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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성착취 폭력사건, n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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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지문] “이 사건에 본인의 책임은 없다며 선 긋지 말아 주세요.” 양권석(NCCK 신학위원회, 성공회대학교) 이 사건을 전하는 언론 보도를 보면 온갖 비밀스러운 암호들로 가득하다. n번방, 텔레그램, 고담방, 박사방, 이기야, 붓따, 갓갓, 와치맨, 박사.... 아직은 사이버 세계의 신인류로 충분히 거듭나지 못한 나 같은 사람들에게 이런 언어들은 때로 상상불허의 넘사벽 앞에 서 있는 느낌을 준다. 낯선 외국어 문장을 사전 찾아가며 읽듯이, 단어 하나하나를 인터넷을 통해 확인하고서야 겨우 해독이 가능할 때가 정말 많다. 하지만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현실과는 다른 사이버 세계, 가상의 세계, 온라인이라는 말이 주는 교묘한 위장술에 결코 속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분명하게 느끼게 된다.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격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그..
1년의 추적, 이제 시작이다 / 추적단 불꽃 추적단 불꽃 한창 잠입 취재를 시작했을 당시, 일상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성 착취 영상을 눈으로 보며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어떤 범죄를 어떻게 저질렀는지 파악해야 했기에 봐야만 했습니다. 대화에 참여하던 가해자들의 대화 내용을 채증하는 것이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경찰에 신고하고 수사관에게 채증한 자료를 보내면서도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처벌은 개뿔, 수사도 안 하는데’라며 빈정대는 가해자들의 대화는 무력함을 안길뿐이었습니다. 디지털 성 착취 피해자가 지금 내 핸드폰에 갇혀있는데, 모른 척 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지난해 여름, 디지털 성범죄를 심층 취재하려 불법 촬영물의 유통경로를 쫓았습니다. 제2의 ‘소라넷’으로 불리던 사이트들을 전전하다..
‘코로나19’와 ‘n번 방’ 사이 음압병동에 갇힌 교회 / 성석환 성석환(장로회신학대학교) ‘코로나19’에 대처하는 ‘사회적 거리 두기’의 삶은 온통 영상 매체로 채워졌다. 선생님들은 갑작스러운 ‘온 라인 강의’ 때문에 진땀을 빼고 있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학생들을 상대하며, ‘아,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오래 전 입으로 비평하며 떠들어 대던 영화 의 현실이, 또 얼마 전부터 호들갑 떨던 ‘4차 산업혁명’의 실체가 예기치 않게 가시화되는 듯하다. 그런데 이 와중에 터진 소위 ‘n번 방’ 사건은 그 생소한 용어들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한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던 한국사회에 또 다른 충격을 가하며 말기암처럼 퍼져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실체를 폭로했다. ‘인간은 대체 ..
슬기로운 가상경험 / 김한나 김한나(성공회대학교) “거짓은 내가 싫어하는 것, 나는 당신 법을 좋아하고 실행합니다.” (시편 119:163)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경외한다. 참된 경외는 공포와는 달리 본질적으로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기쁨을 내포한다. 다윗은 권위를 가진 방백들의 핍박 가운데서도 사람과 환경이 아닌 오직 하느님의 말씀만을 두려워한다고 고백한다(시119:161).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지극한 열망과 열정으로 그분의 계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어떠한 유혹과 정욕에도 흔들리지 않고 지속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평안과 승리의 삶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하느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에서 비롯된 말씀의 실천은 가장 기쁜 성도의 의무중 하나이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의 가치관을 ..
집단 불법 성착취 영상거래사건(n번방 사건)과 여성신학적 실천 / 최은영 최은영(한국여신학자협의회 사무총장) 코로나19 사태가 인간이 자연환경을 억압하고 차별한 결과임을 드러냈다면, n번방 사건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해왔음을 알려주었다. 일찍이 로즈마리 류터(R. Ruether)를 위시한 생태여성신학자들이 주장해 온 쌍둥이 차별이 떠오른다. 이는 가부장제에서 비롯된, 자연과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매우 닮았다는데 연유한다. n번방으로 불리는 사건은 텔레그램을 이용한 성범죄로 주도자, 그들에게 동조한 가해자, 그로 인한 피해자가 존재한다. 여성 피해자와 남성 가해자라는 명확한 구분법으로 성소수자는 오히려 배제되어 있으며,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는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과 죽음에 못지않다.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지목을 억울해 하기보다, 잠재적 피해자인 여성..
비단 n번방만의 문제가 아니다 / 김민영 김민영(다시함께상담센터 소장) 텔레그램은 러시아 태생의 두로프 형제가 2013년에 출시한 비영리 메신저다. 당초 텔레그램이 표방한 강력한 보안 정책은 반푸틴 세력을 감시하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되었으나, 성착취물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이득을 벌어들이고자 목적하는 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안전한 플랫폼으로 기능하였다. 아르바이트 구인글을 거짓으로 올리거나 일탈 계정을 운영하는 여성들에게 접근하는 방식으로 확보한 여성들의 개인 정보를 탈취한 뒤, 이를 토대로 협박하면서 점점 수위가 높은 촬영물을 요구하거나 성폭행을 일삼은 이들의 집단적 범죄행각은 주요 운영진과 26만명의 공모자들에 의해서 견고해졌다. 여성 대학생 2명이 잠입하여 n번방 속 잔인한 성착취 면면을 고스란히 감내하며 그 ..
내 안의 n번방 / 이효성 이효성(춘천사는 기독청년, 진보정당활동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마주하면 마음이 많이 무겁다. 내가 소비했던 폭력적인 영상들과 여성들에게 잘못했던 일들이 떠오른다. 그래서 당장 공분해야 함에도 얼굴이 붉어지고 입이 잘 안떨어진다. 직간접적 가해의 기억들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묵직하게 내려앉은 느낌이다. 나는 n번방사건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대열에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아주 어렸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초등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여자아이들과 어울려서 노는것이 점점 어색해졌다.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여자아이들과 놀 때 "좋아한대 좋아한대" 하면서 또래 남자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았고, 나도 다른 남자아이를 놀려댔던 것 같다. 중학교 때는 폭력적인게 곧 남자다운거라는 간접적이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매일 마주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