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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3기/영화「서울의 봄」

이긴 자들이 판치는 세상 / 남기평

 

남기평 (NCCK 화해통일위원회 간사)

“그 이왕이면 혁명이라는 멋진 단어를 쓰십쇼!”

2시간 20분 보는 내내 지겨웠다. 그리고 재미가 없었다. 그리고 불편했다. 당장이라도 영화관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왜 <서울의 봄>에 열광하고, 2030대가 재차, 삼차 관람하는 이유를 당최 잘 모르겠다. 왜 그렇게 불편했는지, 굳이 이유를 따져보면, 영화의 런닝타임 내내, 그 결말을 아는 게 힘들었는지, 아니면 내가 사는 지구의 현실과 지극히도 닮아 있어서 그런지, 또 아니면 45년이 지난 2024년인 현재도 ‘이왕이면 혁명’세력들의 계승자들이 변하지 않고 이 놈의 정치판을 흔들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유 아닌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 1212 군사 반란은 어설펐다. 슬프게도, 어설픈 세력이 더 어설픈 세력을 몰아냈다. 그래서 이 반란은 막을 수 있었고, 516 군사 반란과 같은 비극적인 역사를 재(再)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긴 군부독재의 터널을 지나 서울의 봄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회를 비롯한 특정 몇 명의 이너서클에게만 봄이 찾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80년 5월 18일 눈뜨고 믿지 못할 대(大)참극이 벌어졌다. 그렇게 7년을 넘게 싸우고 또 싸워야 했다. 이긴 자들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그리고 오늘날까지 100년을 넘게 그렇게 해왔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불편했고, 지극히 개인적으로 재미없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45년 전이나 2024년 지금도 변하지 않는 세상이어서 싫었다.

그게 될 거라고 믿었습니까?
뭐 어디가서 점이라도 봤어요? 응? 
밖에 나가 보세요. 바뀐 거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은 그대로야!

베이비붐 세대들과 이들과 얼마 차이나지 않는 세대들은, 박정희, 전두환이 집권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이들을 찬양하고, 그때가 좋았다고들 한다. 그렇다고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지만 말이다. 이 시절은 야만의 시절, 폭력이 난무하던 시절, 힘이 있으면 모든 게 되는 시절, “우리가 남이가”로 프리패스가 되는 시절, 법과 제도가 있지만 사돈의 팔촌을 들먹이면 편의를 봐주던 시절, 지인찬스가 원칙보다는 중요했던 시절, 뇌물이 통하던 시절, 기업체나 관공서에 특채와 내리꽂기 만연했던 시절, 능력과 내용보다는 무능하더라도 이너서클에서 충성이 더 중요했던 시절을 좋았다고 한다. 아이러니다. 그래서 거들먹거리기 좋은 “라떼는…” MZ들에게 좋은 상품으로 팔리지 않는다. 

1212를 겪지 못한 MZ들은, 반면 2016년 촛불혁명을 경험했다. “이왕이면 혁명이라는 멋진 단어를” 쓴 그 뿌리의 세력을 국민들이 온 염원을 모아서 끌어내렸다.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한복판에 우리들이 있었다. 그런데 영화 런닝타임 내내 내 귓가에서 벗어나지 않은 대사가 있었다. “밖에 나가 보세요. 바뀐 거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은 그대로야!” 

거 어디 기자요?
대한민국이 뭐 이때까지 민주주의 안하고 살았습니까?

19701113-19870610-20140416-20181210-20221029…

전태일, 이한열, 세월호, 김용균, 이태원… 여기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반복되는 비극을 바라볼 뿐, 비극을 이용할 뿐, 이를 양당들은 정쟁화할 뿐, 또한 이데올로기로 삼아 이너서클의 이익으로만 삼을 뿐,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책임지지 않는다. 책임을 지는 순간, 패배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죽어도 책임을 지지 않은 것이다. 곧 죽어도 인정하지 않는다. 폭탄 돌리기 이제 익숙하다. 

'Democracy'(민주주의)는 ‘demos(데모스)’와 'kratos(크라토스)'에서 유래되었다. 데모스는 인민(the people)과 다수(majority)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크라토스는 권력(power)와 지배(rule)라는 뜻을 지닌다. 즉, 민주주의는 ‘다수 혹은 인민에 의한 지배’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를 제외하고는, '민주주의(Democracy)' 단어, 그 본뜻대로 적용된 ‘다수 혹은 인민에 의한 지배’를 경험한 적이 없다. 지금까지 근현대사 대부분을 독재와 군부독재였고, 거대여당의 횡포였고, 거대야당의 횡포였고, 진보당을 배제시키는 방식만을 경험했다. 대한민국 정치가 참신한 무엇을 데모스들에게 선물한 적이 없다. 그래도 촛불혁명이라는 유산을 경험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묻고 싶다. 그때 그 시절 도대체 무엇이 왜 좋았는가?

한국교회를 이야기 안 할 수가 없겠다. 지금도 많은 교회의 운영이 그렇지만, 담임목사 혹은 특정 한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했다. 교회나 교단 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시스템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목사 한 개인의 카리스마를 억누를 교회나 교단의 시스템은 없다. 민주주의를 안 한 적도 없지만, 제대로 한 적도 없다. 앞다투어 교리와 장정이나 교단법을 제정하고 수정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이긴 자들이 더 판치는 그들만의 리그만을 공고히 할 뿐이다. 데모스를 위한 정치, 신앙생활의 여건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교회 교인들은 이를 경험한 적이 없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예수의 뜻을 실천하고,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수의 공생애 기간,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고, 혐오하지 않으셨다. 단, 성전 지도자들,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을 비판하고 그들의 잘못을 꾸짖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꿈꿨다. 하나님 나라의 자리에는 이긴 자들이 판치는 세상이 아니다.

