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건과 신학 2기/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화해와 일치를..

이상한 신학생의 WCC 여행기 / 김지원

 

김지원 (협성대 신학대학원, NCCK 교육위원) 

 

1. 그래 계속 이상해주자  

 

독일. 유럽여행은 다녀온 적 있지만 독일은 관심 가는 나라도 아니었기에 들르지도 않았었다. 유럽의 한중간에 위치한 나라라 비행편이 많다는 정도와 신학 강의에서 들었던 독일 철학과 신학자들에 대한 얕은 지식이 전부였다. 그리고 칼스루에라니. 베를린도 뮌헨도 하이델베르그도 아닌 유명하지 않은 곳에서 대체 무슨 일을 할까 싶었다. 게다가 신학생인 나는 8월 말에 개강 일정이 시작돼 WCC에 참석하면 2주나 학교를 빠지는 무리한 일정을 감수해야 했다. 더군다나 학교에서 딱 한명, 나 혼자 가야 한다는 부담감과 장학금은커녕 공결처리도 되지 않는 비협조적인 상황, 은근하게 반대하는 학교의 분위기와도 맞서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일도 그만두게 되어 모아둔 돈을 탈탈 털어야 비행기표나 겨우 살 수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왜 갔나. 나는 여기에 왜 와야 했나.  

 

힘이 들었다. 계속 소진되고 불안하고 지치기만 했다. 페미니즘과 인권 운동, 사회 선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운 학교 분위기 속에서 2년째 살고 있었다. 튀지 않고 조용히, 무사히 졸업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WCC에 참석하러 함께 독일에 가자는 제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가뜩이나 어울리지 않는 곳에 꾸역꾸역 앉아 있었는데, 이제는 아예 일어나서 이상한 사람임을 광고하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이러나저러나 난 튀는 사람이었고, 이미 지난 세 학기 동안 대부분의 수업에서 늘 소수 의견을 가진 학생이었다. 이제 더 이상하고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그래, 계속 이상해주자. 기대에 부응해주자! 

 

감사하게도 이 이상하고도 가난한 학생을 응원해주는 분들이 계셨다. 여기저기서 보내주신 장학금인지 헌금인지 알 수 없는 금액들을 모아 따로 통장을 만들었다. 때마다 감사기도를 했고, 이 은혜는 돈으로든 배움으로든 후배들에게 꼭 갚겠다고 다짐했다.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 애썼고, 가끔 사용하는 아끼던 물건들도 팔아 통장에 보탰다. 기가 막히게도 떠나기 며칠 전에 보니 딱 적절한 금액이 모여있었다. 돈 때문에 쪼그라들었던 마음에도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 정신 차리고 모든 경험을 꾹꾹 눌러 담아오리라 마음 먹으며 독일행 비행기를 탔다.  

 

2. 다 설명하긴 조금 어렵지만  

 

열흘 정도 경험한 WCC는 생각보다 아주 대단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았다. 많은 이야기들을 뒤로하고 WCC에서 인상 깊었던 몇 장면들을 나눠보려 한다. 공식적인 첫 일정인 여는 기도회가 먼저 생각난다. 20명 정도 되는 감리교신학생·활동가팀 멤버들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여는 기도회에 참석했다. 우리는 무대가 잘 보이는 중앙 쪽 자리에 앉았고, 기도회 시작 전까지 무대 뒤편을 꽉 채운 찬양팀의 인도에 따라 기도회 때 불릴 찬양들을 연습하며 따라 불렀다. 잠시 후 11차 WCC의 개회가 선포됐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기도회장 뒤쪽에서 각 교단의 대표자들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그려진 커다란 성화를 들고 등장했다. 무대 중앙에 성화가 놓이자 여러 나라들의 찬양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첫 곡으로 한국 민요 찬양인 “주께서 왕이시라”가 불려졌다. 처음엔 익숙한 리듬과 선율에 놀랐고, 곡의 정체를 알게 되자 감격스러웠다. 비록 한국어로 불리진 않았지만 WCC에 가장 적은 인원인 아시아, 게다가 한국의 민요 찬양이라니.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한식을 먹었을 때보다 더 울컥한 반갑고도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여는 기도회에서 만난 또 다른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 꽤 긴 시간 진행된 세 명의 이야기와 설교를 지나 다시 서로를 축복하고 파송하는 찬양시간이 돌아왔다. 각 대륙의 찬양을 흥겹게 부르던 중이었다. 갑자기 모든 음악과 소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무대 양쪽 스크린은 수어 통역 담당자만을 비췄다. 1분 남짓 4천명의 사람들도 정지한 듯 숨죽였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밀려왔고 마스크 뒤에 숨어 조금 울었다. 그 뒤로도 한참을 고민했지만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단마디의 생각과 감정으로 정의하기엔 표현이 모자랐다. 그래서 그냥 기억하고 두고두고 꺼내보기로 했다. 이 글을 쓰다가 또 울었는데, 울면서 생각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절대 꺼내지 않아야겠다고 말이다. 주책없이 계속 우는데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테니. 

