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건과 신학 3기/4월의 꽃, 총선

그리스도인으로서 선거 참여와 정치 참여 / 한석문

 

 

한석문 (NCCK 신학위원회 부위원장, 해운대감리교회)

들어가는 말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약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봄의 꽃샘바람이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를 만나 한층 상기된 느낌이다. 거리는 선거 구호로 달궈지고 여론조사 기관의 발표에 따라 정당 간 후보 간 희비가 엇갈리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22대 총선 기독인선언 연대’에서는 ‘2024년 총선에 임하는 그리스도인 선언’을 통해 ‘기후정의와 생태문명, 남북관계 개선을 통한 전쟁 억제 및 평화 구축, 검찰개혁, 선거제도 개선, 지방분권 및 지방자치 강화, 정치개혁, 경제정의 강화 및 경제적 불평등 해소’ 등 지난 2년간 윤석열 정부에서 퇴행해 온 정책들이 총선을 기해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도록 선거에 힘을 모을 것을 촉구하였다. 하지만 이런 선언 등을 포함해 교회의 정치참여에 대한 찬반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꾸준히 반복되어 왔었다. 신앙과 정치, 교회와 국가의 관계성 문제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신학적, 신앙적 가치판단과 냉철한 상황인식을 요구하기에 이 찬반논쟁은 해묵은 것일 수밖에 없었다.


교회의 정치 참여에 대한 두 노선

   사실 교회의 정치참여 사안은 우리나라에서 화두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유럽 등지에서 꽤 중요한 신학적, 신앙적 담론이었으며, 교회는 각 시대 안에서 이 문제에 대한 두 가지 신학적 입장을 발전시켜 왔다. 중세 교황권의 성립 이후부터 기독교 국가의 중요한 딜레마는 교회와 통치자,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독일에서는 루터파의 ‘두 왕국 이론’과 개혁파의 ‘그리스도 왕권이론’이 맞섰으며, 이 양대 이론은 나치의 독재를 바라보는 독일 개신교의 상반된 태도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반면 1560년 종교개혁을 성취한 스코틀랜드 국교회는 1580년 안드류 멜빌(Andrew Melville)과 그의 조카 제인스 멜빌(James Melville)이 제시한 두 왕국 이론을 받아들임으로서 정치권력과 교회의 관계를 매듭지었다. “국가와 교회 이 두 왕국은 엄격히 분리되며 각자의 고유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 세속 군주는 국가의 통치를 담당하지만 교회는 그의 통치 영역 밖에 존재한다.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통치되는 또 다른 왕국이므로 세속 권력이 절대로 간섭할 수 없고, 하나님이 임명한 성직자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 [각주:1]는 것이었다.

