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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가학적 폭력의 사회

우리는 왜 약자를 증오하는가? / 한수현

 

한수현(감리교신학대학교)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차별, 배제, 그리고 폭력이란 말이 일상화 되고 있다. 끊임없이 일어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여러 사건과 사고들은 누군가에 대한 폭력이 대부분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먼저 폭력의 피해자에게 관심을 둔다. 여성이라서, 노동자라서, 을이라서, 어린아이라서 누군가가 자행하는 폭력에 쉽게 노출된다고 슬퍼하곤 한다. 그러면서 누군가는 누가 폭력의 제일 하층에 자리하고 있는지 고민한다. 또한 누군가는 자신이야말로 가장 슬픈 을이라고 절망하기도 한다. 결국 떠오른 한가지 질문. “우리는 왜 약자를 증오하는가?”


약자는 보호의 대상이 아닌가? 그런데 왜 약자는 더더욱 폭력의 대상이 되는가? 작금의 상황에 보여지는 가족 내의 아동학대, 사이버 폭력, 학교 폭력, 갑질 문화 등 약자에 대한 혐오와 폭력의 여러 원인 분석과 해법들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특별히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무한경쟁과 경제적 격차에 대한 연구와 공동체적 해결 방안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6월 사건과 신학에 실리는 여러 글들이 돌파구가 되리라 생각한다.


거기에 아울러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져본다. “우리가 언제 약자를 증오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다시 말해보자. 기억할 수 있는 인간의 역사에서 약자가 보호받고 사랑받았던 시대가 있었던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약자에 대한 폭력과 증오에 대한 원인은 변해왔고 그 처방 또한 변해왔지만, 약자에 대한 폭력은 멈춘 적이 없다. 약자에 대한 폭력이 멈춘 시대가 없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약자에 대한 폭력은 과거와 현재를 꿰뚫는 주제란 의미이다.


켜켜히 쌓인 여러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현실 의식과 함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인간의 존재적 질문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약자에 대한 폭력이라는 수많은 사건들은 이에 대한 신학적 질문에 연결될 수 있다. 감히 논해본다면 약자에 대한 증오와 폭력은 바로 성서를 꿰뚫는 주제이다. ‘하나’의 주제가 아니라 ‘오직 하나’의 주제일지도 모른다.


히브리 성서라 불리는 구약부터 신약성서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바로 인간의 제국과 하나님 나라의 충돌이다. 앗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에 이르는 제국의 역사를 살아냈던 나그네 백성 이스라엘의 이야기이다. 당시 제국들은 스스로 신에 의해 선택받은 나라라 믿었고 신의 이름으로 대륙을 통치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즉 야곱의 자손이자 아브라함의 자녀들은 끊임없이 새롭게 나타난 제국이 신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인지를 물어야 했다.


이스라엘의 질문은 단순했다. “그 곳에 약자에 대한 정의가 있는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정의가 살아있는가? 바로 이 질문이 신의 제국이냐 인간의 욕망의 제국이냐를 가름하는 그들의 리트머스였다. 물론 이스라엘 자신 또한 약자들을 향한 폭력이 없는 나라 만들기를 실패했다. 예언자들을 핍박하고 몰아낸 이스라엘의 왕들을 구약성서가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을 섬기는 자들이라 비난했던 것이 증명한다. 그럼 어떻게 약자를 위한 정의가 숨쉬는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


약자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약자가 되는 길이 새로운 희망이라 말한 것이 복음이었다. 바울은 그의 십자가 신학을 고린도전서에서 소개한다. 십자가 신학이란 약함을 통해 강함을 새롭게 정의하는 것이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지내며 사자가 짚을 먹는 곳(이사야 11:6; 65:25)을 이루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루는 새로운 세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리트머스는 우리 사회에 있는 약자에 대한 증오와 폭력이 될 것이다.


문제는 여전히 교회와 신학의 관심이 우리 안에 있는 약자와 그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교회라는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에 머물러 있다는 것에 있다. 약자를 돕고 구원하는 것이 모든 복음의 유일한 목적은 아닐지 몰라도, 약자에 대한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는 복음이 더 이상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하는 곳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최근 미국사회의 가장 큰 이슈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라 흑인들에 대한 경찰의 폭력사건이라고 한다. 종교로서의 개신교가 여전히 정치 사회적 힘을 발휘하는 미국이나 한국사회에 유독 약자에 대한 폭력이 끊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사건과 신학이 논하는 폭력에 대한 논의가 끝이 아니라 힘찬 시작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