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건과 신학 3기/올림픽에 관한 단상

올림픽 시즌, 몸을 기억하다 / 김한나



김한나 (NCCK 신학위원, 성공회대)


"올림픽에서 중요한 것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잘 싸우는 것이다."
-올림픽 신조-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힘차게 (Citius, Altius, Fortius)" [각주:1]
-올림픽 모토-


올림픽 정신에서 몸을 기억하다

근대 올림픽의 신조와 모토를 나타내는 위 두 표어는 우리에게 익숙한 쿠베르탱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로 불리는 쿠베르탱은 당시 성공회 주교였던 에텔버트 탈보트(Ethelbert Tarbot)의 설교와 가톨릭 신부였던 앙리 디동(Henri Martin Dideon)의 연설을 듣고 이를 인용한 것이다. 1908년 런던 올림픽 당시, 에텔버트 탈보트 주교의 주일 설교를 듣게 된 쿠베르탱은 '올림픽 게임 참여 자체가 상보다 중요하다'는 그의 설교 내용을 인용하여 올림픽 이상을 구상하고 이를 채택하였다. 올림픽 모토는 쿠베르탱이 앙리 디동 신부가 주창한 '보다 빠르게, 보다 힘차게, 보다 높이!'라는 구호를 듣고 이를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첫 회의(1894)에서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각주:2]

"올림픽에서 중요한 것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잘 싸우는 것이다."라는 올림픽 신조는 에텔버트 탈보트 성공회 주교(Central Pennsylvania)의 주일 설교에서 비롯되었다. 1908년 여름, 성공회 주교들의 회의인 람베스 회의 참석차 런던에 방문했던 탈보트 주교는 런던의 성 바울로 대성당 감사성찬례[각주:3]에 설교자로 초청을 받게 되었다. 당시에는 런던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는 시기였으므로 예배에는 운동선수들과 관계자들이 특별히 초대되었다.

"진정한 올림픽의 교훈은 올림픽 자체가 경주와 상보다 낫다는 것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 세상의) 상 자체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우리의 진정한 상은 썩어 없어질 것이 아니라 불멸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림픽에서) 오직 한 사람만 월계관을 쓸 수 있을지언정, 모두가 대회의 기쁨을 동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활기찬 이들, 곧 활동적이고 공정하며 깨끗한 운동 경기를 통해 인간의 정신을 회복하는 데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모든 격려를 보냅니다." [각주:4]


당시 주일 예배에 참석했던 쿠베르탱은 탈보트 주교의 설교를 인상 깊게 듣고 있었다. 며칠 후, 그는 영국 정부에서 올림픽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개최한 연회에서 탈보트 주교의 설교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이 올림픽에서 중요한 것은 승리보다 참가하는 데 있습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분투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잘 싸웠다는 것입니다."


당시, 쿠베르탱은 이 말이 명확하고 건전한 철학의 기초라고 강조했다. 그는 1912년과 1920년 올림픽에서 재차 이 말을 언급했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개막식에서 쿠베르탱의 메시지는 경기장 대형 점수판에 선명한 글자로 나타났고, 1908년 탈보트 주교의 설교는 마침내 올림픽 정신으로 부활하였다.[각주:5]

탁월한 운동능력과 지성을 겸비한 디동 신부는 뛰어난 설교가이자 교육자였다. 그는 특히 체육이 청소년에게 미치는 교육적 효과를 강조하여 이를 교육 과정에 도입하였고, 그 일환으로 1891년 청소년 운동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 개막식에서 디동 신부는 운동선수들에게 스포츠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보다 빠르게, 보다 힘차게, 보다 높이!'라는 강령을 주창했다. 1897년 국제 올림픽 회의에 참석한 디동 신부는 인간의 자율적인 운동 활동이 주는 윤리적 영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그는 운동을 통한 신체 능력의 향상이 청소년의 정신 건강에 영향을 주며, 운동을 통한 분투의 과정이 그들에게 독창적인 용기를 함양하도록 이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학생들이 운동을 통해 지구력을 향상하고 절제를 배우며, 한 팀을 통한 연대감과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각주:6]

이처럼 근대 올림픽의 태동에서 그 중심과 기초가 되는 올림픽 정신은 성공회 주교와 가톨릭 신부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올림픽 신조의 근원이 된 탈보트 주교의 설교는 그의 신학적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는 '고린토전서 9장 25절'을 인용하여 올림픽에서 획득하는 상의 유한성에 대해 언급하며,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불멸의 월계관'은 천상에 있음을 상기시켰다. 그렇기에 올림픽의 진정한 의의는 승리가 아닌 공정한 경기 참여를 통한 전인적 회복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의 설교는 인간의 신체적 활동인 스포츠가 인간의 정신 건강과 무관하지 않다는 이해를 반영한다.

