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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국가조찬기도회

왜곡된 정교유착과 국가조찬기도회 / 장규식

왜곡된 정교유착과 국가조찬기도회[각주:1] 

- 장규식(중앙대학교)

 

이승만 정권하에서 정교분리 원칙이 무색할 정도로 권력과 밀착 관계를 유지했던 한국교회는 4월 민주항쟁 이후의 자숙기를 거쳐 군사정권기에 접어들며 점차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5․16군사 쿠데타 직후 장면 민주당 정부의 정치적 무능력과 사회적 혼란을 비판하며 반공을 국시로 한 쿠데타에 지지를 표했던[각주:2]  한국교회가 국가 권력에 대해 예언자적인 비판을 가하며 긴장의 날을 세운 것은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을 통해서였다.[각주:3] 

한국교회의 굴욕적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의 불길은 한일기본조약과 부속 협정이 정식 조인된 직후인 1965년 7월 1일 김재준․한경직․함석헌․강신명․강원용 등 기독교계 지도자 215명이 불순 저열한 외세에의 예속과 추종을 배격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타올랐다. 3․1독립선언서에 비견되는 이 성명서의 발표를 계기로 비준반대운동은 전국으로 번져 대전․군산․전주․이리․광주․부산 등지에서 연합구국기도회가 열렸다. 서울 영락교회에서는 7월 5~6일에 이어 7월 11일 각 교파 7천여 명의 신도가 구국기도회로 모인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과 이효상 국회의장 및 국회의원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채택하기도 하였다.[각주:4]  그리고 7월 12일에는 비준반대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회합이 영락교회에서 열려 33인의 확대위원을 두는 ‘나라 위한 기독교 교직자회’가 결성되었다. 보수 교계를 대표하는 예장 합동교단 또한 7월 8~9일 서울 평안교회당에서 민족자주성의 보존과 굴욕적 한일협정 비준에 반대하는 국난타개 기도회를 열고 운동에 동참하였다.[각주:5]  물론 정교분리를 내세워 교회의 정치참여를 비판하고 한일협정 비준에 찬성하는 성명서가 교계 일각에서 발표되기도 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고, 이를 통해 한국교회는 비로소 3․1운동 당시의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각주:6]

그러나 정교분리 원칙과 기독교의 사회참여를 둘러싼 교계 내부의 입장 차이가 그것으로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가운데 1969년 3선 개헌을 둘러싸고 전개된 찬반논쟁은 한국교회가 정교분리를 표방하는 보수세력과 예언자적인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진보세력으로 확연히 나뉘는 계기가 되었다. 먼저 김재준, 함석헌, 박형규 등 에큐메니칼 진영의 인사들은 6월 5일 신민당과 재야세력이 연대하여 결성한 3선 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에 참여하여 개헌반대운동에 나섰다. 특히 범국민투쟁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은 김재준 목사는 8월 15일 ‘전국의 신앙동지 여러분’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기독교인의 결단과 참여를 촉구하며 불의한 국가 권력에 대한 예언자적인 비판에 앞장섰다.[각주:7] 

반면 김윤찬, 김준곤, 김장환, 조용기 등 보수 기독교계 인사들은 9월 4일 ‘개헌문제와 양심자유선언을 위한 기독교성직자 일동’ 명의로, 김재준 목사의 개헌반대 위원장 활동은 성직의 권위를 도용하는 일이라 비판하고, “기독교인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날마다 그 나라의 수반인 대통령과 그 영도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기도함이 없는 비판은 비생산적이며 비기독교적입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에큐메니칼 진영의 개헌반대운동에 맞섰다. NCC에 맞서기 위해 보수교단 가운데 일부교회들로 구성된 대한기독교연합회(DCC) 또한 9월 5일 ‘개헌에 대한 우리의 소신’이라는 성명을 통해, 우리 기독교인은 개헌에 대한 박대통령의 용단을 환영하며, 오늘과 같은 국제정세와 국내시국에서는 강력한 영도력을 지닌 지도체제가 필요하다고 하여, 3선 개헌에 대한 찬성 입장을 밝혔다.[각주:8] 