   루터나 루터파 전통은 ‘두 왕국 이론(Zwei-Reiche-Lehre)’을 통해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조명했었는데, 루터파의 법학자인 요한네스 헤켈(Johannes Heckel)이 ‘두 왕국 교리의 미로(Irrgarten der Zwei-Reiche-Lehre)’라고 모호하게 표현한 것에서 보듯이 ‘교회와 국가’ 혹은 ‘교회와 정치’의 관계는 늘 모호했으며,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그 혼란이 더 심화되기도 하였다. 서독의 루터주의자들은 이 두 왕국 이론을 기반으로 정치적 보수주의 노선을 지지하는가 하면, 동독의 루터주의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 이론을 근거로 국가사회주의를 옹호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이론은 독일의 일부 루터주의자들에 의해 제3제국 시대의 히틀러에 대한 호의를 보이는 중립적 태도의 기반으로 이용된 예도 있으며, 노르웨이 주교 베르그그라프는 반대로 나치 폭정에 저항하라는 호소에 이 이론을 적용하기도 하였다.[각주:2] 루터 역시 교회와 세속권력의 종합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와 부정적인 견해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정치적 권위와 영적 권위의 기원을 두 왕국 이론을 통해 설명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두 왕국을 세우셨는데, 그의 오른편에는 그리스도의 왕국, 왼편에는 세상의 왕국이 있으며, 인간은 신앙인으로는 ‘그리스도인(Christ-Person)’이 되고 행위로는 ‘세계인(WeltPerson)’이 된다. 그에 따르면 두 왕국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질서에 따라 세운 것이며, 그것은 곧 세상을 통치하기 위한 하나님의 두 가지 방식이라는 것이다. 루터의 이 두 왕국 이론의 핵심은 하나님의 이중적 행정방식 즉 오른편과 왼편이 상호보완하며 ‘지배영역’을 가진다는 것이다.[각주:3] 하지만 루터는 세상 왕국보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우선한다. 만약 정치적 권위를 가진 자가 불의를 일삼고 독재를 행할 때는 저항을 통해 직무의 본래적 자리를 회복하도록 해야 하는데, 이 때의 저항 역시 하나님께 대한 복종으로서의 저항이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 제16항은 이렇게 말한다. “복음은 정치와 경제를 폐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의 질서체제로 최대한 보존하며, 그곳에서 사랑을 구현하도록 촉구한다.” 즉 복음은 이 세상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존하는 질서를 ‘하나님의 질서’로 보존하고 그 가운데서 사랑을 실천하도록 권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질서는 국가, 경제 그리고 가정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질서 곧 유지의 질서이다. 신앙은 그 속에서 사랑을 통해 공헌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 왕국의 정치, 경제, 가정에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살아가야 한다. 루터에게 있어 신앙과 정치의 관계는 윤리의 문제가 아닌 교의학의 문제였다. 그리스도인은 참 신앙의 본질을 깨달은 이후에만 정치 문제에 관여할 수 있었다. 

   개혁파의 전통으로 알려져 있는 ‘그리스도 왕권이론(Königsherrschaft-Christ-Lehre)’이 ‘칼뱅주의적’이라고 불리는 것은 칼뱅이 제네바에서 ‘신정정치(theocracy)’를 했다는 이유에서이다. 신정정치는 종교적 역할을 맡은 사람이 통치를 하거나 통치자가 되는 경우이다. 실제 칼뱅은 제네바에서 시(市) 정부의 노회에 대한 간섭을 배제하는 반면, 노회는 적극적으로 시 정부에 올바른 시정을 건의할 수 있다고 보았고 실제로 그렇게 행하였다.[각주:4] 그는 신앙과 정치, 교회와 국가를 각기 독립된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본 점에서는 루터와 입장을 같이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제자직이 정치를 주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즉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국가라는 두 상이한 세계에 동시적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의 여러 상황 속에서도 하나의 총괄적인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산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그리스도 왕권이론’을 오늘날의 이론으로 정립하도록 기반을 제공한 것은 칼 바르트의 신학과 히틀러시대 독일 고백교회의 투쟁이었다. 당시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노동당(NSDAP)’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독일 그리스도인 연맹’에 저항하기 위해 1934년 5월 발표된 고백교회의 ‘바르멘 신학선언’과 그 기반이 되었던 ‘그리스도 왕권이론’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 공적 책임과 정치 참여를 가장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소명과 현실정치 참여

   18세기 영국의 복음주의 정치인들이 주도한 노예무역 폐지 운동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시 선한 목적을 위해 의기투합한 그리스도인들을 ‘클레펌 공동체(Clapham sect)’라고 불렀는데, 클레펌의 주임 사제였던 존 벤(John Venn), 동인도회사의 주역이었던 챨스 그랜트(Charles Grant), 하원의원이었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와 윌리엄 스미스(William Smith), 장로교 목사의 아들이었던 멕콜리(Zachary Macaulay) 등이 클레펌의 중심인물이다. 그리스도인이요 정치인들이 주축인 이 공동체가 이룬 가장 고귀한 헌신은 노예무역의 폐지였다. 이 일은 윌리엄 윌버포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당시 그가 출석하던 교회의 목사인 존 뉴톤(John Newton, 1725-1807)은 한 때 노예선의 선장이었으나 회개하고 1764년 목사가 된 후 노예제도 폐지에도 관여한 인물이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하원에서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법률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일생의 소명인 ‘묶인 자(노예)에게 자유(해방)을 선포하는’(눅 4:18) 길고도 험난한 싸움이었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등하게 피조 되었고 그 어떤 이유로도 인간이 인간을 속박할 수 없다는 신앙적 확신에 근거한 그들의 노력으로 영국은 1807년 노예매매와 노예무역이 금지되었고, 1833년 대영제국 내에서의 노예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었다.[각주:5]
 
