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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법과 공정

[표제글] 법의 공정성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 양권석

   

양권석(성공회대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말하자면,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해야 하고, 법은 재산이나 권력의 유무에 상관없이 그리고 인종이나 성이나 출신에 관계없이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하며, 사법적 판단은 우리 사회에 정의가 살아서 구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구체적인 증거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법이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재벌들을 향한 법의 지나친 관대함에 대해서 무수한 비판과 조롱이 있었음에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여전히 법을 초월한 원칙처럼 보인다. 사법절차와 사법적 판단의 적용이 공정하기 보다는 차별적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재벌들은 아무리 중한 범죄를 저질러도 사법부가 스스로 나서서 그 재벌들이 빨리 정상적인 경영활동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옹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법과 정의의 적용은 보복이나 배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정의로운 질서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되돌려 놓기 위한 것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 장발장의 경우에서 보듯이, 가장 심각하게 가난에 내 몰린 사람들을 향한 법의 적용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판단은 법과 그 법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약자들을 다시 사회의 일원으로 회복시키려는 관심을 정말로 가지고 있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법과 법적 정의에 대한 불신은 사법적 절차와 판단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다. 외국인 노동자들과 성소수자들을 포함해서 현재 법체계의 보호 범위 밖에 배제되어 있어서 인권의 사각지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또한 코로나 장발장이 세계최대의 아동 성착취물 동영상 사이트를 운영한 범죄자와 동일한 형량을 구형 받은 사실로 인해서 촉발된 조롱과 분노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그리고 성폭력 관련한 사법절차와 판단이 피해자를 위한 정의 실현에 소극적일 뿐만 아니라, 피해자를 보호하거나 회복시키는 실질적 역할을 못한다는 점에 대한 비판이 그 어느 때 보다 강력하다.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죄와 정의에 대한 인식과 법의 관행적 적용과 해석이 가지고 있는 죄와 정의에 대한 인식 사이에 격차가 그만큼 크다는 말이다.

이처럼 지금 우리 사회는 사법개혁 관련한 논쟁을 포함해서, 법과 법적 정의에 관련된 문제가 그 어느 때 보다 심각하게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번 <사건과 신학>은 법과 정의와 공정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생각을 나누어 보기로 하였다. 다섯 분의 귀한 글들을 모아 보았다. 풍부하고도 깊은 성서적, 윤리적, 철학적 성찰들로 채워진 글들이다.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어 가면서 법과 정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한 걸음 더 깊이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문화와 종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Justitia)는 세계의 모든 법정에 법의 공정성을 약속하는 상징물로 서 있다. 근대 세계를 지배해온 그 법과 정의의 여신은 눈은 안대로 가리고 한쪽 손에는 천칭(저울)을 들고, 다른 한쪽 손에는 검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은 나라마다, 문화마다, 법의 이해에 따라 매우 달라진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안대가 없는 경우도 있고, 천칭마저 없는 경우도 있으며, 검이 법전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안대와 천칭과 검은 법과 정의의 공정성을 위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를 상징하고 있다. 안대로 눈을 가린 것은 어떤 이해관계나 인정에 끌리지 않겠다는 각오일 것이고, 천칭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할 것이라는 약속이며, 검이나 법전은 법과 정의에 관한 어떤 논란도 철저히 막아내겠다는 그래서 정의를 최선으로 실현해 내겠다는 다짐일 것이다.

하지만 정의의 여신이 눈가리개를 하기 시작한 것은 법이 이해 관계나 인정에 끌릴 가능성이 있음을 오히려 반증하는 것이고, 안대로 눈을 가려도 그 가능성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뒤러 (Albrecht Dürer) 같은 화가는 이미 15세기에 광대가 정의의 여신의 눈을 안대로 가리는 그림을 그렸다. 누가 판관의 안대를 가리느냐가 문제라는 말이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겠다는 천칭도 법이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는 말일 것이다. 코로나 장발장을 포함해서 법적 정의에 의해서 오히려 더욱 소외되고 더욱 억압받아 온 사람들을 생각해 볼 때, 저울로 무게를 재듯이 법에 따라 사람을 객관화하고 추상화해서 판단하는 것이 정말로 정의로운 판단일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검과 법전은 논란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겠지만, 사실은 법과 법이 말하는 정의에 대한 논란은 끝이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논쟁을 막기 위해서 검이나 법전을 사용하는 경우, 그것이 시민들의 정의에 대한 공감과 인식을 억압할 가능성이 언제나 있는 것이다.

눈을 가리고, 가장 정확한 저울을 가지고, 검으로 무장한다고 해서 법의 공정성이 실현되는 것도 아니고, 정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법이 자신의 한계를 깊이 자각할 수 있을 때, 사람과 생명은 법의 한계 안에 갇힐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할 때, 그래서 법이 바라보는 정의를 끊임없이 넘어서기 위해 자신의 한계 밖으로부터 오는 도전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법은 공정을 향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고 정의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위험에 빠뜨리면서 한 마리 양을 향해 달려 나가는 예수님, 집 나가서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 온 아들을 환대하며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 그리고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을 생각해 보라.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이런 행위들은 법적 공정성이나 정의의 관점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아니 오히려 법적 정의나 공정성의 관점에서라면, 잘못된 불의한 행동들일 수 있다. 하지만 성서의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법적인 공정성의 관점을 넘어서 그리고 추상적인 법적 정의의 관점을 넘어서 사람과 생명을 바라본다. 공정성이나 정의의 실현이 법적인 차원을 넘어서 사람과 생명의 회복을 향한 더 높고 더 강렬한 염원으로 나타나고 있다. 법적 정의와 공정성을 세우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생명의 진정한 화해와 회복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꿈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과 생명의 진정한 회복과 화해를 지향하지 않는 법적 공정성과 정의 역시 불가능하다. 신학은 사람과 생명을 법적인 추상과 객관의 시각을 넘어서 바라 볼 것을 요구한다. 신앙은 사람과 생명을 특정한 개념이나 질이나 양으로 공약하거나 환원될 수 없는 무한과 신비로 바라 볼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성서가 법이 아니라 은혜에 의해서 사람과 생명은 그 본래의 존귀함을 온전히 회복한다고 했던 것이다.

법에 관한 우리 사회의 논란 속에는, 법을 핑계 삼아 우리가 외면해 온 아픔들과 차별들의 간절한 호소가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