여기서 3선 개헌에 대해 예언자적인 비판과 사회참여를 통해 국가권력과 긴장관계를 유지하거나, 전통적인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하는 것은 각자의 신앙 양심과 판단에 따르는 것으로 특별히 문제 삼을 사안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이 과정에서 정교분리를 가장하고 국가권력과 결탁하려는 움직임이 보수 기독교계 일각에서 그 마각을 드러냈다는 데 있는데,[각주:9]  1968년부터 연례행사로 시작된 대통령 조찬기도회(1976년 제8회부터 국가조찬기도회로 개칭)는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대통령 조찬기도회는 1966년 2월 3일 조직된 국회의원 원내 조찬기도회(회장 정일형, 총무 윤인식) 주도로 3월 8일 조선호텔에서 3부 요인과 각계 주요 인사, 종교계 중진 3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첫 모임을 가진 것이 그 시초였다.[각주:10]  그러나 대통령 본인은 무슨 사정에서인지 참석하지 못했고, 그 결과 공식적인 제1회 대통령 조찬기도회는 1968년 5월 1일에 이르러 비로소 성사를 보게 되었다. 김종필 공화당 의장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워커힐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교계 인사, 정계 중진, 사회 유지, 외국 귀빈 등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제1회 조찬기도회를 시작으로,[각주:11] 대통령 조찬기도회는 매년 5월초에 연례행사로 1974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1975년 한 해를 거르고 1976년 제8회부터 ‘국가조찬기도회’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그 뒤 한동안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고 국무총리나 국회의장이 자리를 대신 채웠다. 1981년 제13회 국가조찬기도회 때는 5․17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으나, 그 역시 이후 1987년 퇴임할 때까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각주:12] 

제1회부터 10월 유신 직전까지 준비위원장을 맡았던 신민당 정일형 의원이 제5회 대통령 조찬기도회(1972. 5. 1. 조선호텔) 개회사에서 “모든 지도자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한 자세로 국민의 성실한 봉사자가 되어 우리의 기본권이 존중되고 민주적 방식에 의해 잘사는 나라를 만들도록 기도하자”고 밝힌 대로,[각주:13]  당초 조찬기도회는 교계인사와 정치 지도자들이 국정 최고책임자를 ‘모시고’ 여야를 초월해 조국과 민족의 앞길에 주의 축복을 기원하는 자리였다. 그런데도 시작 단계부터 기독교의 예배 정신에 역행하는 불순한 의도의 호화 정치 쇼라는 비판이 제기된 것은[각주:14]  여기에 왜곡된 정교유착의 노란 떡잎이 이미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조찬기도회에 드리워진 왜곡된 정교유착의 어두운 그늘은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칙과 인권을 유린하면서 곧 마각을 드러냈다. 10월 유신 이후 양심적 기독교인들이 파쇼적 폭압에 맞서 싸우다 구속당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속에서 열린 제6회 조찬기도회(1973. 5. 1. 조선호텔, 준비위원장 박현숙) 석상에서 CCC 대표 김준곤 목사는 현실의 부정과 불의를 외면한 채 다음과 같은 설교로 유신의 앞날을 축복하였다.

“민족의 운명을 걸고 세계의 주시 속에 벌어지고 있는 10월 유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기어이 성공시켜야 하겠다.……당초 정신혁명의 성격도 포함하고 있는 이 운동은……맑스주의와 허무주의를 초극하는 새로운 정신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켜야 될 줄 안다. 외람되지만 각하의 치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군신자화운동이 종교계에서는 이미 세계적 자랑이 되고 있는데, 그것이 만일 전민족신자화운동으로까지 확대될 수만 있다면 10월 유신은 실로 세계 정신사적 새 물결을 만들고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을 것이다.”[각주:15] 

10월 유신을 일종의 정신혁명으로까지 찬양한 그는 이후 유신의 전도사를 자처하며, 신사참배와 이승만 독재에 앞장선 데 이은 한국교회의 또 한 번의 탈선을 진두지휘하였다.[각주:16]  제7회 대통령 조찬기도회(1974. 5. 1. 조선호텔, 준비위원장 박현숙) 또한 1974년 4월 25일 민청학련 사건에 기독교계 인사들이 다수 관여되어 있다는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수사결과 발표가 있은 직후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통일전선 형성의 일환으로 종교계에 침투하려고 기도하고 있다”며 종교계 지도자들은 이에 유의해야 할 것이라는 당부를 해 정치권력과 교계 보수 세력이 민청학련 사건을 놓고 유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각주:17] 