  19세기 후반 독일 루터교회 목사인 블룸하르트(아들, Christoph Fr. Blumhardt) 역시 목회와 더불어 사회의 약자이며 억눌린 자인 산업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현실정치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그에게 있어 현실정치 참여는 예수의 뒤를 따르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실천이었다. 1899년 6월부터 10월까지 블룸하르트는 노동자의 정치집회에 참석하고 그 자리에서 대중 연설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예수의 성육신 사건을 증언하며 예수의 뒤를 따르고자 했다. “(인간의) 곤궁과 고통의 울부짖음이 있는 곳에 예수의 영(성령)이 계시다”는 확신 속에서 그는 예수의 영인 성령이 인도하시는 그곳으로 가고자 했다. 때문에 그의 정치참여는 예수 따라 자기부인의 길을 걷는 노정이었다. 그 목표는 하나님 나라였고, 그 나라는 이 땅에 “새로운 사회질서”가 구현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었다.[각주:6]


한국 역사 속에서의 교회와 정치 

   우리나라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정치 참여는 이미 190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국권이 찬탈당한 이후부터 1945년 8월까지의 정치참여는 식민지 지배세력에 대한 저항과 국권회복을 위한 것이었지 정치권력 자체를 획득하고 그것을 행사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각주:7] 이 시기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양심에 따라 3.1운동에 참여하여 민족의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고 자주독립을 위해 순교자의 심정으로 헌신하였다. 하지만 해방 직후인 1945년-1948년 새로운 국가건설이라는 희망과 과업 아래 남한과 북한 두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은 정치에 깊이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정치활동은 정당을 조직하는 일에서부터 정치적 영향력 행사를 위한 기독교 단체의 결성, 정치계에의 투신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1945년 9월 초 신의주에서 장로교 목사 윤하영과 한경직이 주도하여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창당하는가 하면, 1945년 11월에는 평양에서 장로교의 김화식, 김관주 목사 등과 감리교의 신석구, 송정근, 이피득 목사 등이 ‘기독교자유당’ 결성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창당과정에서 구속됨으로써 성사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조만식 장로를 대표로 한 조선민주당도 결성되었는데, 상당수 기독교인이 참여하였으며 기독교사회주의와 민족사회주의의 색채가 농후하였다.[각주:8] 1948년 7월 제헌국회가 제정하여 공포한 대한민국의 헌법에서는 정교분리 원칙을 일관되게 표방해왔지만, 하나의 수사(修辭)일 뿐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960년 이승만의 독재와 부패, 3.15 부정선거에 분노해 발생한 4.19 혁명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양식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설 자리가 어디인가를 민족사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로 이어지는 한국교회의 인권, 민주화 운동은 바로 이와 같은 진지한 성찰의 결과였다. 1973년 5월 세계의 교회들은 한국교회로부터 전해진 한 선언문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국의 억압적인 상황 때문에 비밀리에 전파된 이 선언문은 한국교회가 처해있는 상황을 전하며, 그 상황 속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신앙 위에 어떠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가를 매우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구의 교회들은 이 선언을 ‘제2의 바르멘 선언’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973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