또한, 앙리 디동 신부가 주창한 '보다 빠르게, 보다 힘차게, 보다 높이!'는 단순히 인간의 육체적 능력을 고취하는 데 그 궁극적 목적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체 단련과 운동 경기 참여가 인간의 정신과 삶에 영향을 준다는 사상을 기초로 체육 증진에 힘쓰고 있었기 때문이다.[각주:7] 그의 표어는 육체적 단련과 분투, 팀 안에서 화합을 통해 보다 높은 윤리적 이상에 이르고자 하는 그의 사상과 열망을 반영한다.[각주:8] 따라서, 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올림픽 모토는 "올림픽 운동의 염원이 경기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에만 있는 것이 아닌 도덕적이고 교육적인 측면에도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각주:9]


성서가 말하는 몸을 기억하다

현대 사회는 몸의 문제로 큰 혼란을 겪고 있다. 이는 두 가지 극단적 경향으로 나타나는데, 그중 하나는 인간의 정신과 그로 인한 활동을 중시하고 인간의 몸과 육체적 활동을 경시하는 경우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관습과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조선 시대에는 과거를 통해 출세하는 것을 가장 큰 덕목으로 여겼으며, 양반 계층은 독서와 정신적 수양에 몰두하고 육체적 노동은 천시하였다. 서구에서는 뿌리 깊은 이원론적 인간 이해로 인해, 인간의 정신은 우월하고 육체는 열등하다는 인식이 역사적으로 오랜 영향을 미쳤다.

또 다른 극단은 인간의 내적 가치는 무시한 채, 우리 눈에 보이는 육체가 우리 존재의 전부이며 이에 절대적 가치는 두는 경향이다. 이는 특정한 몸의 형태에 관한 동경, 자기 몸에 대한 집착, 타인의 외모에 관한 편견과 비하(body shaming) 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지나친 상업적 광고, 미디어를 통해 제공되는 비현실적인 미적 기준, SNS를 통한 자기과시와 비교, 트렌드에 대한 강박 등에 의해 점차 과열된다. 우리는 이러한 두 가지 극단적 경향 모두 인간의 몸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성서는 우리 몸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말씀이 사람(육신)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 1:14]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몸의 부활'을 믿고 증거하는 공동체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곳곳에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다. 그분은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셨고, 병자들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으며, 배에서 주무시기도 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로마 병사들의 채찍을 맞으시고 조롱을 당하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분은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몸을 보이시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고 이야기를 나누시며 부활의 몸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시며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사도 바울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몸의 부활'을 경험할 것임을 강조한다(고린토전서 15:20-22).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에페소서 1:23]


또한, 사도 바울로는 에페소서를 통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라고 강조하며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정의하고 있다(1:22-23). 이러한 설명은 고린토전서 12장에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사도 바울로는 '우리는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라고 묘사한다. 그는 인간의 몸이 여러 지체(부분)로 구성된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여러 은사를 가진 사람들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게 하셨다고 설명한다. 그는 교회 공동체를 인간 몸의 몇 가지 특성을 전제로 설명하면서 몸에 관한 창조주 하느님의 시각을 나타내고 있다.

첫째, 그는 인간의 몸이 여러 지체로 이루어져 있는 하나의 몸이라고 말한다. 그는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이라는 설명을 통해 인간의 몸이 손과 발, 눈과 귀와 같은 많은 지체를 가졌지만 모두 한 몸을 이루고 있다고 강조한다(12:12). 그리고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 우리 몸에 여러 다른 지체를 두셨고, 이를 통해 우리 몸이 다양한 기능을 하도록 하셨다고 부연한다(12:18).

둘째, 사도 바울로는 인간 몸의 다양한 지체는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상호 영향을 주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하나의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지체도 함께 아파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한다고 강조한다(12:26). 그는 하느님께서 몸의 분열을 방지하시기 위해 모든 지체가 상호 의존하며 몸의 조화를 이루게 하셨다고 그 근거를 설명한다(12:25).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이 자기 구실을 다함으로써 각 마디로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 자라납니다."(에페소서4:16)

셋째, 그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지체, 심지어 우리 눈에 그것이 연약해 보일지라도 이를 존귀하게 여기신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지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이를 더욱 귀하게 여기셔서 전체 몸과 균형을 이루게 하신다고 설명한다(고린토전서 12:24).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몸의 각 지체와 (당연히) 그 지체가 이루는 인간의 몸 자체를 하느님께서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대체 자기 몸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몸을 기르고 보살펴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교회를 기르시고 보살펴 주십니다." (에페소서 5:29)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고린토전서 6:19]


사도 바울로는 당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오해, 즉 '무슨 일이든 다 행할 자유가 있다'라는 방종에 빠져 있던 일부 고린토 교인들에게 위와 같이 경고하고 있다. 당시 그들은 '인간의 육체는 악하고 열등하다'라는 헬라의 이원론적 사상에 빠져 자기의 몸을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사도 바울로는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 각각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으므로, 우리 몸은 음행이 아닌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6:3).