이 같은 조찬기도회의 왜곡된 정교유착은 유신체제가 붕괴하고 전두환 신군부가 집권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5․17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광주의 숱한 인명을 학살하고 정권찬탈에 성공한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의 장도를 축복하기 위해 모인 1980년 8월 6일의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롯데호텔 에메랄드룸)는 한국교회사에 지울 수 없는 오욕과 굴종의 기록을 남겼다. 보안사 군목 문만필의 연락을 받고 이 자리에 참석한 한경직, 조향록, 김지길, 정진경, 김인득, 강신명, 김용도, 김윤식, 김준곤, 김창인, 김해득, 민영완, 박정근, 박치순, 신현균, 유흥묵, 이경재, 이봉성, 장성칠, 조덕현, 지원상, 최태섭 등 교계 지도자 23명은 전날 대장으로 진급한 전두환 상임위원장을 비롯한 국보위 전 분과위원장 앞에서 그들의 정권찬탈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였다. 이 광경은 KBS와 MBC를 통해 생중계를 포함 무려 세 차례에 걸쳐 전파를 탔고, 이어 일간지의 머리기사로까지 실리며 양식 있는 국민들에게 커다란 배신감을 안겨 주었다.[각주:18] 

1981년 3월 대통령 선거인단 투표로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은 5월 14일 신라호텔에서 각계 인사 1,2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13회 국가조찬기도회(준비위원장 유호준)에 참석하여, “교회는 우리의 국가적 생존권 확보와 국리민복의 증진, 그리고 사회의 올바른 정신문화의 배양을 위해 배전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 기대된다”고 강조하면서 교회의 협조를 당부하였다.[각주:19]  이렇게 국가조찬기도회는 유신체제와 신군부 독재의 정당성을 내외에 과시하는 선전도구로 전락하면서 왜곡된 정교유착의 온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편 유신체제하 파쇼권력과 일부 보수 교계의 왜곡된 정교유착은 비단 국가조찬기도회에만 그치지 않았는데, 그것은 정권의 교계 분할통치 기도와 긴밀히 맞물려 있었다. 1974년 1월 31일 대통령 연두순시 석상에서 행한 윤주영 문공부장관의 발언은 그러한 정권의 의도를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 자리에서 윤주영 장관은 종교시책에 대해, 순수한 종교활동 및 신앙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하고 적극 지원하겠지만, 종교인들에게 현행법을 위반하는 정치활동의 특권이 없다고 주지시키고, 7대 종교단체 대표자 간담회를 비롯 종교인협의회를 매월 1회 개최하여 종교인과의 협조체제를 유지하겠으며, 종교인 새마을운동 참여 등으로 종교인의 유신과업 참여를 조장하겠다고 발표하였다.[각주:20]  유신체제에 순종적인 교계 보수세력과의 유착관계를 강화하는 가운데 교계 내부를 분할 통치하려는 의도의 일단을 내비친 것이다.

김종필 국무총리 또한 1974년 11월 9일 기독실업인회(회장 김인득)가 주최한 조찬기도회 석상에서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른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한 로마서 13장의 말씀을 들어 반정부투쟁을 하는 기독교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하였다.[각주:21] 

이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는 11월 18일 ‘최근 정부 요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발언에 관하여’란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김종필 총리의 발언을 반박하였고, 강문규, 강원용 등 66명의 교계 인사들 또한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명’을 발표하여 기독교계의 민주화운동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모든 권세가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로마서 13장의 말씀은 그것에 대한 복종을 말하기에 앞서 집권자의 한계를 규정하는 것으로, 절대화된 권력이 인권을 유린할 때 교회는 그에 대한 투쟁을 감행할 수밖에 없으며, 사회정의와 인권옹호를 위한 교회의 그 같은 활동을 탄압하는 것은 곧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각주:22] 

반면 대한기독교연합회(DCC: 회장 김윤찬, 총무 김종근)는 11월 27일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란 성명서를 통해 ① 수십 개 교파 중 불과 6개 교파에 전체 교세의 1/3에도 미달하는 NCC는 우리나라의 기독교를 대표할 수 없다. ② 로마서 13장에 명시된 세상 권세에 대한 복종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으로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하며, 교회의 존립 이유는 세상적 정권투쟁이 아니라 인간영혼의 구원에 있다. ③ 국가안보가 위태한 시기에 교회가 솔선해 국민총화를 위해 노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교회지도자와 선교사들이 앞장서 반정부 데모를 선동하는 일은 공산침략자에 대한 이적행위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각주:23]  NCC 성명서를 비판하고 김종필 총리의 발언에 동조하였다. DCC 총무 김종근 목사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기독교반공연합회 또한 11월 29일 반공대회 결의문을 통해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각주:24] 

