나, 특히 숫자에 의한 협치가 법에 의한 통치를 대체한 역설적 결과물로서 고용관계가 인격적 예속관계 또는 봉건적 주종관계로 변모하고 있는 징후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진정으로 비인간적인 노동체제의 모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며 온몸으로 그것에 저항하고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여성들이다. 그러므로 사건을 사유하고, 구조를 분석하는 신학적 작업의 정당성도 궁극적으로 이 여성들의 절규에 신학이 어떤 태도로 응답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1. 직장 내 괴롭힘 규율의 입법과정 및 입법내용에 대해서는 고용노동부, 『직장 내 괴롭힘 판단 및 예방·대응 매뉴얼』, 2019, 2-4 참조. [본문으로]
  2. 김근주,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의 현황과 과제」, 『노동리뷰』 통권 176호, 한국노동연구원, 2019, 51. [본문으로]
  3. 이원희‧이소라‧변섭, 「성적괴롭힘(성희롱)관련 법적 쟁점」, 『노동법포럼』 제25호, 노동법이론실무학회, 2018, 124. [본문으로]
  4. 문강분, 「직장 내 괴롭힘 법제화와 여성노동」, 『이화젠더법학』 제12권 1호, 이화여대 젠더법학연구소, 2020, 52.   [본문으로]
  5. 김민정, 「직장 내 괴롭힘의 법적 개념과 성립요건: 직장 내 성희롱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젠더법학』 제11권 1호, 한국젠더법학회, 2019, 114. [본문으로]
  6. 이원희‧이소라‧변섭, 「성적괴롭힘(성희롱)관련 법적 쟁점」, 125-6. [본문으로]
  7. 문강분, 「직장 내 괴롭힘 법제화와 여성노동」, 52; 신권철, 「직장 내 괴롭힘의 법적 개념과 요건」, 『노동법학』 제69호, 한국노동법학회, 2019, 239. [본문으로]
  8. 최윤정, 『산업재해로서의 직장 내 성희롱』, 푸른사상, 2019, 106. [본문으로]
  9. news.mt.co.kr/mtview.php?no=2020071209235235926; 이후에 이 기사를 쓴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는 “‘64세 박모씨’ 기사 쓴 이유”를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자세히 밝힌 바 있다.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8162  [본문으로]
  10.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말대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유 불가능의 표명은 항상 사유의 패배이며, 사유의 패배는 항상 비이성적, 범죄적 형태의 승리”였다는 사실이다. 알랭 바디우, 『우리의 병은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이승재 옮김, 자음과모음, 2016, 17. [본문으로]
  11. 이 인수인계서는 지난 해 7월, 비서직에 지원한 사실 자체가 없었던 피해자가 4년 만에 비로소 다른 곳으로 전보될 당시에 후임자를 위해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00727009044 [본문으로]
  12. 이 남성 공무원은 2017년부터 1년 동안 서울시장실에서 근무했다고 하는데, 이번 사건의 피해자가 2015년 7월부터 4년 동안 비서실에 근무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근무 기간이 겹치며, 따라서 증언이 충분히 신빙성 있어 보인다. www.hani.co.kr/arti/society/women/954829.html [본문으로]
  13. 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2007162109015   [본문으로]
  14. www.yna.co.kr/view/AKR20200716166451530 [본문으로]
  15. 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0951 [본문으로]
  16. 여기서 열거한 역할들에는 업무로부터 이어져 적정범위를 넘어서는 행위들뿐만 아니라 업무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사적 행위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역할들이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노동자의 의사를 무시한 채 일방적‧강압적으로 요구되었다는 점이고, 그렇게 됨으로써 노동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가하고 결국에는 근무환경 자체를 악화시켰다는 점이다. [본문으로]
  17. 아이리스 매리언 영, 『차이의 정치와 정의』, 김도균‧조국 옮김, 모티브북, 2017, 98-99. [본문으로]
  18. 한나 아렌트, 『정치의 약속』, 김선욱 옮김, 푸른숲, 2007. [본문으로]
  19. 이런 인식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일부로서 권력의 테크놀로지이자 지배의 도구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그 기능작용 속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피지배자들 및 피억압자들에게 잠재적으로 부여하는 것처럼, 법 또한 그것이 기능하고 작동하는 과정에서 권력을 제한하고 구속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정치가 이데올로기 속에서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만 작동 가능하다는 주장은 법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본문으로]
  20. 김경일 외, 『사건으로 한국 사회 읽기』, 이학사, 2011, 6-7. [본문으로]
  21. 김지은, 『김지은입니다』, 봄알람, 2020. [본문으로]
  22. 알랭 쉬피오, 『숫자에 의한 협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2012~2014)』, 박제성 옮김, 한울, 2019. [본문으로]
  23. 주지하다시피, 그중 오직 한 사람만이 대법원 판결로 유죄가 확정되어 수감 중이고, 나머지 두 사람에 대해선 아직 수사 및 조사가 진행 중이다. [본문으로]
  24. 알랭 바디우, 『존재와 사건』,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3.  [본문으로]
  25. 여성학자 권수현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박원순·오거돈·안희정 모두 지자체장, 이게 우연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지자체 내에 가해자가 출현할 수 있는 독특한 조건, 바로 ‘임금님 놀이’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omn.kr/1ohdd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