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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3기/재난과 교회

재난과 교회 / 이민희

이민희 (옥바라지 선교센터)


위험사회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일찍이 ‘위험사회’를 정의했다. [각주:1] ‘위험’은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재난의 가능성을 의미하며, 미래 가능성으로서 ‘위험’이 현실화되는 사건이 ‘재난’이다. 현대사회에서 위험은 특정 지역이나 집단에 한정되지 않고, 단일 국가나 사회적 집단이 해결할 수 없다. 국가, 계급, 인종을 가로질러 온 인류가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도 못하다. 자원 고갈, 식량과 물 부족, 기후변화 같은 생태학적인 위험, 원자력사고나 생명공학에 의한 사회적인 위험처럼 전 세계는 사실상 이런 초국가적 위험사회이다. 나아가 이미 재난 사회를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징후를 우리는 여러 차례 경험해 안다. 가장 가까운 사례로 지난 몇 년 가혹하게 겪은 팬데믹을 들 수 있다. 매일 언론이 보도하는 전쟁 사망자 수, 어느 대륙에서든 온 산림을 없애버리는 화마, 땅과 바다를 가득 메운 플라스틱. 우리가 당장 직면한 재난 상황을 수습하기도 전, 위험은 다방면에서 연쇄적으로 현실화된다.

우리 현실을 구체적으로 떠올려보자. 세계적 위험에 의한 재난이 닥치는 즉시, 역설적으로 기존 사회구조적 불평등은 이런 재난을 심화시킨다. 국가, 계급, 인종을 넘어 벌어진 재난은 다양한 사회적 집단에 차별적인 효과를 불러오고, 지역과 역사적 맥락의 특수성을 더 도드라지게 드러낸다. 팬데믹 초기, 돌봄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는 한국에서 요양시설과 정신병원에서는 집단 감염이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반지하, 쪽방촌, 고시원 주민 같은 주거취약계층은 여름에는 폭우로, 겨울에는 화재로 목숨을 위협받는다. 농어민은 해수면 상승 및 해수 온도 변화나 산불 등으로 생계 수단을 잃고, 전염병이 돌 때마다 비인간 동물은 고스란히 몰살당한다. 사실상 순수한 자연재해는 없다. 현대에 초국가적으로 벌어지는 재난은 우리가 당면했으나 회피해온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더 큰 문제는 여전히 비슷한 유형의 위험 속에 살고 있지만 원인에 대한 바른 판단이 없기 때문에 대비와 대책이 미뤄진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구조적으로 취약한 위치인 저소득계층 또는 특정 집단의 재난에 대한 취약성은 나아지지 않고 계속 제자리에 머문다.

사회구조적 불평등 외에 자본주의적 시장 원칙이 재난에 끼치는 폐해 역시 지적받아야 한다. 습지와 산 등 자연의 모든 요소를 대상으로 삼는 마구잡이식 민간 개발, 금융 자본의 수익성만 따지는 재개발과 재건축, 삶의 모든 맥락에 걸친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 참사에 대한 대응 마저 건설로 응수하는 게으른 행정가, ‘가난한 이들’을 포기하고 복지를 해체하는 무능력한 정책 입안자의 잘못은 그 자체로 위험 요소이며, 미래 세대는 이 모든 결과를 재난으로 맞이할 것이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는 보편적인 평등권을 파괴했고 각자도생을 부추겼다. 우리는 사랑, 연대, 공존 같은 고귀한 가치를 알고 있음에도 약육강식의 자세를 취한다.

재난이 닥치면 물리적 시스템(교통 및 통신 등의 기반 시설, 각종 재해 시설, 주택 및 주거 환경 등)과 각종 정책 및 제도 등 비물리적인 시스템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 작용은 특정 집단과 지역에 대해 훨씬 불평등하게 작동하고, 피해 당사자의 일상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된다. 가능한 많이 소유해야 좋은 인간인 것처럼 교환가치에 미친 듯이 몰두한 나머지,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내몰리고 쫓기고 죽음을 맞고, 반대로 누구의 소유도 아닌 공간 속 참사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반복적인 죽음의 원인을 개선하고 나은 사회를 위해 법을 제안하면 최고 권위자가 그 최소한의 울타리마저 거부한다.