그런데 기독교 다수 교파를 대표한다는 DCC의 반노골적인 정부 편들기에 예장 고신, 나사렛교회, 하나님의 성회, 예성 등의 교단이 가입사실이 없다고 굳이 밝힌 것은[각주:25]  DCC 등이 정교분리 원칙과는 거리가 먼 정교유착적 단체로 교계 일반에 널리 인식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다시 말해 그들의 행태는 보수교계 일각이 정교분리를 앞세운 세상 권세에의 복종, 지상천국 건설의 사회복음 노선에 맞서는 개인의 영혼구원, 그리고 국가안보에 대한 국민적 책임이라는 논리로 정부의 기독교 민주화운동 탄압을 합리화하며 정치권력과 유착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였다.

이처럼 유신체제하 기독교회는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 민청학련 사건으로 이어진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며 예언자적 입장에서 반정부 투쟁에 앞장선 민주화운동 세력, 세상 권세에의 복종을 내세워 정치권력과 유착한 친정부 세력, 그리고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하려 한 세력으로 나뉘어 갔다. 그러나 앞서 종교인의 유신과업 참여를 독려한 정부 요인들의 발언에서 나타나듯이, 그들이 보장한다고 했던 정교분리 원칙에 입각한 ‘순수’ 종교활동은 군사 파쇼독재가 강화되는 속에서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1975년 7월 1일 예장, 기감, 기장, 기성 등 개신교 19개 교단 대표들로 발족된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에서 7월 26일 발표한 ‘한국교회 선언문’(기초위원: 홍현설, 이종성, 김희보, 정진경, 지원상)은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였다. 광복 30주년을 기해 나온 19개 교단 지도자협의회의 성명은 1975년 4월 NCC 총무 김관석 목사와 박형규, 조승혁, 권호경 목사가 선교자금을 정치범 구호를 비롯한 다른 용도에 썼다는 업무상 횡령 혐의로 구속되면서 불거진 유신정권의 종교탄압과 선교자유 문제에 대한[각주:26]  교계 중도세력의 입장 표명이었다. 선언문에서 교단 지도자들은 “인권과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던 성직자가 수감되고 선교사가 추방된 것은 매우 불행하고 유감된 일”이나 “아직까지 한국의 교회는 정부로 인해 신앙이나 교회에 간섭이나 침해를 받은 일이 없고 선교활동도 큰 제약없이 자유로이 계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현실에서 대한민국의 주권 없이는 이 땅에 교회도 있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신앙수호와 국가안보를 제일차적인 과업으로 간주한다”는 등의 8개 항의 선언을 하였다.[각주:27]  정부에 구속 성직자들의 조속한 석방을 건의하면서도, 한국에 선교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신앙의 자유와 인권을 위협하는 것은 유신정권이 아니라 오히려 북한 공산주의자들임을 강변한 데서 이 선언문이 유신정권의 기독교 민주화운동 탄압으로 악화일로에 있던 국제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한 조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유신정권은 정교분리에 안주하려 한 교계 중도세력까지 끌어들여 국제 여론의 방패막이로 삼았다. 1977년 4월 26일 한국기독교시국대책위원회(대표 강신명)에서 발표한 “일부 해외 반한 인사들이 미국 등지에서 선교자유와 인권문제를 내세워 한국 실정을 비판하고, 지나친 선동과 비방을 하는 과격한 행동은 유감된 일로 한국 안보에 지장을 초래케 할 것을 염려하여 저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바이다”[각주:28] 는 성명서 또한 한국 내에 선교 자유가 보장되고 있음을 강조하며 암묵적으로 유신체제를 변호한 경우였다.

이와 별도로 한국십대선교회(YFC) 대표와 아세아방송 사장을 겸하고 있던 김장환 목사는 1974년 12월 오글 목사 강제 추방을 계기로 한국의 인권문제와 종교탄압이 국제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자, 기독실업인회회장 김인득 장로와 함께 수차 도미하여 방송대담과 순회강연 등을 통해 미국내 반한 여론을 잠재우는 데 앞장섰다. 또한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미국 정계의 이슈로 떠올랐을 때도 미국 침례교계와 종교방송계에 쌓아놓은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반대 로비에 나서는 등 위기에 몰린 유신정권의 홍보대사 노릇을 톡톡히 하며 권력자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여당목사’라는 꼬리표를 달았다.[각주:29] 

이와 같이 반인권적인 유신체제와 신군부 독재가 등장하는 과정에서 한국교회는 민주화인권운동과 산업선교 등을 통해 예언자적인 소임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다수는 정교분리를 내세워 침묵으로 일관하며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외면하고 군사 파쇼체제에 암묵적인 협조를 하였다. 특히 일부 보수세력은 국가조찬기도회 등을 통해 정권과 결탁하여 민주화운동 탄압에 면죄부를 주면서 독재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서슴지 않았다.