   우리는 이 선언을 한국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발표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국민을 억압하는데 온갖 군사력과 정보조직을 동원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 아래서 우리는 이 선언에 서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기를 주저한다. 우리는 우리의 싸움이 승리하는 날까지 지하에 몸을 숨기고 입을 다물고 행동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시월 이후 한국 국민이 당면한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은 우리 국민의 생활에 막대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한국국민으로서 오늘의 상황에 대하여 우리의 자세를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우리는 메시아의 나라를 찾아 세워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 국민은 조국이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수많은 고난과 시련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수탈을 경험해 왔다. 특히 한국동란(韓國動亂)과 그 뒤를 이은 독재정권의 발호는 우리 국민을 견디기 어려운 비극 속에 몰아넣었다. 국민은 언제나 새롭고 평화스러운 사회를 누를 수 있기를 열망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독재의 절대화와 잔인한 정치적 탄압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인간적인 사회를 회복하려는 국민의 희망은 처참하게도 부서지고 말았다. 지난 시월 십칠일의 이른바 10월 유신은 사악한 인간들이 그 지배와 이익을 위하여 마련한 국민에 대한 반역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먼저 한국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처럼 사태를 판단하고 이 판단에 따라서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몇 가지로 설명하고자 한다.

 (1) 우리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여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있다. 오늘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승리할 것을 기대하는 감격이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하나님을 향한 죄책에 대한 고백에서 오는 것이며 한국의 오늘의 상황 속에서 진리를 말하며 그것에 따라서 행동하라는 주님의 명령에서 오는 것이다.

 (2) 한국 국민은 그리스도인을 쳐다보고 오늘의 주어진 상황에서 행동을 취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대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국민이 우리에게 건 기대를 감당해 내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이러한 행동을, 길을 취하라는 국민적 독촉과 격려를 받고 있다. 우리는 우리 국민의 고뇌를 볼 때 이 사악한 시대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3) 우리는 해방을 위한 이러한 투쟁에 참여할 때 독립을 위하여 일본 식민통치에 저항한 한국 그리스도교회의 역사적인 전통을 이어받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가 결정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있어서 흔히 용기가 부족하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신학적인 자세에 있어서 혁명적인 역할을 다하기에도 너무나 경건주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형제 몇 사람이 연약하다고 하여 실족하여서는 안된다. 우리 교회의 역사적 전통 속에 있는 강한 신앙의 의지 속에서 우리의 신학적 신념을 찾아야 한다. 오늘의 우리의 말과 행동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메시아의 나라에 대한 선포자인 예수, 우리들 사이에서 힘 있게 역사하시는 성령에 대한 신앙에 굳게 기초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눌린 자들, 약한 자들, 가난한 자들, 멸시 받는 자들의 안식처가 될 것임을 믿는다. 우리는 또한 성령이 개인 생명의 부활과 성화를 위하여 활동하실 뿐만 아니라, 역사와 우주의 새로운 창조를 위하여 활동하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이 역사적인 위기에 처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시금 다음과 같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다.

 (1)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시며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이웃을 대신하여 고난을 겪고 있는 눌린 자들이 자유를 얻도록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고 믿는다.

 (2) 우리는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 땅에서 눌린 자들, 가난한 자들, 멸시 받는 자들과 함께 사신 것처럼 우리도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예수가 로마제국의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위에 있는 권세들에 향하여 진리를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도 담대히 진리를 선포하도록 부르신 것이라고 믿는다.

 (3) 우리는 성령이 우리 성품을 변화시키며 새로운 사회와 역사를 창조하시는데 우리가 참여할 것을 요구 하신다고 믿는다. 이 영은 메시아의 나라를 위한 영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회적, 정치적 개조를 위하여 싸울 것을 명령한다. 그러므로 이 같은 신앙에서 오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념을 밝히고자 한다.

 (1) 한국의 현 통치세력은 공법과 설득에 의한 지배를 무시하고 힘과 위협에 의해서만 지배하려고 한다. 우리의 공동사회는 약육강식의 집단으로 전락되고 있다. 하나님 이익에는 누구도 법 위에 설 수 없다. 세상 권세랑 하나님의 인간 사회에 정의와 평화의 질서를 세우기 위하여 국가 권력에 위임하신 것이다. 누구나 자기를 법 위에다 세우고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한다면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다. 우리의 동양적 전통에 있어서도 선한 통치란 지배자의 도덕적 설득과 덕에 의하여 이뤄지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국민을 칼로 정복할 수는 있어도 칼로 다스릴 수는 없다.