위험이 지뢰처럼 도사리는 사회, 재난이 일상이 된 사회. 우리 사회가 공동체적 돌봄과 사명을 기대할 수 없는 극단적인 개인주의 사회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가운데 건물, 땅, 돈, 사람 뭐 하나 부족하지 않은 한국 교회는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우리가 할 일은 뭘까?


교회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1:15-17)

교회는 예배 공동체라고 불린다. 우리의 첫째 존재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함, 기쁘게 하는 것이다. 미국의 분석철학자이자 신학 영역에서도 통찰 있는 연구를 해온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그의 저서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에서 그리스도교 예배에 함축된 하나님 이해를 밝힌다. [각주:2] 우리는 전례 시 하나님이 들으시리라는 확신이나 기대를 품고 하나님께 말을 건넨다. 그러나 우리가 일탈적으로 전례에 참여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건네는 말을 들으시거나 듣지 않으실 자유”가 있다. “때때로 하나님은 실제로 듣지 않으신다.”

월터스토프를 따르면 이런 일탈은 우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외의 이유로 전례에 참여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전례가 우리 욕망의 수단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전례 바깥에 있다. 전례를 위해 말과 행동의 표본을 충실하게 따른다 해도, 전례 바깥의 일상에서 한 일이 전례 자체를 “용납할 수 없을 정도의 일탈로 만들 수 있다.” 월터스토프는 구약의 예언자들의 말을 빌려와 하나님이 듣지 않을 만큼 일탈이 되는 바깥의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바로 “일상 속 우상 숭배와 만연한 불의”이다.

자본과 힘이라는 우상이 사회를 지배할 때, 신앙과 상관없이 그 분위기에 순응해 산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자격을 박탈당할 수 있다. 누군가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온몸과 정신으로 겪을 때, 그 신음을 무시하고 연대하지 않으면 우리의 전례는 일탈한다. “일상 속 우상 숭배와 만연한 불의 때문에” 우리가 부르는 노래와 거룩한 회중이 드리는 희생 제사에서 “하나님이 가져가셔야 할 기쁨이 손상된다.” 결국 위험사회, 재난 사회에 한국 교회가 대응하고 참여하는 일은 사회적으로도 져야 할 책임의 일부이지만, 우리 자신의 온전한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미뤄둘 수 없는 과제이다.

월터스토프는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하나님이 누구신지와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고 계신 일과 하실 일을 인정하는, 즉 경외하고 공경하며 감사하고 놀라워하는 경배를 받으시기 합당한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삶”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런 인정의 방식이 예배라고 일컫는다. 우리 예배가, 공동체성이 어떤 시늉이 되지 않으려면 예배의 정신이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거꾸로 예배의 자리에 서기 부끄럼 없도록 삶을 꾸려야 한다. 구약의 예언자는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게 그 삶의 내용을 자세하게 가르쳐준다.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는 삶이다. 바로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정직히 응시하고, 소유 중심의 계획이 망쳐놓은 질서를 재건하고, 가장자리로 몰리고 생존권을 빼앗긴 이들의 자리를 위해 함께 투쟁하는 삶, 위로하고 애도하는 삶, 지난 과거를 상실하지 않고 기억하는 삶, 절망의 징후 앞에서도 인간성을 믿고 소망을 가르치며 기대하는 삶이지 않을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이사야 5:1-2, 7)

건물, 땅, 돈, 사람 뭐 하나 부족하지 않은 한국 교회를 하나님이 본다면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다. 하나님의 바람대로 이제 들포도 대신 좋은 포도를, ‘포학’(미쉬파흐) 대신 ‘정의’(미쉬파트)를, ‘부르짖음’(츠아카) 대신 ‘공의’(츠다카)를 맺을 때도 됐다.


세계 교회

온전한 예배를 위해, 우리는 정의와 공의를 앞세우고 도시 사회 문제에 연대해야 한다. 또 다른 이유로,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동참한다.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를 찾아가야 한다.

장소는 지도 위의 한 점, 단순히 지리적인 위치 이상을 의미한다. 장소는 중립적이거나 무성의 공간이 아니다. 인간은 환경을 대할 때 주어진 배경에 수동적으로 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감각을 동원해 공간을 시각적으로 또는 심미적으로 평가하며 환경에 대응한다. 사람들은 공간에 공동체의 역사와 개인의 이야기를 쌓아 장소로 만든다. 인간의 욕구, 갈망, 과정은 장소를 통해 드러난다.

