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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3기/영화「서울의 봄」

봄 길목에 도사린 한파를 넘어 / 이훈삼

 

 

이훈삼 (NCCK 신학위원회 부위원장, 주민교회)



40여 년 전, 이 땅을 뜨겁게 달구었던 민주화의 열기와 그 갈망을 차갑게 군홧발로 짓밟은 쓰라린 이야기가 스크린을 통해 우리 앞에 나타났다. 5.16 군사반란 이후 우리는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박정희 군부 독재 아래서 신음하였다. 권력은 오래되면 썩기 마련이지만 그 썩음은 단순한 부패에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잔인한 고통으로 다가온다. 박정희 군부 정권의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이 1972년 통과됨으로써 민주주의는 다시 일어설 기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생각할 수도 없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 독재 권력의 오른팔인 중앙정보부장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를 사살한 것이다. 최고위 권력 내부 암투의 결과로 우리는 뜻하지 않게 겨울을 끝장내고 봄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그렇게 역사가 염원하던 민주주의가 우리 코앞에 바짝 다가왔을 때, 독재자가 뿌려놓은 독버섯들이 고개를 쳐들고 20년 전과 똑같은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박정희의 국군 내 사조직 하나회와 그 핵심 전두환의 악행이 발생한 것이다.

영화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암살부터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직접 원인이 된 1980년 5.17 전국 계엄령 선포까지를 가리키던 ‘서울의 봄’을 빌려와서,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일당의 군사 반란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집중적으로 긴박하게 다루고 있다. 영화의 주 모티프인 12.12 군사 반란은 한국 현대사에서 ‘봄’을 강탈했고, 우리를 또다시 독재의 길고 긴 ‘겨울’에 들어서게 했다. 1980년대 5공화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고 시대는 절망했고 국민은 폭력을 견뎌내야 했다. 박정희 독재의 모순 끝에서 우리가 만난 것은 봄의 생기가 아니라 무거운 침묵과 가라앉은 청춘이었다. 

한 편의 영화가 40여 년 전 우리의 무거운 시대와 공기를 소환했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의 가슴에는 아쉬운 탄식이, 입술에는 분노의 욕설이 그리고 눈에는 슬픔이 흘러내린다. 우리 시대를 짓밟은 군사반란이 아주 치밀하게 준비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얼마든지 반란을 막아낼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정부와 군은 우세한 조직과 명분과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반란군에게 무릎 꿇고 말았다. 그것이 가져온 역사의 후퇴와 그것 때문에 고통당하고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이 있었기에 아쉽다.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나라의 운명과 국민의 안전 따위는 고려하지 않은 반란군의 파렴치함과 반란 성공 이후 그들이 누린 부귀와 영화에 분노한다. 아직도 역사의 죄인들은 아주 떳떳하며, 불의한 권력으로 강탈한 부는 자식들에게 대물림하고 있다. 불의한 자들의 득세에 분노한다. 불의한 영화(榮華)의 반대편에는 양심적 군인과 공무원의 고통과 희생 그리고 이후 그들의 가족이 겪은 비극적 삶이 초라하게 놓여 있어 슬프다. 정의가 불의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한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슬프다. 

이 영화를 우리 국민 1,300만 명 가까이 보았다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그중에서도 이런 과거사를 모르는 젊은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우리 현대사에 관심 두게 되었다니 다행스럽다. 지금이라도 묻힌 진실을 밝혀서 악을 단죄하고 선한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합당하게 배상해야 한다. 40년 동안 이어진 역사 왜곡을 바로잡고 조금이라도 정의를 회복하는 것이 민주사회의 자세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악이 재발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식·행정·자본 등 힘이 여럿이지만 원시적이고 최종적인 힘은 완력이다. 군대는 사회적 완력이다. 무기를 움직이는 군대가 그릇된 생각을 지닌다면 사회는 엄청난 불행을 겪는다. 우리는 지난 역사를 통해 이 같은 불행을 두 번이나 쓰라리게 경험했다. 그러기에 힘을 지닌 군대를 제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1992년 김영삼 정부가 곧바로 하나회를 해체한 일은 뛰어난 업적이다. 동시에 군인이 힘을 남용하지 않도록 바른 가치관을 유지하는 일에도 관심해야 한다. 군인을 존중하면서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군인의 사명에 철저한 자부심으로 일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떠나지 않는 생각 하나는 반란이 그렇게 치밀하게 준비된 것은 아니었고 여러 번 좌초할 뻔했었는데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악은 언제 어디서나 튀어나오며 선은 그 악의 움직임에 대비하고 투쟁해야 할 운명이다. 우리가 선이라면 선 자체인 것으로 악에 대한 승리를 보장받지는 못한다. 그래서 역사의 실패를 통해서도 교훈을 얻어야 한다. 악(전두환)은 어떻게 위기를 돌파했을까?

첫째, 전두환은 목숨을 걸었다. 실제로 군사 반란에 실패하면 죽는다. 악은 우리 앞에 이런 자세로 돌진한다. 죽기 살기로 달려든다. 그에 반해 악을 대항하는 선의 자세는 너무 안일하다. 안일함과 느슨함은 우세한 법과 장비를 갖추고 있어도 악을 이길 수 없다. 악이 목숨을 걸듯이 선도 목숨을 거는 결연함으로 대응해야 한다. 

둘째,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과 합동수사본부장의 권력을 이용해 군과 민의 모든 통신을 도청하여 상대방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정보의 취합과 분석을 통해 현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선과 악의 투쟁은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판가름한다. 선은 악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 선이 악을 피상적으로만 파악하고 대응하면 악을 극복하기 어렵다. 악은 우리를 치밀하게 연구해서 적절하게 대응하는데 우리는 악에 대해 대충 분석하면 이길 수 없다. 철저하고 깊게 연구하여 예측하고 대응해야 한다. 

셋째, 객관적 판세는 반란군이 열세임에도 대세를 잡았다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군사반란의 시기에 일반 군인이 어느 편에 서느냐는 이후 자기 앞길과 관련되고, 심하면 생사를 가름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은 대세가 어느 쪽인지를 가늠하면서 처신한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선이 대세인 사회다. 선하게 사는 것이 자연스럽고 상식인 세상, 악하게 사는 삶이 부끄럽고 부자연스러운 세상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다. 악이 대세가 되면 우리는 너무 비참해진다. 하나님 나라는 선이 충만한 세상이다. 

넷째, 전두환은 너무 악하고 밉지만, 악의 대장다운 인물이었다. 그는 전세가 위기에 몰리고, 반란군 지휘부조차 두려워하고 혼란에 빠질 때마다, 반란의 성공을 독려하고 모든 수단과 방법과 인맥을 동원해서 위기를 돌파했다. 때론 일대일 담판으로 상황을 반전시키고, 반란군을 결속시켰다. 악인이지만 전두환의 지도력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 나라’라는 선은 이것을 가로막는 악을 극복해야만 가능하다. 선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은 도덕적 명분이나 당위성만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선은 악을 이겨야만 한다. 삶과 역사는 그런 점에서 선과 악의 투쟁 장(場)이다. 목숨을 건 투쟁의 장에서 악도 이럴진대 선인 우리가 악인보다야 더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