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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성(性), 몸의 언어에 대한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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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性), 몸의 언어에 대한 예의 / 송진순 송진순(이화여자대학교) 지인인 여성학 교수님이 경찰을 대상으로 하는 특강을 마치면서 퀴즈를 냈다고 한다. “이별에도 OO이 필요하다. 빈칸에 들어갈 말이 무엇일까요?” 대부분 중년 남성이었던 경찰들은 “눈물, 정산(현금), 낭만, 예의” 등 많은 답변을 내놨지만, 정답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반면, 여대생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바로 답변이 나왔다고 한다. 정답은 안전이다. “안전 이별하세요!” 한동안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진 인사다. 다양한 성폭력 사건을 다루면서도 막상 남녀 관계에서 안전을 생각지 못했던 남성과 행복하고 즐거운 연애를 앞두고 안전이 최우선이 되어야 하는 여성의 현실 인식, 이같은 극명한 인식 차이는 우리 사회 깊숙이 스며있는 젠더 의식을 반영한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기 / 정혜선 정혜선 변호사(법무법인 이산) “제 말을 믿어줄까요?”, “응? 왜? 왜 니 말을 안 믿어줄 것 같아?”, “음.. 누가 ○○(가족 구성원)이 어린 저를 성폭행했다고 생각이나 하겠어요?” “아닌데, 변호사님은 많이 봤는데. 수영(가명)이 같은 친구들 많이 있어. 많이 만났어” ‘많이 봤다’는 내 얘기에 처음으로 수영이는 푹 숙였던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맞춰주었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이다.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센터에서 요청이 왔다. 중학생인데, 초등학교 때 가족으로부터 꽤 오랫동안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고 했다. 가해자로부터 분리되어 피해는 멈췄지만, 그 후 자살 시도를 몇 차례 했고, 학교 상담도중 상담교사가 알게 되어 신고한 사안인데, 피해자나 피해자의 보호자는 사건을 진행하고 싶지 않다고 ..
그가 고통당할 때, 우리는 어디 있었는가 / 채수지 채수지(한국여신학자협의회 기독교여성상담소 소장) 나는 몇 년 전 남편의 외도와 폭력에 시달려 이혼을 고민하는 한 중년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다. 그녀가 남편의 폭력적인 성향을 알고도 결혼을 감행하게 된 이유는 연애 시절 남편이 그녀의 나체 사진을 몰래 촬영해두었다가 자신과 결혼하지 않으면 사진을 가족과 지인들에게 유포하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헤어진 남자 친구가 성관계 동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하고 있으니 어쩌면 좋겠냐는 젊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된다. 그들은 이미 동영상이 유포된 것은 아닌지 불안해했고, 사람들이 동영상 속 자신을 알아볼 것만 같아 집밖에 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카메라는 여성의 몸이 상품으로 간주되고 ‘순결’ 여부가 여성의 가치를 좌우하는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텔레그램 성착취의 “공범”입니다. / 강은정 강은정(안양나눔여성회 디지털성폭력예방교육센터) 남자아이들은 다 야동 보면서 크는 거라고요? 아들이 야동 볼 때 휴지를 넣어주셨다고요? 한창 성장기 호기심을 막으면 엇나갈 수 있다고요? 일탈계 여성들이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에 성착취를 당한 것이라고요? 일부 비행 청소년들의 문제라고요? 그렇다면 당신이, 그래서 우리 모두가 바로 텔레그램 성착취의 “공범”입니다. 디지털성폭력은 여성의 신체를 상품화・대상화하고 소비・유통함으로써 돈을 벌어들이는 거대 성산업 구조와 성폭력 피해자에게는 엄격하며 가해자에게는 관대한 한국사회 문화구조 속에서 오늘까지 성장해 왔습니다. 1997년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빨간마후라 비디오’를 기억하실 겁니다. 해당 비디오는 10대 남학생 두 명이 일방적으로 촬영하고 여학생의 동의 없이..
‘성착취’의 흥행 / 권경란 주연 : Off-line 업소 조연 : On-line 플랫폼 작품명 : ‘성착취’의 흥행 권경란(다시함께상담센터) 온라인을 통한 성착취가 연일 뜨거운 이슈이다. 그저 ‘야동사이트’로만 인식되던 소라넷을 기점으로 다크웹, 웹하드 카르텔 등 디지털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성착취 산업은 이제는 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섰다. 디지털 공간 내의 성폭력을 보고 있자면 마치 중국의 전통 가면극 변검을 선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긴 소매로 얼굴을 한 번 가리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팔을 내리고 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면이 등장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탄성과 달리 탄식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유사한 형태로 본질을 가린채 무수한 이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온라인은 거..
n번 방의 괴물들 / 이난희 이난희(한국여신학자협의회 홍보출판위원장) 처음엔 이게 무엇인가 싶었다. 엔포 세대라는 말은 들어보았는데, 엔번 방이라니... 노래방이나 만화방 같은 그런 방인가 생각도 들었다. 엔번 방 사건은 디지털 성착취 영상 불법 거래 범죄 사건이었고, 예상하듯이 그 피해자는 주로 여성들 특히 십대 혹은 그 미만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이 사건의 범죄 행위는 단순한 성착취 영상만이 아니라, 피해 여성들을 노예로 지칭하고 상품으로 취급하고 학대하며, 강간모의와 살해협박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악질적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분노와 충격을 경험하였다. 이번 엔번 방, 디지털 성범죄 사건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드러낸다고 보여진다. 첫째, 가해자와 피해자들이 20대 미만의 매우 젊고 어린 연령층이다. 이 젊은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