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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3.1운동 100주년

‘밀운불우’(密雲不雨) -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지나며 / 송진순

‘밀운불우’(密雲不雨) -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지나며 

 - 송진순(이화여자대학교)

 

3월 1일에서 삼일절로 

한국인에게 3월 1일은 여느 달의 첫 하루와 다르다. 한국근현대사에서 일제 강점이라는 식민 경험은 이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송두리째 뒤틀어 버렸다. 하여 전 국민이 일본에 항거하여 만세 함성을 외친 날, 우리에게 이 날은 3월 1일이 아니라 삼일절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된다. 바디우(A. Badiaou)에 따르면, 사건이란 본래 기존의 상황이나 제도화된 지식과 다른 것을 도래시키는 것이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방식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3.1운동은 특별한 하나의 사건이다. 

사건으로서 3.1운동이 함의하는 바는 사뭇 심엄하다. 그것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대항하여 자주독립을 선포한 거족적 민족운동이자 지역, 신분, 종교, 남녀, 노소를 무론하고 민중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진 비폭력 평화운동이었다. 이는 제국의 시대를 마감하고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의 단초가 되었으며, 기독교, 천도교, 불교의 종교간 연대와 협력을 이끌어냈다. 주목할 것은 운동에 참여한 이들 모두 민족 생존에 대한 열망 하나로 목숨을 건 자발적 주체로 일어섰다는 것이다.

이들이 주체로 서는 데에는 필연적 상황이 따랐다. 일본의 압제로 한 나라가 무력화 되고,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낱낱이 파괴되었다. 그 틈새로 세계열강들이 쇠락해가는 조선 땅의 마지막 한 점까지 찢어 삼켰다. 민족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생존을 거리낌 없이 내놓은 이들, 독립선언서는 식자층의 손으로 기록되었다 해도, 거리와 광장을 메운 만세소리는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맨손의 아무개들의 부르짖음이었다. 신분, 지역, 나이, 남녀라는 경계를 넘어, 망국의 하찮은 이들이 연대하여 하나의 염원으로 스러지는 국운을 일으켜 세웠던 날. 이것이 3.1운동이었고, 이들이 운동의 주체였다.  

 

2019년 3월 1일

1919년에 100이 더한 2019년 3월 1일. 숫자 100이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미숙에서 성숙으로, 불가능에서 가능을 희구하는 수(數)라는 점에서 3.1운동 100주년은 99년, 101년과는 분명 달라야 했다. 몇 해 전부터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을 비롯한 사회 곳곳에서 기념행사 전담팀이 전면 가동되었다. 이에 뒤질세라 종교계도 10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했고, 그 요란과 난장 한가운데 개신교가 있었다. 

3월 1일. 개신교 각 교단과 교회, 각종 기독교연합회들은 따로 또 같이 전국 곳곳에서 기념대회와 예배를 진행했다. 시청 광장을 비롯하여 교단별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찬란한 완성을 향한 100주년 기념대회, 기념예배, 기념행사가 진행되었다. 이 모든 것은 3.1운동을 찬란하게 전시(展示)했다. 시청에서 덕수궁 돌담길, 광화문을 거쳐 경복궁까지 형형색색의 플래카드와 쇼케이스, 유동하는 인파로 꽉 찬 도심은 3.1운동을 기억하라고 외쳤다. 각각의 외침들은 하나같이 “교회 연합, 신앙 각성, 나라와 민족, 다음 세대, 평화와 정의”의 키워드를 공유했다. 그러나 2019년을 지나는 이들, 일상을 지나는 기독교인에게 이 행사는 어떤 사건이었을까? 

“평화적 3.1운동, 기독교가 이끌었다”, “민족종교로서의 기독교”, 
“3.1운동 100주년, 교회 일치 계기 될 것”,  “100주년 한국교회기념대회’ 2만 성도 운집”...

온오프라인의 대중매체들은 연초부터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에 관한 보도를 쏟아냈다. 기사에는 응당 대형교회와 교단의 남성 원로 목회자와 남성 신학자 일군의 사진과 함께. 100년 전 운동은 분명 이름없는 필부필부들의 인간 해방과 민족 독립의 외침이었다. 100년 전 보도사진에는, 100년 전 3.1운동을 지낸 감옥에는 원로 남성 지도자와 학자 일군보다는 일반의 민(民)들, 여성, 학생, 청년의 쟁쟁한 아우성으로 가득했다. 독립선언서에 명시되었듯이, “우리가 본시 타고난 자유권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며”.... “남자ㆍ여자, 어른ㆍ아이 할 것 없이 음침한 옛집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삼라만상과 더불어 즐거운 부활을 이룩하게 되누나.”라는 조선 독립의 정당한 의미를 마음에 품고서 말이다. 

 

‘밀운불우’(密雲不雨)

2019년, 기독교는 3.1운동 100년을 기념해야만했다. 한국 사회의 위기와 한국 기독교의 위기를 타계할 모멘텀이 필요했다. 사회에서 외면받는 기독교, 스스로 고립되고 분열된 교회, 세상과 유리된 신앙을 성찰하고 되짚어야할 당위적 요청이 있었다. 하여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인적, 물적 공세를 다했다. 100년 전 기독교의 공(功)을 기념했고, 기독교인의 열(熱)을 찬양했고,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권세(權勢)를 다시금 외쳤다.  

행사는 응당 주체가 아닌 주최에 의해 이끌어진다. 주최는 언제나 지배 권력의 위계에서 움직인다. 이에 3.1운동을 기념하는 주최는 정작 기억해야할 주체를 놓쳤다. 주체가 되어 기억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야할 기독의 민(民)은 관객이요, 관람자가 되었다. 교회는 사사로운 신앙을 하나님의 섭리로 선포하면서도, 신앙과 역사의식, 그 안의 민의를 가르치는 데 서툴렀다. 

신앙의식과 역사의식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강대국들의 틈새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부여잡고 예언자의 소명을 감내한 하찮은 히브리 민족에 의해 이뤄졌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폭정 하에 혈과 육이 아니라 예수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은 철저하게 억눌린 자들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체가 되는 고백을 통해 이루어졌다. 3.1운동을 기념하는 교회는 시작부터 기독의 민들의 참여와 연대로 이뤄져야 했다. 위기를 타계할 동력은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중심이 아니라 경계 밖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 100년 전 민들도 이를 알았다. 그런데 100년 후 주최는 이를 알지 못했다. 비단 100주년 기념행사의 문제가 아닐 터이다. 구름이 운집해있으나 제대로 된 비가 내리지 못함은, 한국 교회의 신앙과 역사의식, 그리고 민에 대한 고심이 여전히 된서리 맞은 고두밥인 까닭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