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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코로나19와 한국교회

온라인예배, 동사에서 명사가 된 예배 / 이은경

 

이은경 (NCCK 교육위원, 감리교신학대학교)

 

우리 교회도 몇 주 전부터 온라인 영상예배를 드리고 있다. 물론 교회가 자발적 의지로 온라인예배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교인들 중에는 ‘그래도’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다 3월 중순을 넘어서면서부터 교회와 같은 종교시설과 요양원 등에서 집단감염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불안과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교회들은 떠밀리듯 현장 예배를 중지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처음으로 ‘온라인 영상예배’라는 것을 경험한 것은 20년 전쯤이다. 90년대 후반, 잠시 일본에 머물던 때에 현지 유학생과 함께 도쿄의 순복음교회 예배에 참석했던 적이 있다. 뜨거운 찬양과 함께 예배가 시작되고 설교 시간이 다가왔는데, 목사님께서 설교단에 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찰나, 당시 여의도 순복음교회 담임 목사의 설교가 영상으로 흘러나왔다.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당시에는 통신이나 온라인 기술이 그리 발달한 것도 아니었는데, 한국에 있는 목사의 설교를 해외에서 듣다니...

 

예배가 끝난 후 함께 갔던 유학생에게 물어보니, 전세계에 있는 순복음교회 지교회들은 매 주일 한국에 있는 담임목사의 설교를 영상으로 보며 온라인 설교를 듣는다고 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한국에서도 대형교회들이 세운 지교회들에서 본 교회 담임목사의 설교를 온라인으로 들으며 예배하는 진풍경을 보게 되었다.

 

1월 중순에 우리나라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첫 확진자가 나온 이후, 3월 초부터 교회들은 현장예배를 중지하고, 온라인으로만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벌써 한 달째 영상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실시간 온라인예배, 영상녹화 예배, 음성예배 등 다양한 방식이 동원되고 있다. 물론 개교회의 상황에 따라 그 질과 양에 있어서도 천차만별이다.

 

얼마 전 집단감염이 발생한 ‘은혜의 강 교회’ 사례가 보여주듯, 온라인예배에 있어서도 크고 작은 교회들간의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도 이미 영상을 예배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던 대형교회들은 오프라인 예배를 온라인예배로 전환하는데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미자립교회를 포함한 작은 교회들과 그동안 자발적으로 온라인 사용을 자제해 오던 교회들에서는 기술적으로나 인적 자원에 있어서 뜻하지 않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필자가 속한 교회는 도시의 일반적인 중형교회이다. 그동안에도 주일 성인예배 설교 동영상은 매 주일 교회 홈페이지와 유튜브 등을 통해 교인들이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리 어렵지 않게 예배 전체를 미리 녹화하고 교인들에게 예배 동영상을 제공할 수 있었다.

 

온라인예배를 드리는 교회의 대다수는 이처럼 성인들을 위한 예배 영상을 제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대형교회의 경우에는 유치부, 아동부, 청소년부, 청년부 등의 교회학교를 위한 예배 영상을 별로도 제공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영상물을 제작, 배포할 수 없는 교회들에서는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영상예배를 드리거나, 혹은 대중적으로 알려진 교회나 연구소, 선교기관 등에서 제공하는 영상물을 교회학교 구성원들에게 전송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이 예배일까? 특히 교회학교를 위한 예배의 경우에 말이다. 필자는 예배학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본질을 논하거나 온라인예배나 영상예배는 예배가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무리 멋지고 훌륭하며,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고 해도, ‘현장 예배가 가진 교육적 효과와 역할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장자크 폰 알멘(Jean-Jacques von Allmem)의 말처럼, 교회는 예배를 통해 교회의 본질을 분명히 하고, 교회의 존재 이유를 고백한다. 다시 말해, 교회공동체는 예배를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회중의 참여가 없는 예배, 선포는 있으나 응답이 불가능한 예배에서 영적인 체험이나 고백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며, 이러한 상황은 특히 교회학교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교육학적으로 볼 때, 온라인예배의 가장 큰 단점은 상호적 소통이 일어날 수 없는 일방적 구조라는 사실이다.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끊임없는 성찰과 고백을 가능케 하는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가능하다. 예배가 일어나는 공간과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예배에 사용되는 음악, 상징물 그리고 현장의 분위기 등에서부터 신앙교육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현장 예배에 참여함으로써만 가능하다. 특히 세례예식, 성만찬예식, 결혼예식, 장례예식 등의 특수예배와 곧 다가올 부활절, 성령강림절, 성탄절 등의 절기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간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예배를 포함한 일상의 모든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으려면, 예배를 위한 교육도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교회교육, 기독교교육의 ‘핵심’이면서 동시에 신앙교육이 일어나는 ‘장’이다. 그러나 그러한 ‘장’이 존재하지 않는 온라인예배, 영상예배는 신앙교육과 교회교육의 유용한 도구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일상적인 주일예배를 대신할 수는 없다. 만남과 체험이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떠한 교육적 행위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히로나카 나오유키는 『중독의 모든 것』이라는 책에서, 중독을 유발하는 사회적 원인의 하나로 공동체에 바탕을 둔 축제의 공간을 잃어버리고, 일상에서 그 ‘유사품’을 찾게 된 것을 꼽는다.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있어서는 학교가 그러한 공간이 되었다. 그런데 요사이 교회에서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드리는 예배가 불가능해지자, 그 대체품을 찾아내어 가상의 축제를 벌이고 있다. 물론 최근의 현상은 일시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급진적 교육자이자 신부였던 이반 일리치(Ivan llich)도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에서 “지금까지 만족스러운 행위를 표현할 때 쓰던 말은 대부분이 ‘동사’였지만, 이제는 오로지 수동적 소비를 하도록 고안된 상품을 가리키는 ‘명사’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40년 전에 나온 일리치의 이 진단은 오늘날 더욱 진화하고 있다. 예전에는 ‘놀다’, ‘쉬다’, ‘배우다’라고 했던 것들이 ‘게임’, ‘힐링’, ‘학점’이라는 명사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 명사마저도 그냥 명사가 아니라, ‘꼴 없는 이름씨’인 추상명사(抽象名詞)로 바뀌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게임’, ‘사이버 게임’, ‘가상 현실’, ‘가상화폐’가 생기더니, 이제는 예배마저도 온라인으로 영상을 통해 ‘보게’ 되었다.

 

지금의 상황은 물론 일시적이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현장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임시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온라인예배가 편하고, 유용하다고 하여 이 형식을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꼴 없는 이름씨’(추상명사)들로 만들어진 가상의 축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인간이 몸을 갖고 태어난 이유는 몸을 통해 일상을 살라는 것이고, 예배 역시 몸으로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속히 코로나 바이러스가 잠잠해져서 일상의 소중한 경험들을 ‘몸’으로 할 수 있는 날이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