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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청년: 2021년 대한민국에서 청년으로 살아가는 일

프레임에 갇힌 ‘그 한-남자’의 현상 / 남기평

 

남기평(데나리온BANK 운영위원)

 

주력 야당의 30대 중반인 그 한-남자가 당대표에, 그것도 투표를 통해서 당선(?)되었다. ‘나이’만을 봤을 때, ‘연령주의’와 ‘경력주의’가 강한 정치판에서, 그리고 수구정당에서 돌파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고, 그 도전과 선택에는 박수를 보낸다. 단지, 박수만 보낼 뿐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그 한-남자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찾을 수 없다. 그 한-남자가 ‘연령주의’를 극복했다고, ‘경력주의’를 극복했다고 하기에는 과제들이 첩첩산중이다.

 

박근혜 키즈로서 주목을 받았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그 한-남자에게 기대할 것은 애초에 없었다. 야당은 그 한 남자를 통해서, 하나의 ‘현상’을 만들어 냈다기보다는 ‘이미지 쇄신’만 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새 인물만 찾는 우리의 정치판에 아이러니이고, 반反여당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몸부림일 뿐이다. 2021년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 한-남자가 하는 행보나 발언은 참신한 ‘꼰대’도 아니고, 그냥 기존 정치인들의 말을 되풀이하는 그냥 ‘꼰대’ 그 이하일 뿐이다. 그 한-남자는 젊어지고 싶어 안달 난 옛스러운 야당의 ‘불로초’에 또 다른 욕심 중에 가장 큰 욕심, 욕망의 투영이다. 반인반신을 모시고 있는 유신세대의 바람이었던 ‘박근혜’ 키즈다운 부상이다. 단적인 예가, 여성가족부를 해체한다는 말인데, 도대체 어떤 사고구조에서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이미지 쇄신은 혁신이 아닐뿐더러, 개혁이라는 이름과도 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이미지 쇄신에서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연령주의를 극복하는 모습(이미지)만 노출시키면 된다. 너무 쉬운 선택이다. 이미지 쇄신은 충분히 주목을 끌 수 있다. 가면은 비판받지 않는다. 그 가면이 과했다면, 비판과 동시에 가면을 교체하면 된다. 우리는 그렇게 계속 가면을 교체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그 한-남자라는 가면은 충분한 효과를 거뒀다. 이미지 쇄신은 정치가 아니다. 단순한 속임수에 불가하다. 이는 NCCK나 기존의 진보라고 자처하는 공동체들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사안들이다. 연령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고, MZ세대는 들러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 한-남자의 현상에서 우리는 부러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할 과제가 한국사회에 주어졌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 이슈선점을 빼앗김으로 인해서 정권 재창출의 위기감, 특별히 이대남(20대 남자)의 몰표를 걱정한다. 이 이슈선점을 다시 돌리는 길은 정공법밖에 없다. 새인물, 새정치라는 또 다른 가면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정공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그 한-남자의 현상은 또 다시 대중을 양당 시스템이라는 프레임, 결국에는 양당 중 한 당을 선택해야 하는 프레임에 가둬넣는다. 여기서 프레임의 반전은 없다. 이미지 쇄신은 조금 더 세련되게 프레임 속 프레임 속 프레임의 지옥에 빨려 들어가게 할 뿐이다.

 

그 한-남자는 연령상으로 MZ세대다. MZ세대는 여러 특성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세대갈등에 전면에 서있다. 그래서 윗세대들에게는 MZ세대는 마땅치 않다. 보수가 보기에는 위험하고 기존의 세대들이 받아드리기에는 부담스럽다. 진보가 보기에는 그냥 철없고, 아무런 정치공식 없이 품위 없이 날뛰는 무개념한 이들이다. 야당 대표인 ‘그 한-남자’에는 이러한 경계인의 모습은 없다. MZ세대라면, 그 세대의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한-남자’는 자기 세대를 대변하지 않는다. 기존의 틀, 프레임을 지탱하는 대변자일 뿐이다. ‘그 한-남자’에 대한 기대는 없다. 그러니 주변에서 그 한-남자에 대한 정치실력에 대한 비판이 있을 뿐이지, 인신공격이든지 그 인물 자체에 대한 대놓고 하는 비판은 없다. 정의당 류호정과 장혜영 의원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혐오에 가까운 비판과는 대조된다. 나는 류호정과 장혜영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세대를 대변하지 않는다면, 지금 ‘그 한-남자’는 그나마 장점인 ‘연령’ 자체만 소비할 뿐이다. 이 가면은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다.

 

이를 똑같이 우리 지형으로 옮겨와도 비슷하다. 지금 우리 진형은 ‘그 한-남자’ 현상도 일으키지 못하고 있으니, 사실상 MZ세대는 등을 돌렸다. 자기 것 지키기에 혈안이다. 그들만의 리그 속에 우물 안에 개구리인데, 그 우물마저도 말라가고 있다. 얼마 전, 주식채널임에도 불구하고 유튜버 ‘슈카’가 20대가 특별히 종교에 관심 없음이 78%라고 하면서, 사실상 청년 종교인은 소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 소수는 목소리가 줄어든다는 것이고, 이 목소리가 들리게 하기 위해서는 ‘혁신’적인 무언가가, 기존의 질서와 다른 그 ‘무엇’, ‘영성’을 제시해야 한다. 현재의 교회와 교단은 아무런 아이디어가 없다. 현재는 교회의 인구분포가 역피라미드인데, 그 피라미드 구조가 10년 안에 얇은 막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게 서구교회에 대한 경고!를 수많은 교회 강당에서 이야기했음에도, 그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 여기에 팬데믹 상황은 가속패달을 밟았을 뿐이다.

 

MZ세대는 ‘공정’에 알레르기반응을 일으킨다. 무엇이 공정인지, 가성비인지를 따지고 따져서 묻는다. 또한 ‘감동’이 있다면 기꺼이 반응하고, 시간을 할애한다. 이들에게 주변을 둘러보면, ‘공정’ 따위는 없다. 더 나아가 ‘희망’이 없다. 알베르트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 “희망이 없다면, 마음의 평화는 없다.”라고 주인공 베르나르 리유의 영적 친구 타루가 이야기한다. MZ세대가 놓인 마음의 상황이 이와 같다. 희망을 ‘공정’으로 대치한다면, “공정이 없다면, 마음의 평화는 없”는 셈이다. 교회에는 공정이 없다. 심지어 ‘그 한-남자의 현상’조차 없다. 그러니 코로나19 이후의 그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욕심은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꿈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욕하는 수구정당보다 못한 교회, 교단이 되어버렸다. 여기에는 이준석이라는 청년도 발 길을 끊는다. 희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