 (2) 한국의 현 통치세력은 양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무너뜨리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물론 침묵의 자유도 없다. 그리스도 교회는 예배, 기도, 집회, 설교 내용, 성경의 가르침에 있어서 부당한 간섭과 억압을 받고 있다. 그리스도 교회는 물론 다른 종교 단체들도 국민의 양심을 옹호하는데 그 역할이 있다. 양심을 파괴하는 것은 가장 사악한 행위다. 한국 교회가 통치세력의 간섭과 억압에 대하여 신앙의 자유를 지킨다는 것은 한국 국민의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다.

 (3) 한국의 현 통치세력은 국민을 지배하기 위하여 대중기만과 조작 또는 세뇌 작용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언론 기관은 지배체제의 선전수단으로 전락하여 국민에게 사이비 진리와 근거 없는 허위를 전달하고 있으며 국민을 기만하기 위하여 정보를 통제하여 조종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에 대한 증인으로서 언제 어디서나 기만과 조작의 어떠한 체제도 깨뜨려 버리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곧 메시아의 나라를 선포하고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4) 한국의 현 통치세력은 무자비하게 효과적인 수단을 써서 정치적인 반대자, 비판적인 지식인 나아가서는 무고한 국민들을 파괴하고 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활동하는 중앙정보부는 나치스나 스탈린 치하의 비밀경찰을 방불케 한다. 국민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으며 위협과 협박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그들에게 연행된 채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육과 영으로 창조하신 것을 믿는다. 메시아의 심판의 날, 육은 영과 함께 부활한다. 우리는 인간의 몸이 범할 수 없는 것임을 믿는다. 인간의 몸을 강제로 범한다는 것은 살인적인 행위다.

 (5) 한국의 현 통치세력은 강한 자가 가난한 자를 수탈하는 오늘의 경제체제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국민 특히 가난한 도시,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가혹한 수탁과 사회적 경제적인 부정으로 희생을 당하고 있다. 한국의 이른바 「경제적 발전」이란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한 몇 지배자 몇 사람의 음모의 결과이며, 우리의 환경에 대한 가혹한 재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극단적인 비인간화와 부정의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역사에 있어서 가난한 자들이 부유해지고 눌린 자들이 보호를 받고 모든 백성이 평화를 누리게 되는 메시아의 나라가 실현되는 과정을 증거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6) 지금 남북의 정권은 통일의 대화를 단지 그들 자신의 집권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구실로 삼고 한국 민족의 국토 통일에 대한 열망을 배반하고 있다. 남북은 진정한 화해를 이룩하려는 민족적 자세를 확립하여 우리 민족 전체가 참다운 공동체를 수립할 수 있도록 깊이 모색하여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난 날의 쓰라린 싸움에 대한 경험, 이데올로기와 정치, 경제제도의 차이를 넘어서고 국민을 억압하는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통일을 실현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행동을 선포하여 호소한다.

   ① 1972년 10월 17일 이후 국민의 주권을 전적으로 무시한 채 제정된 법률, 명령 정책 또는 독재를 위한 정치적 절차를 우리는 한국 국민으로서 단호히 거부한다. 이 땅에 민주주의를 부활시키기 위하여 온갖 형태의 국민적 연대를 수립하자.

   ② 이 투쟁을 위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학적 사고와 신념을 심화하고 신앙적 자세를 분명하게 하며, 눌리고 가난한자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복음을 널리 전파하며 말씀에 서서 조국을 위하여 기도함으로써 교회를 새롭게 하자. 우리는 우리 선인들이 걸어온 가시밭길을 되새기면서 필요하다면 순교도 불사하는 신앙의 자세를 다짐하여야 한다.

   ③ 우리는 세계교회를 향하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줄 것과 우리와의 연대감을 더욱 공고하게 해 줄 것을 호소한다. 세계의 그리스도 교인들의 우리에게 대한 격려와 지원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공동적인 유대를 계속 확인하여 주기를 바란다. 

