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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드라마 오징어 게임; ‘K-’를 생각한다

오징어 게임과 K-기독교 / 이찬석

 

이찬석 (NCCK 교회일치위원, 협성대학교)

 

복음적 또는 보수적 신학자로 평가받는 칼 바르트(Karl Barth)는 ‘복음과 종교’를 구분하여 대립적인 관계로 설정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복음’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고 있지만, ‘종교’는 인간적인 것(이성, 문화 등)에 근거한다. 복음은 계시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에게로 오는 것이지만 종교는 인간(세계)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에게 이르려는 시도이므로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노예의 반란과 같다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기독교를 ‘복음’이 아니라 ‘종교’로 규정하고, 그의 종교비판의 정점에는 기독교 또는 교회가 있다. 그는 교회가 신의 문제를 일깨워 주기보다는 잠들게 하였다는 극단적 비판을 한다. 바르트가 설정하였던 복음과 종교의 관계는 예수의 가르침과 기독교(교회)의 관계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으며 예수의 가르침과 기독교(교회) 사이에 경계선을 세워 볼 필요가 있다. 바르트의 눈으로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본다면, 등장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기독교(교회)에 상응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주의적 모습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상응한다. 현재 한국의 기독교 안에 예수의 가르침을 실현하려는 아름다운 교회가 많이 있다. 그러나 본 글에서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기독교(교회)의 모습으로 제한하려고 한다.

 

이 드라마에서 게임에 참가하는 456명의 모든 사람에게 번호는 주어지고, 244번 남자는 기독교인으로 등장한다. 세 번째 게임인 줄다리기 게임을 위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참가번호 1번 오일남은 줄다리기는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작전을 잘 짜고 단합만 잘 되면 힘이 모자라도 이길 수가 있다고 말하자, 244번 남자는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은 오직 주님뿐입니다.”라고 말한다. 다섯 번째 게임 징검다리 건너기 게임의 순번을 선택하는 순간에 244번 남자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을 창조하신 날은 여섯째 날이야. 하나님께서 죄 없는 순수한 인간을 창조하신 그날로 돌아가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6번을 선택한다. 244번 남자에게 기독교 신앙은 자신의 이기적인 삶과 성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편을 배제하고 자신과 자신의 편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구원자로 둔갑하고, 하나님의 여섯째 날 인간 창조에서 ‘여섯’이라는 숫자는 자신만을 위한 행운의 숫자로 변해버린다. 한국의 많은 교회가 전통적인 주술적 신앙과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성공과 물질적 축복을 위한 기복적 신앙의 모습을 강조하였다. 244번 남자를 통하여 K-기독교가 지닌 이기적/기복적 신앙의 부끄러운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오징어 게임에서 기독교에 대한 가장 자극적인 비판의 모습은 목사의 딸인 240번 지영의 고백이다. 그녀는 네 번째 게임인 구슬치기의 시간에 67번 탈북여인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니 엄마가 방바닥에 누워서 죽어 있었어. 그 옆에 아버지란 인간이 칼을 들고 서 있었고, 그 다음으로 본 건 우리 아버지 시체. 그 옆에 칼을 들고 서 있던 건 나였고. 그 인간 직업이 목사였어. 엄마를 때리고 나한테 그 짓을 하고 나면 항상 기도했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고. 근데 엄마를 죽인 날은 기도를 안 하더라? 죄를 용서받지 못할 걸 알았나?”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많은 교회가 종교 개혁 전통에서 ‘오직 믿음으로만’에 강조점을 찍고 회개와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본회퍼의 말대로 복종과 제자도 (discipleship)를 상실한 ‘값싼 은혜’(cheap grace)의 종교가 되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라는 행함을 강조하는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눅 17:4)는 말씀을 더 선호하고 강조하는 비윤리적이고 율법 무용론적인 K-기독교의 수치스러운 민낯이 240번 지영의 고백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막 10:31) 라는 말씀을 제작팀이 의식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주인공 성기훈은 게임 참여자 456명 중에서 꼴찌 456번으로서 최종 우승자가 되고 상금 456억을 받고 도심의 길가에 버려진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면서 전도하던 한 기독교인은 쓰러져 있는 성기훈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 믿으세요!” 교회 성장론에 매몰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선교’보다는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의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일방적인 ‘노방전도’를 행하였다. 노방전도를 하는 사람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교회 성장에 더 치중하였던 K-기독교의 삐뚤어진 민낯이 드러난다.

