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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사랑과 폭력

'사랑으로'를 다시 부르며 / 박흥순

'사랑으로'를 다시 부르며

- 박흥순(다문화평화교육연구소)

 

시대정신을 반영한다는 것

배고픔과 가난을 견뎌내지 못한 어린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부모는 일하러 집을 비웠고, 집안에는 먹을거리가 없었다. 생활고를 비관하며 좌절한 네 자매는 극단적 선택을 했고, 세 살 막내는 결국 목숨을 잃었다. 30년 전 올림픽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서울 주변부에 처절하게 살았던 어린 네 자매에게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전국각지에서 성금을 보내며 응원했지만 곧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불행하고 안타까운 사연을 접했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적극적으로 응답한 사람이 가수 해바라기 이주호씨다. 가슴 아픈 기사를 읽은 즉시 ‘사랑으로’라는 노랫말을 써내려갔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가사가 지닌 이면에 슬프고 가슴 아픈 사연을 기억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사랑으로’ 노랫말을 다시 읽어본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고, 노무현 대통령 장례 때에도 불렸다. 더 이상 이같이 안타깝고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이 노래를 불렀고 또 다시 부른다. 세 살짜리 어린이가 죽어간 사건을 마주해서 노랫말을 쓰고 곡을 만들어, 더불어 사는 사회를 제안했던 가수처럼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필요하다. 충격적이며 불행한 사건과 사고가 거의 매일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지만, 그와 같은 사건과 사고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연민하고 공감하고 연대하는 방식은 각자가 처한 환경과 관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시대정신을 반영해서 노래하고, 해석하고, 실천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 다시 깨닫는다.

 

슬픔과 아픔이 반복되는 지금 여기

어린이날을 며칠 앞둔 4월 말에 온 나라를 경악하게 하게 만든 사건이 또 일어났다. 12살 중학생이 어머니와 재혼한 새아버지에게 살해당하고 시신이 유기된 사건이었다. 성추행 사실을 친아버지에게 알렸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어린 중학생은 이 하늘 아래 어디에도 잠시 마음을 둘 곳이 없었다. 친아버지에게 가혹한 폭력을 당했고, 새아버지로부터 성적 추행에 시달려온 짧은 12년 삶에 ‘가족’도 ‘국가’와 ‘사회’도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어머니조차도 살해되는 범행 현장에 함께 있었음에도 말리지 않았거나 막아내지 못했다는 보도는 더 충격적이다. 남편이 두려워서 범행을 말리지 못했다는 주장만으로 그 행동을 합리화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부모에게 학대를 당하는 어린이와 청소년 관련 사건이 차고 넘친다. 친부모와 양부모를 가리지 않고 어린 자녀를 학대하고 살해하는 일을 버젓이 자행하는 비극적 현실은 비관적이며 참담하다. 어떤 변명과 핑계도 어린이와 청소년 학대를 정당화할 수 없다. 어린이와 청소년 학대와 폭행이 사망이라는 극단적 결과로 이어지고, 그 가해자가 친부모를 비롯한 계부모와 양부모인 경우가 70%를 넘는다는 보도를 접하며 충격과 비탄에 빠진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2001년부터 2017년까지 216명 어린이와 청소년이 학대와 폭행으로 목숨을 잃었고, 2016년과 2017년에 각각 36명과 38명으로 증가했다. 학대와 폭행을 당하지만 제대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훨씬 더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이 끔찍하고 처참한 환경에서 살아 내거나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일어나는 학대와 폭행에 대한 다양한 원인 분석과 진단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생활고와 가난이라는 경제적 이유, 사회와 공동체가 공동으로 양육하고 교육해야 하는 공공성 붕괴, 무한경쟁으로 내몰려 스스로를 건사할 수 없도록 만든 사회 구조와 시스템, 자녀와 부모 갈등을 사적 영역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풍토, 다변화된 사회 발전 속도를 제대로 쫓아오지 못하는 전통적 교육과 도덕적 잣대, 소위 ‘정상 가족’이라는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수많은 ‘다양한 가족’(한부모 가족, 싱글맘 가족, 조손가족, 맞벌이 하며 자녀를 가지지 않는 가족 등)이 받는 배제와 차별, 부모가 되기 위한 제대로 된 교육의 부재를 꼽을 수 있다.