 우리의 주님, 메시아 예수는 유대 땅에서 가난한 자들, 눌린 자들, 멸시 받는 자들의 사이에 계셨고 그들과 함께 살으셨다. 그는 로마 제국의 대표자 본디오 빌라도 앞에 담대하게 서시었다. 그리고 진리를 증거하시는 도상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러나 백성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죽음에서 일어나 변화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우리는 오늘,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갈 것을 결의 한다. 그리하여 주님처럼 소외당한 동포들과 함께 살면서 정치적인 압박에 저항하고 역사의 개조에 참여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 한국 땅에서 메시아의 나라를 선포하는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총을 믿고 기원한다.

1973년 5월 20일

한국 기독교 유지(有志) 교역자 일동 [각주:9]



나오는 말 

   성서는 현장에서 기록된 책이다. 그러기에 현장 없는 성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듯 국가 혹은 사회가 배제된 교회란 있을 수 없다. 굳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인간은 사회적 본성을 가진 존재이고 정치적 동물이므로 정치를 외면하고 지상의 순례길을 통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독일과 스코틀랜드 등에서 교회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자리매김했던 ‘두 왕국 이론’은 그러한 교회의 사명을 잘 설명해 준다. 뿐만 아니라 칼뱅의 ‘그리스도 왕권이론’도 신앙과 정치, 교회와 국가라는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고민되었다는 점에서 교회와 국가, 그리스도인과 정치는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 백성의 고통을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출 3:7) 세상 한가운데로 내려가(출 3:8) 그들을 압제자 파라오로부터 해방시키신 분이시다. 이 모든 활동은 교회가 외면하지 말아야 할 세상을 보여준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름 받고 있는 것이다(마 5:13-16).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는 선거를 통해 가능하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면, 그리스도인은 삶의 자리에서 이 꽃을 피워내야 한다.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자 세상 나라의 국민인 그리스도인은 선거를 통해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보냄으로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될 수 있는 역사를 꽃피워내야 한다. 윌리엄 윌퍼포스가 영국 하원에서 노예무역제도의 폐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분투할 때, 웨슬리가 88세 일기로 죽기 6일 전인 1791년 2월 24일, 그를 격려하기 위해 보낸 편지가 있다. 웨슬리는 이 편지에서 노예제도를 ‘인간 본성의 추문이요 기독교의 추문’이라 규정하며, “선한 일을 행함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힘입어 (하늘 아래 가장 극악한 것인) 노예들이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십시오.”라고 윌퍼포스를 격려하였다. 그는 영성가요, 복음주의자요, 전도자였지만 노예제도라는 악(惡)과 맞닥뜨렸을 때는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정치행위를 마다하지 않았다. 우리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한반도 평화와 인권 문제, 창조질서 보존 등의 과제 앞에서 교회는 기도해야 한다. 동시에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일꾼을 일할 수 있는 자리로 보내야 한다. 그것은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치행위를 통해 가능하다. 

  1. 김중락 “두 왕국 이론과 교회의 현실참여” 「월드뷰 제24권 7호 통권 133호」(2011년 07월) 33쪽 [본문으로]
  2. 위르겐 몰트만/박종화 옮김 「정치신학 정치윤리」(대한기독교서회 2017) 189쪽 [본문으로]
  3.  한스 마르틴 바르트/정병식·홍지훈 옮김 「마르틴 루터의 신학」(대한기독교서회 2015) 578쪽 [본문으로]
  4. 김중락 “두 왕국 이론과 교회의 현실참여” 35쪽 [본문으로]
  5. 이상규 “주님 영광 위해 모든 것 드린 클레펌파” 「교회와 신앙」(2005년 12월 27일) 45-48쪽 [본문으로]
  6. 임희국 “신앙인의 정치 참여-블룸하르트의 경우” 「기독교 사상」(2016년 2월호 통권 686호) 34쪽 [본문으로]
  7. 김흥수 “한국 기독교의 현실정치 참여의 유형과 역사” 「신학사상 78집」(1992 가을) 607쪽 [본문으로]
  8. 위의 책 608-610쪽 [본문으로]
  9.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70年代 民主化運動 제1권」(동광출판사 1987) 250-253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