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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가학적 폭력의 사회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지만 / 서정민갑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

 

어렸을 때에는 선과 악이 명확했다. 세상은 나쁜 편 아니면 우리 편으로 선명하게 나눌 수 있었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나쁜 사람은 생김새부터 달랐다. 착한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세상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착한 사람이고자 했으나, 자주 나쁜 사람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나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사람이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누군가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사람에 대해 단언하기 어려워졌다. 대부분의 인간은 이중적이며 모순덩어리였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리고 자신의 모순을 직시하며 어둠에 잡아먹히지 않으려 얼마나 애쓰는지가 다를 뿐이었다.


그러다보니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계속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2000년 이상 인류가 쌓아온 문명과 도덕, 윤리와 종교, 과학과 예술의 성취와 비교하면 여전히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이다. 숨이 막힌다고, 이러다 죽겠다고 빌어도 무고한 사람의 목을 눌러 죽게 만든다. 미국 경찰이 한 일이다. 늙은 아파트 경비원을 괴롭혀 스스로 목숨을 버리게 만들고도 죄책감이 없다. 어린이를 학대해 죽게 만드는 사건은 잊을만하면 다시 이어진다. 세상 곳곳의 가학적 폭력은 이뿐만이 아니다. 끔찍한 일들의 목록만으로 원고를 다 채울 수 있을 정도이다. 날마다 뉴스를 보기 괴로울 만큼 잔인한 일들은 계속 벌어진다. 어렵게 쌓은 인류애를 무너뜨리는 일들의 연속이다. 인간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가지기 어렵다.


왜 이럴까. 인간은 왜 이렇게 모질고 잔인할까. 누군가는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유전자를 탓한다. 또 누군가는 자본주의 사회와 가부장제 사회가 만든 불평등과 소외를 탓한다.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타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유전자가 달라지기 전까지, 혹은 인간 사회의 불평등이 완전히 소멸하기 전까지 가학적 폭력은 멈출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유전자를 변이시키는 일이거나, 자본주의 사회와 가부장제 사회를 무너뜨리는 일 뿐일까. 서로를 타자라고 인식하지 않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인간은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들을 끊임없이 분리한다. 피부색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국가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세대가 다르고, 계급이 다르고, 지역이 다르고, 이데올로기가 다르면 남이다. 하나라도 겹치면 우리 편이지만 동시에 하나라도 다르면 남이다. 남의 편이다. 같은 편끼리도 다투는 인간이 남이거나 남의 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다정하고 친절하기는 쉽지 않을지 모른다.


어떻게 하면 알건 모르건, 정체성이 같건 다르건 무시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서로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길 수 있을까. 아니 귀하게 여기지 않더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미 수많은 이들이 헤아릴 수 없을만큼 무수한 분석과 대안을 이야기 했다. 말의 성찬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몇 마디의 이야기를 거든다면, 역시나 국가와 사회의 역할을 가장 먼저 묻지 않을 수 없다. 2020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사태에서 확인했듯 국가는 여전히 사회를 통합하고 관리하며 운영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구체적이며 강력한 단위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를 잘 극복하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의 가장 큰 차이는 어떤 국가, 어떤 정부인지이다. 물론 특정한 정부가 가능하거나 불가능한 이유는 어떤 사회가 구성되어 있는지, 언론과 자본 등의 역량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럼에도 국가와 정부는 이 모든 사회적 역량을 대표한다.


무엇보다 국가가 얼마나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는데 최선을 다하는지에 따라 그 사회의 갈등과 적대의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상위 1%, 혹은 상위 10%와 나머지 사이의 삶의 격차가 큰 나라에서 선의만으로 존중과 배려를 끌어내기는 불가능하다. 얼마나 공부를 잘했고, 시험을 잘 봤는지가 평생의 삶을 좌우해버리는 나라에서 서로를 무시하거나 증오하지 않기는 어렵다. 어떤 성(性)으로 태어났는지 혹은 어떤 성(性)으로 자신을 정체화하는지에 따라 삶이 달라지는 나라,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가 평생을 결정해버리는 나라에서 공동체 의식과 인간에 대한 호의를 가질 수 있을까.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이야기 하듯 국가는 사람들에게 많이 먹여야 한다.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할 수 있도록 강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지 절차적으로 공정한데서 그치지 않고, 실질적으로 평등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어떠한 형태로든 차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법과 제도를 만들고 집행하며 계속 보완해야 한다. 인식 개선을 위한 교육과 캠페인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교육과 캠페인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타자나 사회적 약자에게 가학적 폭력과 불평등을 저지르는 이들을 엄밀하게 처벌해야 한다. 그러면 안된다고 신호를 보내야 한다. n번방을 운영한 이들 뿐만 아니라, n번방에 참여한 이들의 명단을 모두 공개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인간은 사회적 훈련을 통해서만 비로소 온전한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금기와 억압으로서가 아니라 존중과 배려로 해야 할 일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 밖으로 일탈할 때 국가가 좌시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보내야 한다. 자신 혹은 특정 집단과 세력의 자유로워 보이는 태도가 타인을 억압하고 괴롭힐 때는 자유를 억압하거나 한정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보편화되게 만들어야 한다. 특정한 정체성이나 권력을 가졌다고 무한정 많이 누릴 수 있다거나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실질적인 정책과 집행으로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 국가나 사회는 바로 이러한 인식 위에서만 온전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 내가 약자이거나 다른 정체성을 가진 존재라 해도 국가/정부/사회가 나를 지켜준다는 인식이 있어야 비로소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 하면 안되는 일을 정확하게 알게 될 때 우리는 온전한 공동체의 시민이 될 수 있다. 민족주의 담론의 신화나 다른 적을 만드는 방식으로 대체해서는 안될 일이다. 차별금지법의 도입과 집행, 교육이 시급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시를 읽는 마음, 음악을 듣는 마음으로 마음을 열고 다른 존재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가는 일이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술작품을 통해 폭력과 차별, 불평등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고, 끊임없이 다른 존재가 되어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어떤 법과 제도, 지원이 더 필요한지 알게 될 것이다.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노력이 쌓이면 상식이 바뀌고 교양이 바뀌고 태도가 바뀔 것이다.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지만, 울며 잠 못 드는 이들이 줄어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시간을 잠시라도 늘려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