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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3기/재난과 교회

애도를 넘어 새로운 헌신으로 / 최경환

최경환 (중앙루터교회 전도사, 인문학&신학연구소에라스무스)


생존주의 넘어서기 서바이벌 오디션이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재능과 끼를 펼치는 프로그램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지만, 한국에서는 유독 큰 반응을 얻고 있다. 이제는 서바이벌이라는 장르가 아니고선 음악 프로그램을 접하기 어려울 정도다. 치열한 미션과 경쟁을 뚫고 살아남아야만 승자가 될 수 있는 서바이벌 오디션은 마치 현실을 너무나 리얼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같아 섬뜩하기도 하다. 여기에 더해 한국에서는 모든 프로그램에 서바이벌 형식을 도입했다. 이제는 운동, 요리, 교육, 여행, 연애 등 삶의 모든 영역이 서바이벌이다. 이를 보는 시청자는 삶의 모든 영역이 서바이벌이라 느끼게 된다. 웹툰, 드라마, 예능에서도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끝까지 싸우는 ‘배틀로얄’(battle royale) 장르가 꾸준하게 인기를 얻고 있다. 결국 인생은 각자도생이고, 서바이벌 오디션과 같다는 의식이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이 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게임 속 캐릭터처럼 현실에서도 더 많은 무기를 구비하고 장착해야만 좀비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무도 나를 돌봐주지 않는다는 공포심은 결국 옆에 있는 친구나 이웃을 돌아볼 여유와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공포심은 국가적 재난이나 위기 상황 속에서 더욱 절박해지는데, 코로나19 사태와 이태원 참사를 지나면서 이제 사람들은 ‘상시적 재난’, ‘상시적 비상사태’라는 일상을 경험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 닥칠지 모르는 위험에 항상 경계 태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최근 몇 년간 한국사회가 경험했던 대형 재난들, 예를 들어 대구 지하철 화재,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에서 시민들은 국가의 부재를 경험했고, 결국 스스로 잘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인 체화했다. 재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고 같이 살자는 의지는 조금만 버티면 국가가 구해줄 거라는 무언의 안정감이 있을 때나 가능하다. 정부가 우왕좌왕하거나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할 때, 시민들의 선한 의지와 협력은 고통의 상황을 극복하기는 커녕 각자도생의 잔혹함으로 쉽게 전환된다. 때론 사회적 약자에게 더 가혹하게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고, 이들을 희생양 삼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이들도 있다. 위기 상황일수록 국가와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제 더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공공성은 단순히 소유 주체가 국가일 수 없다. 공적 가치를 구현하고 절차적 의사결정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노력과 연대가 필요하다. 문제는 점점 더 각자도생의 생존게임으로 내몰린 개인이 어떻게 시민적 연대와 강한 민주주의를 열망할 수 있냐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개인의 생존과 안녕을 넘어 함께 잘 사는 사회, 개인의 품위와 존엄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도시, 나아가 안전한 국가를 만들수 있을까?


부서져 열린 마음

사랑하는 사람, 좋아했던 물건, 오랜 시간 머물렀던 직장, 마음속에 품었던 오랜 꿈, 우리가 사랑하는 어떤 것을 상실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슬픔과 비통함이 어떨지 경험해 본 사람은 잘 알것이다. 실패, 상실, 애통, 비통의 감정은 내가 쏟은 애정의 크기만큼 크다. 그런데 이런 비통함은 단지 개인적 경험에서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사람들은 함께 힘을 모아 이룬 가치나 이념, 공동의 경험과 사연을 상실했을 때에도 동일한 감정을 느낀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희생했던 시민들의 헌신과 노력이 바로 그런 것들 중 하나다. 촛불 혁명으로 이룬 대통령 탄핵 역시 시민들의 열정과 열망이 이룬 민주주의의 소중한 열매였다. 시민들의 힘으로 이룬 민주주의라는 무형의 가치는 어느 순간 시민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시민종교가 되었다. 그런데 그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사람들은 깊은 상실과 비통함을 느낀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사람들이 느꼈던 충격과 울분 가운데 하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이것밖에 안되는 거였나?’하는 당혹감이었다. 시민들은 국가적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고, 개개인의 심상에도 큰 상처를 입었다. 우리가 함께 만든 국가의 시스템과 민주적 가치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온 국민이 공적 분노와 함께 공적 슬픔을 함께 경험했다.