 

한국교회 안에는 종교(바르트의 종교개념)를 지향하기보다는 복음과 예수의 가르침에 헌신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가는 많은 교회가 있다. 그러므로 많은 기독교인이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기독교를 너무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으며 그러한 평가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회와 기독교인의 삶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벗어나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244번 남자, 240번 지영의 아버지,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노방 전도인의 모습을 통하여 드러나는 K-기독교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민낯은 바르트가 제시하는 종교의 모습에 상응한다. 반대로 오징어 게임 안에는 죽음의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장면들이 속속 등장한다.

 

첫 번째 게임인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이주노동자 알리는 자신도 움직이면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넘어지는 주인공 성기훈을 붙잡고 도와주어 살려준다. 240번 지영은 구슬치기 게임에서 구슬을 벽에 가까이 던지지 않고 자신 앞에 툭 떨어뜨리면서 67번 탈북인 강새벽에게 게임과 생명을 양보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넌 여기서 나갈 이유가 있지만 난 없어 · · · 이유가 있는 사람이 나가는 것이 맞잖아.” 마지막 게임인 오징어 게임에서 주인공 성기훈은 쌍문동의 천재 조상우를 죽일 수 있는데도 죽이지 않고 게임장에서 퇴장하려고 뒤돌아서는데 병정이 상우를 죽이려고 한다. 그때 기훈은 병정에게 “게임을 그만두겠어. 동의서 3항 참가자 과반수가 동의하면 게임은 중단된다.”라고 말하고, 쓰러져있는 상우에게 손을 뻗으며 “집에 가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상우는 “형 미안해”라고 말하면서 칼로 자신의 목을 찌르고 죽어간다. 기훈은 상우를 위하여 희생하고, 상우는 기훈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타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몫과 생명을 희생하는 것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고 그 절정은 골고다 언덕에서의 십자가 사건에서 꽃을 피운다. 주인공 역을 맡았던 배우 이정재는 NYT와 인터뷰에서 오징어 게임은 삶의 벼랑 끝에 선 사회의 낙오자들 456명이 목숨을 걸고 상금 456억 원을 타기 위한 생존게임을 벌인다는 내용이지만 게임의 참가자들은 생존게임을 벌이면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 분투한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 사람은 이타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고 친구가 매우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 오징어 게임은 이타주의라는 주제를 (드라마 속) 생존게임과 연계시켰다고 생각한다.” 오징어 게임 드라마에 나오는 기독교인의 모습은 예수가 선포한 메시지의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지만, 타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주의적 장면과 모습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동선을 같이한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너무 폭력적이고 잔혹하다,’ ‘한국의 순수한 전통 놀이를 왜곡한다,’ ‘기독교를 왜곡한다,’ 등 다양한 비판을 받고 있지만, 제작자의 속 깊은 의도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의 희생과 협력으로 보인다. 오징어 게임의 감독 황준혁은 이 드라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우화’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오징어 게임은 “한국 사회가 경쟁에 부여하는 중요성과 패자에 대한 자본주의의 잔혹성을 언급했다. 극 중 보여주듯 패배자 성기훈도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끝까지 갈 수 있었다.” 1번 오일남은 구슬치기 게임에서 이렇게 말한다. “깐부끼리는 네 거 내 거가 없는거야.” 한국의 기독교는 오징어 게임에서 드러난 것처럼 잔혹한 자본주의에 편승하여 이기주의와 성장과 경쟁의 늪에 빠졌던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삐뚤어진 모습들을 인정하고, 치열한 경쟁에서 낙오한 패배자들과 깐부 맺는 K-기독교로 거듭나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반기독교(교회)적인 요소에 거부반응을 보이기보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장면들에 더 굵은 밑줄을 긋고 K-기독교의 방향성에 대하여 생각에 잠겨 보아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는 이기적/기복적 믿음을 넘어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을, 개인적 성화를 넘어서 사회적/우주적 성화를, 교회 성장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강조하는 K-기독교로 성숙해야 한다. 복음과 한국의 선조들이 추구하였던 상생(相生)의 전통을 토대로 자본주의를 완성하는 글로컬 기독교가 K-기독교의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