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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팬데믹스;파국의 징후들

기후위기, 파국적 삶과 말씀의 신앙 / 송진순

 

송진순(이화여자대학교)

 

2020년 3월 11일, 팬데믹이 선포됐다. 국가 간 경계를 넘어 일일 생활권이 된 세계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는 급속하고 지속적으로 퍼져나갔다. 마스크 대란과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진통 덕분에 잠시 소강상태였던 코로나19는 8월 중순을 기점으로 재점화되었다. 잠재된 불안은 증폭되었고, 코로나 패닉과 코로나 앵그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는 우리 안에 억압과 감시 그리고 타인에 대한 혐오를 가속화했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모든 인류에게 닥친 재앙, 우리는 팬데믹의 중심에 서 있다.



코로나19가 일상이 될 즈음, 우리를 맞이한 것은 폭염이 아니라 호우와 태풍이었다. 50일이 넘는 긴 장마로 인해 8000명의 이재민과 1100건의 산사태가 발생했고, 전국 각지의 축사와 농경지가 침수되고, 5000곳의 도로와 교량이 파손됐다. 경제적 손실은 막대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앞두고 첨단 과학기술과 물적 풍요를 구가하는 지금, 화면에는 시시각각 호우경보와 함께 소 떼, 돼지 떼가 물에 떠내려가고, 사람이 지붕 위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풍경으로 가득했다. 인공수초섬을 보수하던 공무원이 실종됐고, 불어난 물을 피하려던 아이가 부모의 손을 놓쳤으며, 새벽에 들이닥친 토사에 모녀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평생을 일궈낸 인삼밭, 논밭을 갈아엎는 농민들, 가축 떼가 수장되고 양식장이 초토화되는 것을 손 놓고 지켜봐야 했던 농가들, 이들에게 닥친 현실은 수치, 그래프, 경제적 손실이라는 언어로는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 긴박한 위기감이야 숫자로 환산 가능하겠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일터를 잃고 삶이 파괴된 이들의 상실감과 참담함은 환산 불가능하다.

 

위기는 항상 사회의 취약한 부분을 공격한다. 2020년 기록적인 폭우, 2019년 연이은 태풍들과 평균 3℃가 넘는 겨울, 그리고 2018년 40℃를 넘는 초유의 폭염은 현장 노동자, 어린이, 노약자에게 먼저 찾아갔고, 소리 내지 못하는 동식물의 숨을 앗아갔으며, 농가, 해안, 산기슭과 같이 주변부 깊숙한 곳부터 침투했다. 폭염과 한파는 물론 사막화, 해수면 상승, 나방, 메뚜기같은 곤충의 습격 등 전 세계에서 속출하는 이상기후의 징조들은 기후변화가 임계치에 이르렀음을 절박하게 경고했다. 지구 생명체의 공멸을 말하기 전에 기후변화는 사회의 취약 계층, 즉 불평등한 경제 구조의 최전선에 있는 이들의 삶을 파괴했다. 인간의 탐욕과 이기성이 빚어낸 자본주의의 성장 신화가 자연생태계를 약탈하고 착취한 결과라는 것을, 그리고 기후변화의 참혹한 결과는 제3세계와 이 사회의 가장 낮은 자들의 몫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멈춰 서기를 주저한다. 기후위기가 아닌 기후재앙으로 다가온 현실에 대응하기보다는 지금의 풍요와 성장 신화가 주는 안락함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빚어낸 불평등의 늪에서 질식하면서도 자본을 향한 욕망, 그 판타지 서사에서 헤어나오기를 거부한다.

 

코로나19가 맹렬하게 확산되는 가운데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은 역학조사 역량의 한계를 고하면서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심정으로 거리두기를 해야한다고 호소했다(8.29).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시시각각 다가오는 기후재앙 앞에서도 우리는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그 옛날, 유대인들은 물러설 곳이 없을 때, 한계 상황에 이르렀을 때, 다른 방식의 판타지 서사를 창조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였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갈망은 역사에 대한 회피나 순진무구한 희망이 아니었다. 끝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역사 한복판에서 그들은 제의나 기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성서의 하나님은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다. 말씀은 역사 속에서 해석되고 삶의 뜻으로 엮어 나온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매순간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서는 인간, 결단의 삶을 사는 인간은 종교를 좌절감과 불안을 해소하거나 일차적 욕구와 본능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전락시키지 않는다. 말씀은 생각의 문을 두드리고 나와 하나님과의 경계, 타인과의 경계를 넘어 초월의 의식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초월에 대한 의식은 인간과 역사에 대한 통찰과 나아가 다른 세상에 대한 창의적인 상상력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구는 백일몽이나 현실 도피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신학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세계에 대한 의지이다. 말씀에 기초한 신앙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모두의 의지를 이뤄낸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쩌면 코로나19보다 더 절박한 기후위기 앞에서 말씀을 들을 자세가 되어 있는가 묻게 된다. 기독교 신앙은 말씀에 서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이 인간과 자연을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파괴하는 지금, 우리는 어떤 판타지 서사에 몸을 맡기고 있는가. 고통에 무감하고 생각하지 않은 채 본능과 이기성의 충족을 축복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서사인가, 아니면 지금을 마지막으로 여기고 현실을 직시하는 저항적 삶을 축복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서사인가? 신앙인은 마지막을 사는 사람들이다. 마지막을 살아내며 하나님 나라, ‘그 때’를 꿈꿀 수 있기에 지금 여기가 풍요로워진다는 역설을 아는 사람들이다. 위기는 취약한 곳을 공격한다. 그러나 취약하기에 우리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