그래서 장소는 그곳을 경유하는 이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고 관계를 제공한다. 우리는 장소를 기반 삼아 구체적인 감정을 느낀다. 장소 안에서 타자와 어울려 살고 생존의 안정과 안전을 확보한다. 인간 삶과 사회의 본질은 시간적인 조건 못지않게 공간적인 조건에서 발생하고 구축된다. 이를 ‘공간적 선회’(spatial turn)라고 부른다. 최근에는 여기서 더 나아가 ‘공간 정의’(social justice)가 제안된다. [각주:3]

대다수 한국인에게 장소는 곧 도시이다. 모든 사회관계가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곳이자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생활공간이다. 우리 활동과 문화는 적극적으로 도시를 건설한다. 일상의 실천은 도시를 맥락으로 한다. 그래서 도시의 작동 방식은 우리 삶 근저에 자리한 신념을 보여준다. 우리의 욕구는 생존을 넘어 의미와 이야기를 쌓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곳에 뿌리내리려 한다. 신체는 물론 도덕적, 지적, 정신적 삶 전체를 영위할 수 있도록 경관을 인위적으로 변경시키기도 한다.

‘어떤 도시를 만들 것인가’, ‘누가 도시를 구성하는가’의 질문은 다시 ‘무엇이 좋은 도시인가’, ‘누구와 연대할 것인가’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도시화 과정은 그렇게 인간됨의 과정을 드러낸다. 이런 의미에서 도시화 과정 자체를 일종의 종교적 탐구 혹은 실천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질문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간다. 이렇게 도시화 과정이 영성의 발현 통로일 수 있다면 성령은 도시에서 무얼 하실까? 인간에게 공간을 장소화하려는 욕구와 장소감을 섬세하게 느끼려는 열망이 있다면 이런 인간이 닮은 하나님은 도시에 어떤 이야기를 심고 싶으실까? 지금 그리스도는 어디를 향해 가시며 교회는 도시에서 어떤 장소가 될 것인가?

“지금 이곳에 계신 하나님이 도시 공간에서 일하시고 자유를 주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 간단히 말해, 하나님이 장소로 취하시는 곳은 어디인가? 어떻게 장소를 취하시는가? 하나님 이 장소로 취하시는 곳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할까? 성령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거하시는 곳은 어디인가?” [각주:4]

공의와 정의, 생태, 상호의존성, 아름다움 같은 도시의 가치, 도시인의 다양한 정체성, 도시에 대한 권리로 도시화를 이뤄가는 게 중요하다. 더불어 삼위일체가 계신 곳, 그곳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 이런 우리 질문에 한 순교자가 답한다.

“교회는 자신의 공간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해 투쟁할 때에만 자신의 공간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자신의 일을 위해서만 투쟁하는 ‘종교단체’가 될 뿐, 하나님의 교회, 세계의 교회가 되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속하는 사람들의 첫 번째 과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어떤 종교단체를 만들거나 경건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그들을 무장시키십니다.” [각주:5]


옥바라지하는 교회

교회는 위험과 재난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교회는 해결해야 할 당사자를 꾸짖고 책임을 촉구할 수 있다. 도시에 필요한 가치를 모색하고 제안할 수 있다. 위로하고 애도할 수 있다. 함께 울고 싸울 수 있다. 한국 교회는 건물, 땅, 돈, 사람 뭐 하나 부족하지 않은 ‘종교단체’에 머물지 않고, 자본과 힘이라는 감옥에 갇힌 도시와 도시인을 옥바라지할 수 있다. 주님을 신뢰하는 옥바라지로 세상에 평강의 전형典型을 보여주는 자리에 더 많은 교회가 함께 하길 바란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이사야 26:3-5)

  1. 울리히 벡, 《위험사회: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 홍성태 옮김 (새물결, 1997). [본문으로]
  2.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 전례신학탐구》, 이민희 외 옮김 (도서출판100, 2003), 이후 해당 저서 인용. [본문으로]
  3. 에드워드 소자, 《공간과 비판사회 이론》, 이무용 외 옮김 (시각과언어, 1997); 《Seeking Spatial Justice》, Edward Soja,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0. [본문으로]
  4. 일레인 그레이엄, 스티븐 로우, 《무엇이 좋은 도시를 만드는가》, 이민희 옮김 (비아토르, 2023) [본문으로]
  5. 디트리히 본회퍼, 《윤리학》, 손규태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0)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