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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송도 아파트 단지 어린이 놀이터 사건

아파트를 넘어서는 신앙 / 황푸하

 

 

황푸하 (새민족교회, 옥바라지선교센터)

 

“이 나라는 아파트에 미친 나라야.”

 

서대문 형무소 앞 옥바라지 골목이 재개발로 인해 사라질 때 마지막 남은 구본장 여관 이길자 사장님의 외침이다. 정말로 대한민국은 아파트에 미친 나라가 되었다. 대학 강단에서 은퇴한 어느 교수님에게 그림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쉬는 시간에 그 교수님과 아파트 베란다에서 경치를 구경하고 있었다. 경치라고 할 것도 없이 다른 아파트 동들을 보고 있었다. “자네, 저기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겠나?” 내가 말했다. “아니요. 회색 아파트들뿐인걸요.”, “아닐세. 저 회색 아파트에도 햇빛이 반사되어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지 않은가? 주님께서 주시는 빛으로 모든 것 안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네.” 그 말을 듣고 침묵 속에서 한참을 생각했다. 아니올시다. 아무리 아름다운 천상의 그림이 걸릴지라도 단순히 저 아파트들은 투기 자본의 산물, 산과 하늘을 가리는 오만한 바벨탑일 뿐이다. 이 아파트가 세워지기 전에는 분명 작고 아름다운 동네들이 있었으리라. 물론 너무 오래되어서 보수가 필요했을지언정 싹 쓸어버릴 필요까지는 없었다. 가난했지만 그 골목 끝에도 소중한 삶들이 있었다. 잘 보이지 않았을지라도, 비록 아무도 모를 만큼 그늘진 곳일지라도 삶의 의지가 있었던 생명들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쫓겨나게 되었다.

 

“우리 딸 과외비가 얼만지 알아?”

 

마포가 강남이 되는 꿈을 안고 마포래미안푸르지오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러나 처음에는 생각처럼 집값이 폭등하지 않았다. 무리해서라도 집을 사버린 그들은 불안해했다. 뭐라도 해야 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아파트 입구에 있는 포차들이었다. 그 포차는 30년 전부터 자리를 잡고 동네를 가꿔온 포차였다. 그들은 그 포차들을 쓸어버리기로 했다. 아파트 안에서는 전단지가 돌았다. 그 전단지 안에는 그들의 분명한 욕망이 드러나 있었다. 집값을 올리기 위해 마포구청에 단체 민원을 넣어서 포차를 철거하자는 그들의 작전이 온 천하에 공개됐다. 하지만 많은 주민들은 부끄러움 없이 그것을 따랐고, 마포구청은 깡패용역들과 굴착기를 동원해서 30년 된 포차를 하루아침에 뭉개버렸다. 그곳에서 우리는 또 다시 예배를 시작했다.

 

우리는 떼제의 찬양을 부르며 그 아파트 단지를 돌기로 했다. 자본의 욕망 때문에 철거된 아현포차의 억울한 사연을 들려주기 위함이었다. 2016년 추운 겨울 저녁 7시 무렵, 포차들이 철거되고 흉한 화분들로 채워진 그 거리에서 예배를 마치고 우리는 두 줄로 섰다. 맨 앞에는 커다란 십자가를 든 사람이 십자가를 번쩍 들었다. 그 뒤에서 한 사람은 종을 치고, 한 사람은 기타를 쳤다. 우리는 엄숙한 노래를 조용히 부르며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 포차 이모들은 우리 옆에서 함께 걸으며 주민들에게 욕을 던지기도 하고 무엇보다 울면서 곡을 했다. 성(聖)과 속(俗)이 공존하는 역설적인 행진이었다. 우리의 평화로운 찬양 소리는 생각보다 위협적이었다. 텅 비어있어야 했던 하늘에 커다란 벽들이 있으니 소리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 돌고 돌아 울려퍼졌고, 그 행진 소리는 모든 주민들의 저녁을 방해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베란다로 나와 구경을 했고, 어떤 이들은 우리에게 욕을 했다. 또 어떤 주민들은 화를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 우리의 멱살을 잡기도 했다. “우리 딸 과외비가 얼만지 알아?” 한 어머니는 찬양을 하는 우리에게 와서 과외 시간 1분에 얼마가 나가는지 계산하게 했다. 그 어머니는 딸의 망가진 과외 시간만큼 포차 이모들의 망가진 인생을 생각했어야 했다. 우리가 망쳐버린 아파트 주민들의 소중한 저녁 시간 30분 안에서라도 그들은 30년 동안 쌓아온 아현포차의 소중한 삶의 무게를 그대로 느꼈어야 했다. 결국 이 운동은 승리했다. 우리와 함께 싸운 포차 이모 두 분은 새로운 가게를 차렸고, 마포구청장의 사과를 받아냈다. 그리고 마포래미안푸르지오 아파트는 몇 년 사이에 집값이 배나 올랐다.

 

2021년, 사람들은 점점 더 아파트에 미쳐간다. 서울의 어느 동네는 몇 년 사이에 집값이 두 배가 되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살아갈 목적이 아니라 팔아서 차익을 남기는 목적으로 집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투기”라는 단어를 얘기하면 그들은 부동산에 “투자” 하는 거라고 둘러대고는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투기”라는 단어를 방송에서도 사용한다. 범죄를 포함한 모든 욕망을 재테크라고 가르치는 세상이 되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목적, 혹은 궁극적 관심이 아파트가 되어가는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억제하지 못하는 욕망 때문일까, 그런 것보다는 해결되지 않는 불안 때문일 것이다. 4억에 산 아파트가 15억이 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구미가 당기지 않더라도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파트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아파트를 짓고자 하는 사람들 또한 많아질 것이고, 이 나라는 아파트를 더 지을 것이다. 결국에 이 나라는 정말로 아파트에 미친 나라가 될 것이다.

 

예부터 역동성(Dynamics)을 가진 존재자(A Being)들은 비존재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신(神)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사람들은 우주 저편에 존재하면서 그의 계획이나 기분에 따라 우리 역사에 간섭하는 신, 혹은 말을 듣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여 버리는 미치광이 폭군 같은 그런 신들을 만들어냈다. 가난에 대한 위협은 신을 부자로 만들었고, 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신을 군주로 만들었다. 제국과 재물을 가리키는 그런 신들은 언제나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는 듯 했고, 사람들은 미친 듯이 아파트를 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예비적인 관심일 뿐이다. 그런 신으로는 결국에 우리의 두려움과 불안을 해결할 수 없다.

 

신학자 폴 틸리히(P. Tillich)는 신을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고 말했다. 이런 신학은 신을 더 이상 유신론적 타자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 지푸라기 같은 유신론에서 벗어나는 경험은 우리를 흔들기 때문에 언뜻 볼 때 불안해 보이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오롯이 서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가 허락한 평화를 넘어서는 평화, 경제가 허락한 자유를 넘어서는 자유, 법이 명시한 정의를 넘어서는 정의, 가부장적인 구조가 가르쳐준 사랑을 넘어서는 사랑, 그것들이야말로 하나님이고, 우리의 궁극적 관심이며, 그것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이 바로 신앙이다. 오래 전부터 종교는 이런 믿음으로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해왔다.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의 방식대로 굴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삶의 방식이 있을 거라고, 저 가난한 사람들을 죽여서라도 내가 가난에서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연대로 가난을 극복하는 삶의 방식이 있다고! 아파트로 더 높은 계급을 얻는 방식이 아니라 그 계급주의를 부숴내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믿으며 살아온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아파트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아파트를 넘어서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