이어서 그는 "하느님께서 주님을 다시 살리셨으니, 우리도 당신의 권능으로 다시 살려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한다(6:14). 이처럼, 사도 바울로가 고린토 교인들에게 성도의 '몸의 부활'을 상기시킨 이유는 영광스럽게 부활할 우리의 몸을 함부로 음행에 물들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존 칼빈은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6:17)은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만약 우리(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완전하고 온전하지 않다면(즉, 몸의 연합을 배제한다면), 부활의 소망도 견고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각주:10]

결국 사도 바울로는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온전히 연합하였으므로, 우리의 몸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자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하느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 우리 '몸의 궁극적 목적'임을 밝힌다(6:19-20).


"그러나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
[고린토전서 10:31]


이처럼 사도 바울로는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의 범위에 우리의 육체적 활동을 당연히 포함한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드리고, 우리의 지체가 하느님을 위한 의의 도구가 되도록 하라고 권면한다(로마서 6:13). 즉 우리의 전인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며, 우리의 몸을 통해 행하는 모든 활동도 하느님의 영광을 목표로 행해져야 한다.

또한,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면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중요한 역할에 대해 덧붙인다. 그는 고린토전서 10장 32절과 33절에서,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그들로 구원에 이르게 하라고 권면한다. 이는 주님께서 주신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몸이 만들어진 이유임을 설명한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총에 응답하여 우리의 전인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존재다. 그리고 우리 이웃을 향한 가장 큰 사랑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온전히 연합하는 기쁨에 동참하도록 하는 것이다.


몸의 가치를 기억하다

"올림픽 이념은 인간의 신체, 의지, 정신을
전체적 균형과 조화 속에서 고취시키는 생활 철학이다."[각주:11]


이처럼 올림픽은 전체의 균형과 조화 안에서 인간의 전인을 고취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하지만, 지나친 국가 간 순위 경쟁, 편법과 반칙, 도핑 사건 등으로 올림픽 정신은 위기를 맞고 있다. 결국, 이러한 위기는 올림픽 정신과 이상을 망각하고 눈에 보이는 기록과 성과만을 중시하는 '성적 지상주의'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전인적 향상에 중점을 둔 올림픽의 근본정신과 이상을 적극적으로 계승하는 것이, 곧 올림픽의 방향성을 회복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탈보트 주교와 디동 사제가 제안한 스포츠의 목적은 눈에 보이는 성과 혹은 육체적 단련 그 자체에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육체와 정신이 조화를 이루어 상호 영향을 주고 있다는 이해를 바탕으로, 스포츠 활동을 통한 인간의 전인적 회복을 추구하였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열등하게 바라보거나, 반대로 우리의 몸을 우리 존재의 전부로 오인하는 이분법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관점 모두 인간의 몸의 가치와 목적을 축소하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우리 것이 아니다'라는 사도 바울로의 고백을 통해, 잠시 불안과 두려움에 직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몸이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으로서 우리의 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존엄한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그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우리 몸으로서 행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행동이다.

  1. 오리지널 올림픽 모토, 2021년 이 표어 끝에 '―다 함께(together)'라는 단어가 새로 삽입되었다. [본문으로]
  2. 흥미로운 미디어 편집부, 『기록, 그 찬란함! 올림픽의 역사』, 흥미로운 미디어, 2018 [본문으로]
  3. "성찬례를 의미하는 용어는 거룩한 상통 Holy Communion, 성만찬 Lord's Supper, 미사 Mass, 유카리스트 Eucharist, 대감사 The Great Thanksgiving 등이다. 그 중에서 성공회 안에서 성찬례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용어는 '거룩한 상통'과 '유카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현재는 유카리스트가 더 에큐메니컬한 용어이므로 본 기도서도 이 흐름을 따라 유카리스트를 채택하였으며, 이를 감사성찬례로 번역하여 공식 용어로 한다." [20쪽, 『성공회 기도서 2004』, 대한성공회] [본문으로]
  4. Ture Widlund, 『Ethelbert Talbot-His Life and Place in Olympic History』, Citius, altius, fortius: the ISOH journal, vol. 2, no 2, 1994, 7-14. https://library.olympics.com/network/doc/SYRACUSE/2288474/ethelbert-talbot-his-life-and-place-in-olympic-history-by-ture-widlund?_lg=en-GB [본문으로]
  5. 위의 글 [본문으로]
  6. Michael Pakaluk, 『Citius. Altius. Fortius.』,The Catholic Thing, 2008.06.02. https://www.thecatholicthing.org/2021/08/05/citius-altius-fortius/ [본문으로]
  7. 위의글 [본문으로]
  8. 박용욱, 『[종교칼럼]더 빠르게 더 힘차게 더 높이』, 매일신문, 2018.02.03. https://www.imaeil.com/page/view/2018020300260703240 [본문으로]
  9. 국제 올림픽 위원회 공식홈페이지 https://olympics.com/ioc/faq/olympic-symbol-and-identity/what-is-the-olympic-motto [본문으로]
  10. John Calvin, 『Commentaries on the Epistles of Paul the Apostle to the Corinthians』,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Volume First. https://ccel.org/ccel/calvin/calcom39/calcom39.xiii.iii.html [본문으로]
  11. 올림픽 헌장,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2021.8.8.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