오래전 토크빌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마음의 습관’(habit of the heart)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지 않는다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실패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충동은 다름 아닌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마음의 습관이란 경험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면서 사람들의 내면에 형성된 내적인 힘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파커 파머는 이 마음의 습관이 “마음이 부서지는 경험을 통해 증폭되고 분출”된다고 말한다.[각주:1] 공적 슬픔으로 인해 비통함을 느낀 사람들이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거나 죽음의 자리로 내몰리지 않고 새로운 희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올까? 파머는 고통으로 인해 부서진 마음이 때로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전환되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운동하지 않은 마음은 좌절이나 분노로 폭발할 것이다. 특별히 긴장된 상황에서라면 폭발하는 마음은 그 고통의 원천을 향해 폭탄 파편처럼 던져질 수 있다. 그러나 고통에 의식적으로 맞닥뜨리면서 마음을 일관성 있게 운동시켜왔다면 부서져 흩어지는 대신 부서져 열릴 가능성이 크다. 그러한 마음은 긴장을 잘 끌어안아 고통과 기쁨 모두가 확장되도록 근육을 사용할 줄 안다. [각주:2]


여기서 말하는 ‘마음의 근육’은 평소 낯선 사람들과 생각을 조율하고 갈등을 기꺼이 끌어안으려고 하는 강인한 마음을 일컫는다. 또한 위험하고 위급한 상황에서도 시민들이 함께 사회의 중요한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는 희망과 역량을 말한다. 서로를 의지하고 세워 줄 수 있다는 강한 시민의식이야말로 민주주의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토대가 된다.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과 함께 뒹굴고 부대끼며 사는 것은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초석이 되고, 결국에는 공공선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된다. 이 모든 자부심, 신뢰, 믿음의 근원은 바로 ‘마음’이다. 이 마음은 동의(agree)보다 공감(sympathy)을 요청하고, 합의(consensus)보다는 연대(solidarity)를 배양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비통한 사건이 고통이나 좌절, 분노로 이어지지 않고, 새로운 희망과 연대로 승화될 수 있을까? 그 전환의 고리를 마사 누스바움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정치적으로 전유할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애도와 새로운 헌신

누스바움에 따르면 그리스 사람들은 비극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감각을 키웠다. 사람들은 비극을 통해 공적 슬픔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비극은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장치였고, 그리스 사람들은 이를 통해 민주주의를 내적으로 학습할 수 있었다.[각주:3]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비극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린 아이들이 보는 만화 영화나 동화에서도 상실을 통한 애통함은 자주 등장하는 감정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사랑하는 대상을 잃는다든가, 가까운 부모나 친구와 이별을 하게 될 때, 아이들은 동정심, 즉 다른 사람의 불행에 감응하는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일종에 예방 주사를 맞는 것과 같다. 나중에 실제로 타인의 고통이나 사회적 비극을 경험할 때, 어떤 방식으로 공감할 수 있는지 미리 배우는 것이다.

누스바움은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소개하면서 어떻게 애도의 감정이 화해로 나아갈 수 있었는지 소개한다. 링컨은 남북전쟁으로 인해 죽은 장병들을 애도하며 시민들이 경험한 깊은 상처를 어루만져 준다. 그는 죽음 그 자체를 미화하거나 성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다만 남아 있는 자들이 해야 할 일, 그들이 무엇에 헌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남은 자들이 할 일은 “자유의 새로운 탄생”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다.

링컨의 연설은 전몰장병의 비극에 경의를 표하면서, 그 비극을 ‘품위 있는 국가의 상처 입기 쉬움’에 대한 메타포로 사용한다. 국가는 그의 연설을 듣는 이들이 기꺼이 위험을 무릅쓸 각오를 할 때에만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청중을 전몰장병의 희생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이끌고 애도를 표현하면서도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미래의 투쟁에 참가하도록 이끈다. 당시 이 연설은 많은 청중에게 승리와 화해를 위한 일에 동참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다.[각주:4]


