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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학교폭력

학교폭력, 이라는 거울 / 송진순

 

송진순(새길 기독사회문화원)

최근 연예계와 스포츠계에서 학폭 미투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학교폭력이야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라떼 이즈 호올스” 수사를 빌어 말하면, 90년대에도 소위 노는 애들, 무서운 언니들은 학교마다 있었다. 하지만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 이들과 한 교실에서 공존이 가능했다. 그들은 가끔 출가하여 세속의 도를 닦고 돌아오고, 교복 치마를 타이트하게 리폼하고, 푸석한 탈색 머리로 헤드뱅잉하며 졸아도, 숙제 검사하는 선생님 앞에서 멋쩍어하고,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면 미안해 할 줄 알았다. 껌을 씹으며 비속어를 밥 먹듯 날리고, 서열쟁탈의 난투가 벌어져도, 소풍과 수련회에서는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다같이 행복해했다. 문제아라는 낙인에 상처받은 그들은 남들보다 일찍 세상 고뇌를 짊어진 방황하는 영혼들이었다.

 

그런데 연일 보도되는 학교폭력 앞에서 “우리 때도...”라는 말은 차마 꺼낼 수 없다. 지금의 학폭 사태는 비행 청소년의 행위로 치부하기에는 폭력 수단과 방법, 그리고 피해 범위가 치밀하고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폭력은 흔들리는 존재감의 표현이나 서열 다툼의 문제를 넘어섰다. 집단으로 타인의 존재를 짓밟고 자신의 쾌락을 충족하는 잔혹한 엔터테인먼트다. 그러니 즉흥적으로 감정을 분출하고 오락거리가 된 폭력에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나 자기 성찰이 있을 리 없고, 범법행위라고 규정짓는 사회 규제나 선도방안은 하잘것없는 종이조각일 뿐이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정서적, 감정적 폭력으로 말초적 쾌락을 자극하고, 개인보다는 집단의 조직적 가해 행위가 공고해지는 상황에서 대다수 학생들은 폭력에 무감각해지고 학교 당국이나 경찰기관은 학교 내 병폐화된 환부를 드러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차라리 묵인하고 표면적인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문제를 봉합하는 빠르고 현명한 방법이다. 물론 2000년대 이후 점차 심각해지는 학교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교육부, 학교 담당자와 학부모 단체, 심리 상담 기관이 오랜 기간 협업하며 대책 마련에 고심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보적 정의를 넘어 회복적 정의로의 정책 마련의 노력은 교묘하게 진화되는 학교 폭력 앞에서 무력한 어른들과 무용한 정책으로 남을 뿐이다.

 

2020년 9월 시행된 전국 학교폭력 실태 전수조사에 따르면, 학교폭력 피해 경험자는 2만 7천 명으로 전체 학생의 0.9%가 피해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는 2019년 6만 명인 1.6%보다 감소한 수치로 표면적으로는 학교폭력이 줄었다고 단언할 수 있겠다. 그러나 수치는 사람이 아니라 사건을 드러냄으로써 살아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은폐시킨다. 전체 학교폭력 피해자가 감소됐다는 결과에 안심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2만 7천명의 아이들이 학교 폭력으로 고통당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폭력양상이 쉽게 파악하지 못 할 정도로 치밀해졌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더욱이 코로나19라는 비대면 상황은 물리적 폭력보다는 집단 따돌림과 사이버 폭력을 역대 최고치로 끌어올렸다. 그야말로 폭력의 양상이 달라졌다.

 

단체 대화방에 초대해 욕설을 퍼붓는 ‘떼카’, 대화방에서 한 사람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카톡유령’, 따돌림 대상만 남겨두고 대화방을 나가버리는 ‘방폭’, 피해 학생의 무선 데이터를 갈취하는 ‘와이파이 셔틀’ 등 사이버폭력을 지칭하는 신조어들은 현 사태의 심각성을 드러낸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피해 학생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영구한 트라우마를 갖고 혹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순간 가해자가 된다.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말이다.

 

“학교가 사라지면 돼요!”

 

“학폭 근절을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 서슴없이 나온 학생의 대답이다. 어른들 생각에는 폭력의 당사자들만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미 알고 있다. 학교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 폭력은 모두가 당사자라는 것이다. 학교 공간이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고, 폭력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대다수 학생들은 지속적으로 정서적 학대를 당하고, 폭력에 무감한 공동체를 배워가고 있다. 일상화된 폭력은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을 무너뜨리고,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지 못 하는 왜곡된 사회를 만든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만이 아니다. 근원적으로는 이 사회가 약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짓밟는 폭력의 구조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경쟁과 성장이 지고의 가치가 된 시대, 피라미드 구조의 상위만 독점한다면 어떠한 권력을 부리고 폭력을 휘둘러도 되는 안전한 세계를 구축할 수 있으니 말이다. 돌 지난 아이에게 적자생존을 위해 온갖 양질의 교육 컨텐츠로 채찍질하고, 학생들을 정서적 학대와 폭력의 구조 속에 밀어 넣는 교육시스템에서 끼워넣기식 인성 교육과 회복적 정의의 시스템이 얼마나 작동할 수 있을까? 문제는 이러한 삶의 가치관이 교회라고 다를까 싶다.

 

손가락질과 왕따를 당하는 이 옆에서, 누구도 혐오하는 피 흘리는 병자 앞에서, 권력의 쓰레기를 줘담아 먹고사는 이 뒤에서, 예수는 같이 손가락질 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죄인을 만드는 구조, 폭력의 사회에 대고, 도대체 뭐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줄 알고 있는가? 되물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사회에서 아이들이 자신과 타인의 삶을 인정하고 아름답게 크기를 바라는 탐욕에 대해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는가. 학교폭력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금 여기의 우리 모습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