 

3. 배가 터질 만큼의 양식을 주시옵고 

 

WCC는 매일마다 정해진 소주제가 있다. 여섯째 날은 창조세계와 생태환경, 기후위기와 죽어가는 생명들을 기억하는 날이었다. 아침기도회는 여는 찬양과 성경 봉독 후, 강단에 재를 뿌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음악이나 목소리 없이 조용히 재만 뿌려졌고, 재는 연기처럼 뿌옇게 바람에 날아갔다. 재를 바라보며 묵상한 후,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생긴 기후위기와 재난들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가 이어졌다. 그 중 한 구절의 내용이다.  

 

“창조의 하나님, 이 세상은 우리의 탐욕으로 인해 신음하고, 우리의 낭비로 인해 울며, 우리의 이기심 때문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구에 불을 질렀고, 한정된 자원을 태우고, 한계 이상으로 지구를 먹어버렸습니다. ”   

 

용서를 구하는 찬양이 이어졌고, 메시지와 기도문들이 정해진 순서대로 읽혔다. 이제 각자의 언어로 주기도문을 외우며 마무리만 하면 되었다. 일정도 벌써 6일째였고, 이미 자주 외우기에 주기도문의 내용과 의미는 크게 생각지도 않은 채 줄줄 외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부분이 목에 턱 걸려 쉬이 뱉어지지 않았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순간 스스로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먹고 마시는 게 너무 쉬운 사람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다니, 모순적이었다. 심지어 이 모순은 아주 오래되고 과하기까지 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거나, 먹을 것이 없었던 때에 기도했더니 음식을 구했다는 설교의 예화로 접한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내가 느낀 모순은 그 지점에 있지 않았다. 나는 일용할 양식을 넘어 더 이상 소화시킬 수 없을 만큼 많이 먹고 있었다. 음식은 물론, 물건도 과식했다. 잘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도 그저 예뻐서, 갖고 싶어서, 저렴해서, 언젠간 쓸 것 같아서 샀다. 음식 한 그릇이, 물건 하나가 나에게 오기까지의 과정을 잘 알고 있지만, 그 속에서 많은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음을 외면했다. 지구 곳곳의 화재와 홍수가 나의 작은 선택이 모여 일어난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환경보호와 생태신학의 당위와 필요성에 공감했고, 일상에서도 제법 잘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텀블러와 이면지를 썼고, 천연 비누와 수세미 같은 생활용품을 사용했다. 자주 실패했지만 내가 먹을 식물들도 직접 기르곤 했다. 그러나 나의 모든 행동들은 “이 정도면 됐다”며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겉핥기식 실천이었다. 이제야 겨우 깨닫고 멈추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잘 모르겠다. 지금은 그 날 드려졌던 기도문의 한 구절만 계속 되뇌이고 있다.  

 

“이 재로부터 땅과 창조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창조의 하나님,
이 재와 진흙 속에서 우리에게 다시 오소서. 
땅의 지혜를 통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그 지혜를 통해 우리를 회복시켜 주소서.” 

 

4. 함께 춤을 춰야하니까

 

WCC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생각했다. 이름만으로도 긍정과 부정의 반응이 갈리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반대라고 말씀하시는 어른들이 계셔서 지금도 무척 겁이 난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그 곳은 예상보다 무척 평범했고, 엄청난 수준의 이야기들을 쏟아놓지도 않았다. 시간과 장소가 정해진 장이 열렸을 뿐, 무슨 말과 행동을 하는지는 참가자들에게 달려있었다. 주어진 주제와 토론, 회의와 공식 문서가 존재하지만, 이것들도 생각보다 평이하고 대중적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그곳은 두려울 정도로 저만치 앞서 있지도, 결연하고 무서운 구호를 외치지도 않았다. 다만 모인 이들은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 애썼다. 그리고 공감하며 격려했다. 가끔 다른 의견이 나오더라도 배려와 존중이 먼저였고, 잠깐 분위기가 과열되더라도 선창하는 찬양 소리를 따라 함께 노래하고 춤췄다. 논쟁은 서로를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토론이었고 소외되는 사람들을 챙기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무엇을 배우고 돌아왔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즉흥적인 요청들에 단순한 소감을 말하거나 좋았다고 짧게 답하곤 했다. 에큐메니컬 운동이 신앙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곳에서는 WCC의 대변자가 된 것 같기도 했다. 겨우 열흘의 시간이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지금 당장 성과를 찾는 물음에 만족할만한 거창한 답을 하기는 어렵다. 머쓱한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WCC와의 열흘은 한참을 헤매다 만난 길을 아는 행인 같기도, 거대한 세상의 출입구 같기도 하다. 열흘이 지나고 다시 한 달 정도가 지난 지금,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겠지만 일단 걸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달려가거나 멈추지 않겠다고는 말할 수 없다. 중간중간 쉬다 놀다 해야 하니까. 그리고 기뻐서 슬퍼서 함께 춤도 춰야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