세계 최저 출산율을 걱정하며 인구정책에 부단히 관심을 갖지만 정작 어린이와 청소년이 안전하고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와 ‘국가’를 만드는 일에 어떤 노력과 관심을 기울였는지 질문해야 한다. 미혼모를 바라보는 시선,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에 기초한 평가, 순혈주의와 혈통주의 신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회 풍토를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을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 목숨을 구명하기 위해서 12살 어린 중학생은 여러 차례 ‘가족’과 ‘사회’와 ‘국가’에 구조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세심하고 진지하게 경청하고 귀를 기울여주지 못했던 나를 포함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해야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1차 지지자’ 혹은 ‘1차 옹호자’는 부모이면 좋겠지만, 부모를 대신할 수 있는 누군가는 꼭 있어야 할 것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1차 지지자’와 ‘1차 옹호자’를 확보해내는 것이 ‘사회’와 ‘국가’가 우선적으로 실천해야 할 일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학대와 폭력이 급증하고, 사망이라는 극단적 결과를 가지고 오는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이유와 원인을 해결하기 위한 중·장기적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자녀가 태어나는 순간, 부모도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부모가 되기 위한 적절하고 효과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부모교육은 또한 인권교육과 평화교육에 기초한 교육으로 확대해서 서로 배워야 할 것이다.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와 교육을 부모와 자녀가 함께 받는다면 위계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전환할 수 있는 길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당위성을 무너뜨릴까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이다.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은 따라서 신앙공동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교회와 신앙공동체 구성원으로 모이는 다양한 사람들이 사회와 국가 구성원으로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어린이·청소년 학대, 폭력 사건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때로는 가해자로, 때로는 피해자로 그 곳에 서 있을 수 있다.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부모가 저지른 성적 추행과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12살 어린 중학생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생활고와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30년 전에 극단적 선택을 한 네 자매 행동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지금까지 친부모를 포함한 양부모와 계부모에게 학대와 폭력으로 죽음을 당한 200명이 넘는 어린이와 청소년 사망 사건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어린이·청소년 학대와 폭력 사건을 응답할 대안이 있는가?

사회적 통념이나 관습을 넘어서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한 때이다. 틀이나 시각을 완전하게 역전시키지 않는 한 제대로 된 응답이나 대안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주목한 성서가 여성 두 명을 소개하는 마가복음 5장 21절부터 43절이다. 이 본문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고통을 당하는 여성과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12살 어린 소녀에 대해서 보도한다. 유대 사회에서 금기시 되었던 두 사건과 마주한다. 혈루증, 즉 하혈이 멈추지 않는 병을 지닌 여성은 사람들 속에서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없는 부정한 사람으로 분류된다(레 15:25; 민 5:2-4). 정상적 삶을 영위할 수 없어서 사회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어 살아간다. 12살 짧은 생을 살다간 어린 소녀 또한 사회와 단절된 존재다. 죽은 시체를 직접 만지는 것 또한 부정한 행동으로 금지되었다(민 19:11-13). 죽음은 이미 가족과 사회로부터 배제된 존재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소개하는 예수는 이 두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제공한다. 하혈이 멈추지 않아서 출산을 할 수 없는 여성과 죽음을 맞아서 생명이 끊긴 어린 소녀는 당시 절망하고 좌절하는 유대 사회를 상징한다. 유대 사회를 상징하는 두 사람은 결국 ‘사회’와 ‘공동체’로부터 단절되고 배제되었던 사람들을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12년간 혈루증으로 고통을 당한 여성이 치유되고, 12살 어린 소녀가 다시 일어나 살아나는 것이 바로 온전한 회복과 해방인 것이다. 이 두 사건은 기존 유대 사회가 생명처럼 부여잡고 있던 당위성과 가치를 무너뜨리는 회복과 평화다.

지금 여기에 필요한 외침은 ‘회복하고 일어나라’는 따뜻하지만 단호한 제안이다. 지금까지 고수해 온 전통이나 관습이 ‘사람’을 배제시키고 단절시킨다면, 과감하게 끊어버리고 무너뜨리라는 의미이다. 부정하다고 분류되어 죄책감과 허탈감 속에서 살았던 하혈하는 여인을 환대하고, 꽃다운 어린 나이에 죽어갔던 소녀를 잡아 일으켜 생명을 부여했던 예수의 행동이 지금 여기에 필요하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단절되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과 희망을 제공하는 것이다. 잘못된 교육, 화석화된 관습과 전통, 가부장제와 혈통주의, 과도한 우월감과 선민의식, 혈연과 지연과 학연, ‘정상 가족’에 대한 허상과 헛된 신념을 부수고 무너뜨리는 결단이 요구된다. 경쟁이 아니라 상생, 일치가 아니라 조화, 배제가 아니라 포용, 차별이 아니라 환대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사람’과 ‘공동체’로 살아갈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이 사회가 온전한 회복과 해방을 실현하기 위해서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과 함께하는 ‘1차 지지자’와 ‘1차 옹호자’로 나서라. 특히 꽃다운 12살 나이에 생을 마감한 어린 중학생처럼 ‘사회’와 ‘국가’ 기관에 절실하게 구조 요청했던 수많은 학대받은 어린이·청소년에게 ‘1차 지지자’와 ‘1차 옹호자’가 되라.

 

다시 노래를 부르며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이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다. 생활고와 가난을 비관해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부모에게 학대와 폭행을 당해서 죽어가는 어린이·청소년도 존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꿋꿋이 살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나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받고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믿는다면, 불행하고 참혹한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직면해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할 사명 또한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해바라기 ‘사랑으로’라는 노래를 다시 부르며, 노랫말에 스며있는 ‘함께 살자’는 외침을 되새기며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이 불행하고 참담한 일이 조금씩 줄어들고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어두운 곳’, ‘보이지 않는 곳’, ‘가려진 곳’에 손을 내밀고 밝혀주는 사람들이 있기를 기대한다. 이와 같은 일에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를 또한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