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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송도 아파트 단지 어린이 놀이터 사건

소유가 아닌 존재의 의미 / 김한나

 

김한나 (성공회대학교)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왔던 대학 신입생 시절, 나는 어디에 사느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거나 그저 상투적인 질문이라 여겼던 나는 어느 순간 어디에 사느냐가 나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역적 편차가 크지 않았던 지방에서는 어디에 사느냐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남과 강북이라는 기준이 명료한 서울에서는 강을 기준으로 나누어진 신분의 체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단순히 강을 기준으로 나누어지던 사회적 계급은 이제 아파트냐 빌라냐, 혹은 어느 브랜드의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점차 세분화되고 있다. 어느덧, 우리는 인간의 가치가 그가 소유한 물질에 의해 평가받는 세상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것이 곧 자신의 정체성이 되는 ‘소유 중심의 사회’를 살고 있다. 현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물질이 풍족한 사회 속에서 오히려 자족하지 못하고 소유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현상을 경험한다. 이러한 집착으로 인해 자신의 소유를 나누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여 타인에 대한 경계의 벽은 점차 두터워지고 공존과 공유의 가치는 저하될 위험에 처해있다. 우리 주님은 겉옷을 벗어달라는 사람에게 속옷까지 벗어주며,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에게 10리를 가주라고 명하셨다. 하지만, 현시대는 물질적 소유뿐만 아니라 ‘정보의 사유화’, ‘정보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도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돈과 특정 지위를 가진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정보가 두루 공유되지 못함으로써 사회적 불평등과 불이익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현시대 정보는 곧 경제적 이익과 사회적 특권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현대의 개인주의는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규정하기보다는 각자 개인의 경험과 소유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풍조를 낳았다. 현대인들은 관계를 고려하기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사회적 인맥조차도 성공의 수단이 된다. 그들은 유사한 수준의 학력, 거주지, 기호에 따라 그룹을 이루기도 하며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는 한동안 협력한다. 또한, 자신이 속한 그룹의 가치를 높이고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해 그룹에 속하지 않은 타인에 대한 경계심은 오히려 높아진다. 이로써 사회는 점차 분열되고 느슨한 연대로 묶인 여러 ‘우리’들은 다른 ‘우리’들을 향해 뚜렷한 선을 긋기 시작한다. ‘나는 너희들과 달라. 더는 넘어오지마!’ 이처럼, 각자가 자신의 주요 정체성의 뿌리를 소유와 이익에 두면 둘수록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과 혐오는 증폭된다.

 

현대의 윤리 의식의 약화와 개인의 소유와 권리에 대한 집착은 법에 대한 지나친 의존 현상으로 이어진다. 윤리적 중재의 역할을 해오던 공동체의 역할이 축소되고 각 개인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공권력의 개입을 쉽게 허용하게 되었다. 이번 ‘놀이터 사건’도 입주자 대표가 해당 아파트에 거주하지 않는 아이들이 단지 내 놀이터에서 놀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신고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신고자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를 통해 외부에서 온 아이들이 놀이터를 사용할 경우 경찰에 신고하기로 하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오늘날 점차 늘어가는 소송과 법적 분쟁은 개인과 공동체의 윤리적 판단과 중재보다는 자신의 소유를 법으로만 통제하려는 현상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대 사회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윤리의 상실에서 비롯되며 이러한 공백을 법이나 특정 제도로 대체하려는 시도에서 심화된다. 사회와 공동체의 윤리가 약화될수록 인간의 가치판단 기준은 다수의 사람이 선호하고 동의하는 것, 그리고 그들을 통제하는 권력 계층의 개입에 의해 형성될 가능성이 있다. 때와 상황에 따라 지나치게 상대적인 규범은 소수 엘리트 집단의 의도와 합의에 따라 쉽게 변화될 수 있으며, 이는 특정 집단의 이익과 소유를 위한 제도화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다행히, 이번 사건에서 입주자 대표가 주장한 ‘타주민 놀이터 사용 시 경찰 신고 규칙’이 주민들의 반대로 삭제되었지만, 이와 비슷한 사건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삶의 궁극적 목적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은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하지만, 그 물질이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할 때 우리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 얼마나 소유하였는가 혹은 무엇을 소유하였는가가 삶의 가치 기준과 목표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웃도 그들의 소유에 따라 가치가 평가되어 ‘우리’ 혹은 ‘저들’로 분류된다. 즉, 우리가 물질에 가치를 두면 둘수록 우리 자신도 점차 사물화되는 비극을 겪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정체성을 소유가 아닌 존재 그 자체에 둘 때 타인을 향한 시선과 태도는 변화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뜻에 기인한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존재만으로도 고귀하고 아름답다. 비록, 우리의 마음이 죄로 인해 어두워졌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를 덮기에 충분하다. 인간의 삶 속에서 영원하신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은 그 어떠한 물질적 소유를 능가한다. 우리 존재의 가치를 하느님께 두는 삶, 교회가 그러한 삶의 본보기를 통해 참된 윤리를 전한다면 소유가 중심이 되는 세상에 빛을 비출 것이다. 더불어, 이웃의 갈등과 다툼에 무관심하지 않고 교회가 평화의 도구가 되어 윤리적 중재의 역할의 회복하는 것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