전쟁의 상흔이 너무나 크고 아프다고 하지만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하는 소중한 가치보다 크진 않다. 이기심, 두려움, 무기력이라는 감정으로 사람들이 함께 만든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잃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링컨은 비극과 슬픔이라는 감정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근원적 마음의 정동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미국인들이 국가의 상처를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독려하고 건설적인 일에 헌신하도록 이끌었다. 즉 전쟁이라는 비극을 통해 다시 새로운 사회와 국가를 건설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사유와 실천을 이끌어 낸 것이다. 결국 누스바움은 정치에서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존엄하고 품위 있는 사회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공감을 통해 가능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는 사랑의 감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가 다음 단계로 한 단계 더 전진하고, 새로운 시스템이 구축되는 시점들은 대부분 사회적 참사가 휩쓸고 간 이후였다. 재난과 참사를 겪고 난 이후 시민들은 이전보다 더 안전한 사회와 제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사랑하는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님을 통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위험한 건설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아버지로 인해,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고장난 스크린도어를 고치던 청년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부서진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다. 시민들의 애도가 새로운 헌신으로 전환되고, 더 나아가 새로운 사회를 이루려는 열망으로 응집될 때 우리는 결과적으로 모두가 안전한 국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죽음 앞에선 종교의 역할

전통적으로 종교는 생명과 죽음을 다루는 집단이다. 인간의 생애 주기에 따라 의례를 거행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삶의 안정감을 제공하고 더 영원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특별히 개인의 사사로운 죽음뿐 아니라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참사가 일어날 때, 종교가 이들을 위로하고 추모하는 의례는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짐 월리스는 기독교가 공동선에 헌신하고 공적 가치를 추구하려면 ‘국가의 영혼’을 돌보고 위로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쟁 참전 용사들을 위한 추모제라든가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돌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엔 애국주의를 부추기는 것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위로하느냐에 따라 종교는 사람들의 부서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새로운 비전과 헌신으로 이끌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희생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은 대중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예를 들어 박진규는 세월호 참사 당시 JTBC에서 손석희는 세속 사제의 역할을 했다고 분석한다.[각주:5] 사고 당일 JTBC 기자가 생존 학생과의 인터뷰에서 실수를 하자, 손석희는 진심 어린 사과를 통해 진정성을 보여주었다. 사고 희생자의 생존 확률이 희박하다는 전문가의 의견에 10초간 침묵하며 울음을 꾹 참았던 모습 속에서 대중은 깊은 공감을 얻었다. 위기나 재난 같은 극적인 상황에서 대중은 슬픔을 깊이 공감할 줄 아는 종교인을 기다린다. 어수선한 마음을 정돈할 수 있는 의례, 상처 받은 이들의 마음을 다독일 줄 아는 사제, 고난의 의미를 해석해 줄 수 있는 설명을 기대한다.

그렇다면 재난과 참사 앞에서 기독교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먼저 현재 상황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함께 희생자에 대한 깊은 애도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유가족들이나 사회적 참사로 인해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중하고 진정성 있는 애도의 언어다. 성서에 비추어 죽음의 맥락과 배경을 설명한다든지, 슬픔의 상황을 위로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의해야 할 점은 재난과 참사 혹은 개인의 죽음에 대한 신학적 해명에 몰두한 나머지 위로의 메시지가 기독교 신앙의 변증으로 전락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또한 부활의 소망이라든가 최후 승리를 너무 빨리 언급한 것 역시 조심해야 한다. 상실의 고통속에 있는 이들에게 성급하게 부활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고, 실제로 값싼 은혜로 오해를 받을 수 있다.

기독교는 생명과 죽음을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취급하는 집단이다. 정치적인 성향이나 당파적 입장을 떠나 국가적 참사나 재난의 희생자를 애도하고, 그들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는 행위는 종교 본연의 역할이자 기능이다. 설교자의 진심어린 설교가 사람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세월호의 희생자가가 되었든, 천안함 유공자가 되었든 정치인들이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 할 때, 종교는 진심어린 애도와 공감으로 희생자들과 그의 가족들을 위로할 수 있다. 또한 사회적 아픔을 치유할 수도 있다. 생명과 죽음을 수단화하지 않고 그 자체로 슬픔을 공유한다면 이는 그 어떤 정치설교보다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1. 파커 J. 파머,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김찬호 역 (서울: 글항아리, 2012), 66. [본문으로]
  2. 파커 J. 파머,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115-116. [본문으로]
  3. 마사 누스바움, 정치적 감정: 정의를 위해 왜 사랑이 중요한가, 박용준 역 (서울: 글항아리, 2019), 409-410. [본문으로]
  4. 마사 누스바움, 정치적 감정: 정의를 위해 왜 사랑이 중요한가, 434. [본문으로]
  5. 박진규, 『미디어, 종교로 상상하다』(서울: 컬처룩, 2023), 8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