 

  1. 이 글은 필자가 쓴 “군사정권기 한국교회와 국가권력: 정교유착과 과거사 청산 의제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24호(2006)의 3장 “왜곡된 정교유착과 국가조찬기도회”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본문으로]
  2. 〈기독공보〉1961년 5월 22일, 5월 29일.  [본문으로]
  3. 1963년 12월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전개된 대일굴욕외교 반대운동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가 1964년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굴욕적 한일국교정상화 반대운동 단계이고, 두 번째가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과 부속협정 조인 이후 전개된 비준 반대운동 단계이다.  [본문으로]
  4. 이들 공개서한 가운데 특히 국회의원에게 보내는 서한은 기독교계의 한일협정 비준 반대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평화선을 사실상 포기하므로 어민의 생존권에 위협을 가져옴과 동시에 국민정의감에 좌절을 초래하였고, 청구권을 무상 공여로 변질시키는 데 동의함으로 일본의 침략정신을 인정하였고, 한일간 제 조약 무효화 시점을 애매하게 하므로 항일 선열들의 정신적 유산을 오손시켰고, 국내의 부정부패를 그대로 두고 국제 자본에 문호를 개방하므로 한국의 항구적인 신식민지화를 불가피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7․11 공개서한 - 국회의원에게”〈기독공보〉1965년 7월 17일)  [본문으로]
  5.  〈크리스챤신문〉1965년 7월 2일, 7월 9일, 7월 16일 ;〈기독공보〉1965년 7월 17일; 〈기독신문〉1965년 7월 12일, 7월 19일.  [본문으로]
  6. 김용복, “해방후 교회와 국가,” pp. 208~210.  [본문으로]
  7.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에 참여한 기독교계 인사들은 별도로 신민당 정일형 의원이 회장으로 있는 기독교염광회에 합류하여 “정부와 여당은 개헌 발의를 즉시 중단하고 징계 학생을 즉각 구제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교계를 대상으로 한 개헌반대운동의 조직화에 나서기도 했다. NCC 또한 9월 8일 “국론의 분열과 국력의 약화를 초래할 삼선개헌 발의에 대해서 깊은 우려와 유감의 뜻을 표한다”는 성명을 통해 개헌반대의 입장을 밝혔다.(〈교회연합신보〉1969년 8월 10일, 9월 14일)  [본문으로]
  8. 〈교회연합신보〉1969년 9월 14일.  [본문으로]
  9. 일례로 DCC 총무 김종근 목사는 성경은 교회와 정치 사이의 융통성 있는 관계를 말해준다며, 보수교계가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는 정교분리 원칙조차 저버리고 군사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하였다. 그는 3선 개헌은 역사의 요구라고 전제하고, 국민의 신임을 받는 정치가라면 국민의 지지를 통해 연한 제한 없이 집권할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의 일면이라고 하면서, 5․16 후 기간산업의 발전과 경제적 부흥과 북괴의 남침에 대한 강력한 국방태세를 구축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조국의 번영과 민족의 중흥을 위해 다시 한 번 정권을 맡기는 것이 이번 개헌의 요점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기독신보〉1969년 10월 11일)  [본문으로]
  10. 노홍섭, “조찬기도회는 중지되어야 한다,”〈사상계〉1966년 4월호, p. 76.  [본문으로]
  11. 제1회 대통령 조찬기도회는 박대통령과 이효상 국회의장,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참석한 가운데, 간사를 맡은 공화당 윤인식 의원의 사회로 회장 정일형 의원의 개회사, 서울신대 김석규 박사의 개회기도, 박현숙 의원의 구약성서 봉독, 김영관 해군제독의 신약성서 봉독, 찬양, 백리언 목사의 대통령을 위한 기도, 박윤선 박사의 나라와 세계평화를 위한 기도, 이환신 감독의 설교, 김재준 박사의 축도로 진행되었다.(〈교회연합신보〉1968년 5월 5일; 〈기독신보〉1968년 5월 11일)  [본문으로]
  12. 김용복, “해방후 교회와 국가,” p. 223 ; 한규무, “‘국가조찬기도회’, 무엇을 남겼는가,” p. 28.  [본문으로]
  13.   〈교회연합신보〉1972년 5월 7일. [본문으로]
  14. 노홍섭, “조찬기도회는 중지되어야 한다,” pp. 77~80.  [본문으로]
