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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청년: 2021년 대한민국에서 청년으로 살아가는 일

“그 어디에도 ‘이대녀’ 현상은 없다” / 신혜은

 

신혜은(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문화윤리)



‘젠더갈등’은 기성 정치 세력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도구로써 재생산 및 재현된다. 젠더갈등을 청년세대 특유의 담론으로 국한시킴으로써 젠더갈등의 큰 맥락을 제거해버리고, 그것을 청년세대 내 남성과 여성 간의 성별 갈등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특히 2040청년 남성층의 표심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젠더갈등 프레임을 이용한다. 이러한 양상은 젠더갈등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젠더갈등을 해소하기보다는 오히려 심화시키고 왜곡한다. 특히 이것은 청년 여성을 어느 담론에도 끼지 못하게 이중배제 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대남 현상’, ‘이준석 현상’, ‘젠더갈등’. 이러한 표현들이 사람들의 일상 대화로부터 나왔을 리는 만무하다. 이 담론들은 주로 주류 언론과 기성 정치 세력에 의해 거론되고 있다. 언론은 20대 남성의 정치성향 및 투표 결과와 청년 이준석이 국민의 힘 당대표가 된 것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을 현상화 했다. 즉 20대 남성이 ‘여성 친화적’인 현 정권의 정책에 반감을 표하며 이탈하여 보수 정치 세력으로 합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이 호명하는 ‘이대남’은 반(反)페미니즘 남성 연대다. 특히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20대 남성이 ‘이대남’을 대표한다. 이들은 남성을 피해자, 여성을 차별의 가해자로 정의하며 ‘역차별 담론’을 형성한다. 기성 정치 세력은 피해자 정체성을 내새우는 ‘이대남’의 정서를 이용해 청년 남성들의 표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젠더갈등을 부추긴다. ‘이준석 현상’은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했다. 기성 정치 세력은 청년 남성층의 표를 흡수하기 위해 여야 할 것 없이 ‘이대남’이 어필하는 약자성에 당위성을 실어주면서 젠더갈등 담론을 재생산해 나간다. 


기성 정치 세력이 젠더갈등을 청년세대의 전유물로 재현하는 것은 청년세대가 겪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은폐한다. ‘청년 빈곤’, ‘고용 없는 성장’, ‘비정규직 문제’, ‘청년 실업’, ‘불안정한 고용’, ‘청년 주거 문제’ 등 소위 ‘이대남’—특히 사회적으로 낙오된 20대 남성이 과잉 대표되는—이 느끼는 피해의식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도록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린다. 이들이 재현하는 젠더갈등 프레임에서 ‘이대남’의 시선은 ‘집단이기주의를 표방’한다고 비춰지는 ‘요즘 청년 여성들’에 꽂힌다. ‘이대남’의 피해의식과 분노는 여성혐오로 분출된다. 애당초 얼마 주어지지 않은 파이(pie) 보다는 그 파이마저 나눠 가져야 하는, 아니 그것마저 ‘빼앗으려는’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문제시된다. 이들이 봤을 때 ‘이대녀’는 과거에 비해 차별경험이 없는 위풍당당한 20대 여성인 것이다. 이것은 청년세대가 동일하게 겪는 구조적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청년세대 간의 싸움을 조장한다. 성공은커녕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여야 하는 청년세대가 처한 경제적 양극화와 불평등한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해 기성 정치 세력은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이대남’의 약자 정체성에 힘을 실어주는 정치담론으로써 젠더갈등을 재현하는 것이다. 



사실, 청년세대가 동일한 구조적 문제를 겪는다고 말할 수 없다. 청년세대 담론에서 청년은 청년 ‘남성’을 표준으로 상정하기 때문에 청년세대가 직면한 어려움은 곧 청년 남성이 직면한 어려움이다. 요즘 청년세대는 사회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연애’,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N포 세대’로 불리는데, 이 N가지에는 청년 여성이 겪는 노동시장에서의 차별, 출산 및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일상적 불안과 두려움, 가부장적 가족제도로 인한 갈등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러한 어려움은 청년의 문제가 아닌 ‘여성’의 문제로 주변화 된다. 청년 여성은 ‘청년’으로 인식되기보다 ‘여성’으로 인식되어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중적인 차별을 받는다. 젠더갈등은 물론 청년세대 담론에서조차 청년 여성은 이중배제되는 것이다. 젠더갈등 프레임에서 집중조명을 받는 것은 청년 남성의 내래티브와 분노다. 이것이 바로 ‘이대녀’ 현상이나 ‘류호정 현상’이 없는 이유다. 청년세대 담론 어디에서도 청년 여성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모든 청년세대 담론은 청년 ‘남성’ 중심으로 생산된다. 이것을 생산하는 주체는 그 역시나 ‘남성’ 중심의 언론과 기성 정치 세력이다. 



나, 만 31세, 기혼, 청년, 여성, 전도사. 매일같이 직장상사에게 남편 밥상은 잘 차려주냐는 질문을 받는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여성 대상 성범죄 사건을 접하며 나 또한 표적이 되는 건 아닌지 불안에 떤다. 매일같이 내 직장 동료, 친동생, 아는 언니, 아는 동생, 친구, 그리고 동기들이 겪는 성차별∙성범죄 일화를 들으며 분노한다. 교회와 신학교마저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매일같이 절망한다. 이런 나에게 ‘이대남’ 현상? ‘이준석 현상’? ‘젠더갈등’? 기가 찬다. 누가 ‘이대남’ 현상이라고 명명하고, 누가 ‘이준석 현상’이라고 명명하고, 도대체 누가 ‘젠더갈등’이라고 명명하는가? 모두 여성 발화자를 철저히 배제한 표현. 신물이 난다. 



참고문헌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20). 청년관점의 ‘젠더갈등’ 진단과 포용국가를 위한 정책적 대응 방안 연구. 경제∙인문사회연구회 협동연구총서, 1-530.
허성학 (2020). ‘20대 남자 현상’이 던지는 질문—청년세대의 계급적 조건을 담론화하지 못하는 정체성 정치에 대하여—. 진보평론, (85), 244-275.
최종숙 (2020). ‘20대 남성 현상’ 다시 보기: 20대와 3040세대의 이념성향과 젠더의식 비교를 중심으로. 경제와 사회, 189-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