그럼 이리 와서 앉아 자네 자리라고 생각하고(어깨를 잡으며)
자, 이제부터 자네는 나. 나는... 바로 자네고.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욕망이 투영된다. 욕망이 투영되면 투영될수록 모든 이들이 경쟁자이다. 동료의식보다는 경쟁자라는 관계 자체가 우리의 시스템에 이롭다. 박정희의 통치 방식이 그랬고, 하나회가 그랬고,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 전체가 그렇다. 일인자가 되려고 하는 그 욕망, 일인자가 되지 못한다면, 이긴 자가 판치는 세상에서 플레이어라도 되고 싶은 욕망, 더 나아가 이런 욕망을 누구보다 잘 표현하고 구현할 수 있다는 분신이라도 되고 싶은 욕망은 여전히 유효하고 먹힌다. 그래서 대한민국 절반의 대중들은 이긴 자들을 변호하고, 너무도 쉽게 지지한다. 그들이 내가 되고, 내가 바로 그들이 된다. 속아도 괜찮고, 거짓말해도 괜찮다. 이긴 자가 판치는 세상이면 된다. 그 외에는 관심이 없다. 

이긴 자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패배자가 되지 않기를 발버둥친다. 싸움에 응전했을 때, 승패가 나뉜다. 그럼에도 제일 좋은 것은 이기는 편에 줄을 서는 것이고, 이마저도 힘들면, 어느 편에도 들어가지 않고, 방관하면 된다. 방관은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보다 낫다. ‘나대는 것’보다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게 낫다. 극 중 졌잘싸 이태신은 최선을 다했다. 적어도 관객들은 이태신을 응원했을 터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긴 자들이 판치는 세상이고, 40년이 지나서야, 그들의 진심을 알아주었다. 그것도 가해자들의 사과가 아닌, 역사적 사실을 각색한 필름을 통해서 말이다. 아쉬운 일이다. 매번 이렇다. 4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40년 동안 이긴 자들이 잘 먹고 잘살고, 이미 때깔 좋은 죽음을 맞이했다. 이런 사회에서 누가 어떻게 정의를 위해, 평화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보편적 가치를 위해 헌신하고 싸우라고 할 수 있을까?

제군들, 여기까지다. 고생들 많았다. 너희들... 
대한민국에서 가장 무능한 사령관 모시느라 애들 썼다. 
사령관으로서 너희에게... 마지막 부탁 하나 하자. 
절대 날 따라오지 마라.

아이러니다. 전두광은 사람을 모으고, 욕망을 보여주고, 청사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태신은 다르다. 따라오지 말라고 명령한다. 욕망이 가득한 곳에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이는 교회라고 다를 바 없다. 교단이라고 다를 바 없다. 시민단체라고 다를 바 없다. 적어도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한다. 예수님의 마지막 40일, 아니 마지막 일주일 생각한다. 그 길은 누구도 따라가지 않았다. 십자가 사건 이후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의 길을 따라갔을 뿐이다. 

이태신은 철조망을 거치고 바리게이트를 하나씩 하나씩 넘는다. 그 길은 외로운 길이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외로운 길이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우리는 바위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인 계란을 기억할 것이다. 이긴 자가 판치는 세상에 이것도 길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부셔져도, 깨져도 의미가 있음을 보여줬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기는 자들만 사는 세상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네 교회는 이긴 자들만 이 세상에 대접받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고 선포한다. 기복신앙은 개인 신앙생활의 노력에 따라, 헌신여부 따라 달라진다고 본다. 결국 이긴 자들의 이너서클에 들어가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강요한다. 모든 설교가 일률적이고 방점이 바로 ‘승리’이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이긴 자들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병들게 했다. 그리고 우울하게 만들었다. 

나는 너희가 너희의 선택으로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지금이라도 총을 내려놓길 바란다.

군대는 상관의 명령에 복종한다. 대부분의 병사는 자신의 소속이나 내편을 선택할 선택권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태신은 이들에게 선택할 기회가 있다고 말한다. 대한민국 사회도 무언의 압박처럼 젊은 세대들에게 선택할 권리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더 나아가 실패할 여유조차 그리고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다. 간부급이 아닌 이상 총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사실상 죽음을 의미했다. 그 대오에 벗어나는 순간, 평생 괴롭힘으로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선택에 대한 후회는 덜 했을 것이리라. 자신의 선택을 자신이 존중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는 각자의 선택 특히 선을 향한 선택은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이기는 방식, 이겨야 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고 빼앗고, 틀어쥐어야지만 오히려 존중받을 수 있다. 그리고 다 가져야지만, 이기는 것이다. 그렇게 2024년 오늘날도 이기는 자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안타깝지만, 우리의 이태신은 오늘도 패배를 알면서 바리게이트를 하나씩 하나씩 넘을 것이다. 

45년 전 1212, 45년 후 2024년, 어떠한 선택은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이긴 자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야 도희철 일루와,
앞으로, 와 이스끼야, 총잡아!
니가 가기 싫으모.
내 심장에다가 팍 쏴 삐라. 쏘라고!!

이때 쐈어야 했을까? 이때밖에 없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