  15. 〈교회연합신보〉1973년 5월 6일  [본문으로]
  16. 김삼웅, “사건으로 본 한국의 종교 - 신사참배 이은 ‘독재자 조찬기도회’사건,”〈종교신문〉2004년 9월 21일.  [본문으로]
  17. 〈크리스챤신문〉1974년 5월 11일.  [본문으로]
  18. 〈교회연합신보〉1980년 8월 17일; 이만열, “한국현대사와 과거청산의 문제,” pp. 288~289. 1980년 5월 31일 초헌법적 기관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설치되었을 때도, 조향록, 정진경 등 일부 기독교 목사와 교수들이 국보위 입법위원과 종교 담당자로 참여하여 신군부의 집권에 일조하였다. 조찬기도회 직후인 8월 27일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체육관선거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본문으로]
  19.  〈교회연합신보〉1981년 5월 24일.  [본문으로]
  20. 〈크리스챤신문〉1974년 2월 9일.  [본문으로]
  21. 이 자리에서 행한 김종필 국무총리의 치사는 다음과 같았다. “오늘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교역자나 신자중의 일부 사람들이 종교인으로서의 본연의 위치와 영역을 벗어나서 정치적인 집단행동에 가담하거나 그러한 행동에 합류하라고 딴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을 본인은 매우 걱정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읍니다.……우리 기독교인도 법 앞에는 평등한 것입니다.……신약성서 로마서 제13장……하나님으로부터 그 권위가 비롯되는 민주정부에 대하여 미워하거나 두려워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곧 악을 행하는 자일 것입니다.……우리 정부가 기독교를 탄압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는 듯합니다. 본인은 그러한 비난은 그릇된 것임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1960년에 6,391개소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작년 초에는 13,417개소에 달하였습니다. 이것은 지난 10년 동안 210%의 증가율을 실현한 것으로서 실로 경이적인 교세의 신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교역자의 수를 보면 같은 기간에 2,962명으로부터 17,562명으로 늘어나 무려 590%의 증가율을 보였으며, 신자 수는 1,324,825명으로부터 3,463,800명으로서 이는 261%의 증가율입니다.……이와 같은 교세신장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종교의 자유가 철저하게 보장되지 않고서도 불과 10년 동안에 그러한 성과를 거둘 수 있겠는지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기독신보〉1974년 11월 16일. “기독실업인회 제2차 전국대회 김종필 국무총리 치사”)  [본문으로]
  22. 〈크리스챤신문〉1974년 11월 23일; 〈기독신보〉1974년 11월 23일;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명,”(1974. 11. 18)《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 한들, 1997, pp. 279~286.  [본문으로]
  23. 〈기독신보〉1974년 11월 30일; 〈크리스챤신문〉1974년 12월 7일.  [본문으로]
  24. DCC와 한국기독교반공연합회는 을지로 2가 구 서울호텔 205호실을 사무실로 같이 사용하기도 했다.(〈기독신보〉1969년 8월 23일, 1974년 12월 7일)  [본문으로]
  25. 〈크리스챤신문〉1974년 12월 7일.  [본문으로]
  26. 유신정권에 의해 자행된 일련의 선교사 추방과 성직자 구속 사태에 맞서 기독교정의구현 전국성직자단은 5월 1일 서울YWCA 강당에서 선교자유와 정의구현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NCC 또한 5월 8일 6개 회원교단 대표자 연석회의를 소집하여 이를 규탄하였다.(〈크리스챤신문〉1975년 5월 10일)  [본문으로]
  27. 〈크리스챤신문〉1975년 8월 2일.  [본문으로]
  28. 〈교회연합신보〉1977년 5월 1일.  [본문으로]
  29. 그는 독실한 침례교 신자였던 카터 미 대통령과의 친분을 앞세워 박정희 대통령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김장환, 《섬기며 사는 기쁨》, 생각의 나무, 2002, pp. 27~55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