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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3.1운동 100주년

2019 시대유감 / 남기평

2019 시대유감

- 남기평(한국기독청년협의회)

 

   3.1운동 100주년이었다. 그랬다. ‘100’단위는 나름의 의미를 갖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를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그 날을 기념하느냐에 따라 의미하는 바는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이번 개신교계 행사를 보면서, 내 머릿속에 남은 것은 “100”이라는 아무 의미 없는 숫자였다. 재작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그냥 지나치고,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니 더욱 그렇다. 이번 3.1운동 100주년을 스쳐가면서, 우리는 독일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준비한 노력을 비교해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이들은 10년 가까이 500주년을 준비하면서 500년 전 역사의 흐름을 오늘날의 역사흐름에 빗대어 조명하며, 다양한 분야의 학술논의 등을 통해 교회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의미를 모색하고, 앞으로의 계획과 전망도 내놓았다. 개신교, 특히 개혁교회 문화가 그들의 전반의 문화여서라고 하기에는, 그들의 노력과 공들임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독일교회를 예를 든 것은, 그들이 그만큼 500주년을 통해서 독일교회를 돌아보고, 시민사회와의 접촉점을 늘리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역사적 행태들과 근현대사에 이루어졌던 전쟁부역을 포함한 역사적 과오를 반성했다. 기독교는 반성의 종교이면서, 회개의 종교이다. 철저한 회개 즉 개인과 사회를 통해 지은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는 행위를 통해, 기독인으로서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변태 혹은 탈바꿈해 간다. 이전과는 다른 사람, 다른 종교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우리의 3.1절 100주년에는 이러한 모습조차 없었다. 친일에 대한 반성과 신사참배 그리고 시대착오적인 교회의 행태를 회개하는 역사는 저기 안드로메다로 날아갔다. 말과 말 그리고 허공에 메아리친 기도뿐이었다. 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신자 수를 보유한 종교가 아무런 영향력도 보여주지 못했다. 100년 전에 비해 나아진 것이 없이, 퇴보했다.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퍼져갔다. 각 지역에 속한 큰 마당에서, 장터에서, 광장에서 모두 민족의 염원을 담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모두 거리에 나왔다. 그리고 일제의 무력에 개의치 않고, 용기와 힘을 다해 뭉쳤다. 여기에 하나님이 함께 계셨고, 청년예수가 그들과 함께 울부짖었다. 바로 예배장소가 교회나 어느 한 건물이 아닌, 민중과 백성들이 있는 마당과 광장이 된 셈이다. 1919년 혁명의 열기 속에서 그랬다. 그리고 백여 년 가까이 흘러, 촛불의 물결이 된 광화문이 그랬다. 시민들과 민중들은 시대의 요구에 응답했다. 하지만 백 년이 지난 지금, 한국 교회는 역사의 쳇바퀴를 한참 뒤로 돌려, 건물 안에 머물렀고, 1919년 당시 시대의 요구에 응답했던 기독교인들에게 누를 끼쳤다. 하나님을 다시 건물에 가둬 놓았다. 예배의 장소를 축소시켰고, 예배의 장소 또한 바뀌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이고, 현실을 말해준다. 예배 장소의 선택은, ‘기념’만 추구했을 뿐, 사실상 한국개신교가 교회에서만 자신의 영향력이 겨우 존재함을 선언한 셈이다. 곧 행사, 기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회합장소를 변경해 인사동 태화관에서 모였다. 같은 시각 민중들은 파고다 공원에 모였다. 청년과 학생들이 민족대표들을 찾아가, 파고다 공원으로 인도하려 했으나, 소요나 유혈 충돌을 우려해 태화관 안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하지만 이는 민중들에게 실망스러운 행보였다. 이번 3.1운동 100주년 예배도 이와 같았다. 한국 교회는 민족대표 중 16인이 서명함을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이들은 끝까지 민중들과 호흡하지 않았다. 이번 기념예배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인물 중심인, 그리고 16인이 3.1운동을 주도해서 이끌어 간 것 마냥, 포장하고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 큰 오산이다. 이들의 중요한 역할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3.1운동은 지배층들과 기득권들이 지켜내지 못한 나라를 민중의 힘으로 되찾기 위한 고군분투였다. 더 나아가 이전 질서를 전복시키고, ‘민’이 주인이 된 운동이었다. 3.1운동의 주인은 민족대표들이 아니었다. 3.1운동에 참여하고 독려하고 함께한 민중들이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는 여전히 인물중심에 머물렀고 더 이상 운동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기구 그리고 몇몇 개신교 지도자들이 한국개신교를 대표하는 것 마냥, 아무런 의미 없는 행사를 치뤘다. 이는 역사의 의미로 볼 때, 솔직하게 말하면, 시간 낭비였다. 3.1운동은 한국개신교만이 주도한 것이 아니다. 100년 전 대한민국 모든 민중들의 비폭력 저항이자, 대중운동, 그리고 천도교, 개신교, 불교의 신앙운동이었다. 

   3.1운동은 일제의 조직적이고 잔인한 억압으로 종국에는 ‘실패했다’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3.1운동을 식민사관으로 보았을 때이다. 3.1운동은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대한민국의 시작을 알렸으며, 민주주의와 민족자결을 알린 혁명적 사건이었다. 또한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기도 했으며, 일제의 통치방식조차 바꾸게 했다. 1919년에서 우리는 거룩한 실패를 경험했다. 무엇보다도 값진 사건이었다. 누구도 실패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2.8선언을 포함한 서슬 퍼런 상황을 인지하면서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과감히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어간 사건이었다. 당시 한국 교회는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 세상의 짐을 홀로 졌던 거룩한 행보를 몸소 행했다. 그리고 희망을 잃고 시름시름 앓던 이들과 죽어가는 이들과 함께 아파했고, 같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같이 절규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발버둥치 듯, 용기있게 외치고, 목놓아 외쳤다. 이는 고스란히 유산으로 남아,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그 얼이 민주항쟁으로 승화되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게 된다.

   반면 2019년 한국 교회는 절규하고, 아파하는 모든 것들을 외면했다. 100년 전, 함께 광장으로 나와 예수의 길을 걸었던 그 기독교인들이 아니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며, 여전히 권력지향적이다. 한국 개신교가 민족대표만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구태의연한 발상이다. 전혀 근대화되지 못했고, 1919년에서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다. 얼마 전 광장의 촛불에서 배운 것이 전혀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21세기의 대한민국 사회는 부의 양극화의 심화, 청년빈곤, 세대갈등, 환경문제 그리고 남북문제 등 여러 이슈들이 혼재되어 있고, 고난받는 이들이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는 상황이다. 한국 개신교는 이에 대해 아무런 응답조차 못하고 있다. 오히려 성공복음을 앞세워 에둘러서 소수 특정 그룹을 옹호하고, 고난 받는 이들을 배제시키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100년 전 한국 개신교는 그러지 않았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은 실로 유감이다. 희망이 어디서 솟아나는지 묻고 싶다. 시대가 더 악하기 전에 한국 개신교의 존재 이유를 반드시 설명해야 할 것이다. 100년 전 기독인들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