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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종교, 혐오 그리고 정치 -코로나19 사건이 던지는 질문-

전염병은 교회 역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 최종원

 

최종원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인류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하나의 새로운 문명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여러 다양한 요소들이 합쳐져야 가능하다. 주도하는 세력은 존재했지만 기존의 한계를 넘어설 새로운 흐름을 생성하기 위해서는 순혈주의를 주장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문명의 기초가 없던 유럽 대륙에서 기독교 중심의 유럽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중세 세계의 시도는 기독교라는 새로운 사상을 담기 위해 다양한 전통을 수용했다. 일차적으로는 이민족들과 그들의 토착신앙을 기독교화하는 식으로 다양성을 받아들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중세 기독교 유럽 형성기에서 유대인들은 큰 차별 없이 공존할 수 있었다.

 

이런 토양을 갖고 있던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과 타자화는 한 가지 특정한 사건으로 형성되었기 보다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 형성된 것이다. 그 요소는 인간이 자초한 재앙과 자연재앙 등이 포함된다. 유럽 교회가 반유대적 사고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게 된 큰 단초는 십자군이었다. 이교도에게 빼앗긴 성지를 탈환하자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초래한 궁극적인 원인인 유대인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3차 십자군 원정을 앞둔 시점인 1189년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 즉위식 시점에 런던과 요크에서 유대인에 대한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유대인들이 왕을 시해하려한다는 루머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폭도들이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홀로코스툼’이라고 기록하였다.

 

이 사건이 유럽에서 드러났던 대중들에 의한 반유대주의의 첫발이었다. 가톨릭교회는 신중하나 모호하게 대응했다. 13세기 초반 유대인들을 폭도들로부터 보호하는 명목으로 게토(ghetto)가 등장했다. 분리하여 보호한다는 것은 또 다른 면에서 제도적인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북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디언 보호구역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이 13세기 초반을 중세 탄압사회의 형성기라고 부른다.

 

이 탄압사회가 폭발력 있게 분출한 사건이 유럽에 들이닥친 전대미문의 재앙인 흑사병이다. 1300년대 중반 유럽 대륙에 상륙한 이래 수 개월 내에 유럽인구의 1/3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흑사병은 공포 그 자체였다. 흑사병은 중세의 수준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이 재앙 앞에서 중세인들의 반응 역시 다양했다. 이 사건을 타락한 세상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채찍고행단’과 같은 극단적인 참회 고행의 방식을 선택했다. 그 반대의 극단은 르네상스 인문주의로 이어진 종교 안에서 객체가 되었던 인간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을 증폭시키는 것으로 이어졌다. 후자의 반응은 중세의 전염병에 대한 미신적인 대응을 넘어선 체계적인 의학을 발전시키게 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서울대 박흥식 교수 같은 중세사가는 흑사병이 근대를 만든 사건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반면, 전자의 흐름과 같이 전염병을 신의 진노라고 해석한 이들은 극단적인 금욕을 해결책의 하나로 제시했다. 그러나 자연재앙을 신적 행위로 연결시키고 종교적 성찰을 해결책으로 내세우는 것은 대체로 건전한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다. 오늘의 의학에서 보자면 전염병에 대응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가 개인과 공동체의 위생을 개선하는 것이지만, 채찍으로 내려치며 육신을 학대하는 비위생적인 고행이 전염병을 막을 수 없었음은 자명하다. 종교적 두려움이 무분별한 광기로 바뀌는 것은 순간이다.

 

현대의 표준 계약서에서 전염병과 같은 자연재앙을 의미하는 불가항력 (force majeure)은 신적 행위(acts of God)라는 용어로도 옮겨진다. 신적 행위란 다른 말로 신의 심판이었다. 추기경과 주교들을 포함한 성직자들도 전염병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현실은 교회 권위의 추락으로도 이어졌다. 종교적 고행이 흑사병이라는 재앙을 이겨내지 못하게 되자, 그 재앙의 원인을 다른 데서 찾게 되었다. 그 악의 근원으로 유대인들이 선택되었다. 중세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생관념이 발달한 유대인들이 집단 거주촌인 게토 지역은 흑사병의 피해가 적었다. 피해자인 기독교인과 가해자인 유대인들의 구도가 만들어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유럽 사회의 유대인 차별과 혐오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 재생산 되었다. 15세기 중엽부터는 유럽 대륙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조치로 확대되었다. 유럽 기독교는 타자에 대한 포용 대신 배제와 억압을 선택했다. 더 선명하게 표현하자면 선택이기 보다는 그 외의 다른 선택지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전염병은 당대 종교의 수준을 가늠하게 해 주는 사건들이었다. 전염병 자체에 대한 대응보다는 전염병의 의미를 종교적으로 읽고 해석하려는 시도는 그 대부분의 선택지가 배제와 혐오이다. 배제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인식하는 것이고, 혐오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배제되던 이들의 존재가 드러났을 때의 반응이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오늘 한국교회의 반응은 이 중세교회의 반응과 큰 차이를 찾을 수 없다. 공통점은 여전히 신적 행위로 자연재해를 이해하는 시각과, 그 원인을 찾아내어 그 대상을 타자화하는 시도이다. 이는 광기로 연결된다. 전염병과 같은 재해 앞에서 교회 역사를 돌아볼 때의 유의미한 성찰이라면, 과거 교회가 빠졌던 배제와 혐오라는 반응을 극복하고 성숙한 자세를 사회 속에서 보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