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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이 시대 영웅에 대한 이야기; 정치, 경제, 문화 엘리트들이 만들어 놓

살기 좋은 개천을 지향하는 교육: 서바이벌 사회와 강자동일시 시대의 교육적 대안을 위하여 / 하태욱

 

하태욱(건신대학원대학교 대안교육학과 교수)



최근에 <오징어게임>이라는 드라마가 매우 재미있다고 주변에서들 권하는데 선뜻 보기가 망설여진다. 승자독식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게임에 나서는 줄거리라는데, 안 그래도 서로에게 험악한 세상, 쉬는 시간까지 그 이야기를 굳이 봐야하나 싶어 손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선거철이 가까워져서 더 그렇기도 하겠지만 페이스북만 열어도 네 편 내 편을 갈라놓고 어찌나 험한 말들을 해대는지 이게 과연 소통의 장인지 아귀다툼의 장인지 모르겠다. 도대체 왜 이렇게들 서로에게 악다구니를 쓰면서 살게 되었을까? 죽이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환상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생존투쟁에 나서게 하는 것이리라. 그러니 모든 지향은 ‘성공신화’로 모아진다. 나도 언젠가는 저 위에 올라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붙잡고 오늘도 각자의 ‘전선’에 나선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너무나 미약하고 성공의 목표는 너무나 높다. 미디어가 선전하는 이 승자들의 지위– SKY졸업장, 억대연봉, 비싼 차, 브랜드 아파트, ‘쿨’하고 ‘힙’한 라이프 스타일 –는 선망의 대상이지만 실질적으로 이를 획득하기에는 소수점 이하의 경쟁률을 뚫어야만 가능한 결과물이다. 이 괴리를 떨쳐버리기 위한 심리적 전략은 ‘동일시’다. 심리학에서는 ‘타인(혹은 집단)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자신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싶어 하는 경향’인 동일시를 인간의 기본적 방어기제로 본다. 단순한 롤모델을 넘어 강자의 (일부) 속성을 내면화 하고 절대화하는 현상이 드러난다. 가진 자와 힘 있는 자에 대한 선망을 넘어 숭배와 동일시에 이른 사회, 경영학자로서 사회와 교육에 깊은 사유를 보여준 강수돌 교수는 이를 ‘강자동일시’라고 이름 짓는다. 일제강점기나 독재시대에 대한 강한 향수, 강대국에 대한 비현실적 선망, 재벌과 권력가에 대한 자발적 굴종은 강자동일시의 사회적 현상이다.
 
그런데 동시에 한쪽에서는 ‘공정’이 화두란다. 이제 퇴임이 멀지 않은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에는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표현이 들어있었다. 물론 사회적 정의의 문제를 이번 정부만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비켜가기는 어려운 듯 보인다. 대중들이 고위인사의 자녀문제와 부동산 이슈에 이토록 분노하게 된 배경에는 올라갈 수 없는 사다리와 쉽게 주어지는 에스컬레이터에 대한 절망이 배경에 놓인다. 즉, 독자생존과 승자독식, 그리고 공정성의 배신은 결국 동전의 앞뒷면처럼 반대되는 이야기인 동시에 한 몸으로 붙어있다. 사회적 안전망 없이 독자생존에 내 몰린 개인은 승자독식의 환상으로 버티지만 그나마 경쟁만큼은 공정하게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마저 무너질 때 결국 남는 것은 분노뿐이다. 최근 이대남(20대 남성)들이 분노하는 논리는 극단적인 측면이 크지만, ‘신의 아들-장군의 아들-사람의 아들’이 자조적 농담으로 통용된 지도 이미 오래인 현실 속에서 나에게만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그들이 애잔하기도 하다.
 
신문 사회면을 보면서는 그저 이런 문제들을 ‘쯧쯧’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고민은 그 대안을 고민하고 준비하고 꾸준히 실천함으로써 어떻게든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데 있다. ‘개천에서 용은 안 나오고 욕만 나오는 시대’에 교육은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그래도 열심히 하면 ‘용’이 될 수 있다고, 우리가 하나라도 더 많은 용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과연 교육이 해야 할 진짜 역할일까에 대한 근본적 고민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의 공교육은 모두 어떻게 하면 좋은 대학을 보낼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홍익인간의 정신을 기르기 위한 백년지대계 따위는 도덕책에 나오는 의미 없는 수사일 뿐, 어떻게 해서든 승리해서 그 결과물을 ‘독식’하면 된다는 생각을 강화하는 기관임을 노골화해왔기 때문이다. 대학입시 결과를 자랑스럽게 현수막으로 내거는 공교육 학교들의 모습은 이곳이 사적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관임을 실토하는 것이다. 이런 교육기관 아래서 개인의 부귀출세를 목표로 달려온 아이들의 모습은 슬프고 아프다. ‘10억을 준다면 1년간 감옥에 가겠느냐’는 설문에 긍정 답변한 학생의 비율은 2012년 초 12%, 중 28%, 고 44%에서 2015년 초 17%, 중 39%, 고 56%을 거쳐, 2019년 초 23%, 중 42%, 고 57%로 늘었다. 윤리나 가치 따위는 돈 앞에 무기력해지는 시대에 교육이 무기력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교육이 오히려 이런 물신주의를 조장하고 장려해온 것은 아닌지 짚어야 한다. 물신주의로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아이들은 상처받고 신음한다. 건강함을 잃은 사회가 아픈 아이들을 양산하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몇 년 전 이스라엘에서 온 교육혁신가 야콥 헥트 선생과 학생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장래희망이 무엇이냐고 묻자 한 학생은 ‘건물주’라고 대답했다. 선생은 아주 훌륭한 꿈이라고 칭찬하시면서 건물주가 되어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다시 물으셨다. 학생은 건물주가 되어 아무것도 안하고 살면 좋겠다고 답했다, 선생님은 건물주가 되는 것은 그 건물로 무언가를 하고 싶은 목표를 이행하려는 수단일터인데 그 목표는 무엇이냐고 다시 물었다. 언어적 문제로 소통이 안 되고 있는가 피차 어리둥절해하는데, 양쪽 입장을 다 아는 통역으로서 참 난처하고 부끄러웠던 상황이었다. 선생은 벤처기업의 천국인 이스라엘 청소년들은 무언가 자신이 꿈꾸는 것을 향해 벤처기업을 세워 성취해보겠다는 장래희망을 갖고 있다고 덧붙이셨다. 강자동일시와 꿈이 없는 세대를 탈피할 교육혁신 없이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미래는 참담하고 슬프다.

우리나라 대안교육운동 초기부터 중요한 리더였던 제천간디학교 설립자 양희창 선생은 대안교육운동이 ‘새로운 문명을 향한 대안사회 운동’이라고 단언해왔다. 다행히 미약하나마 개인의 자유, 민주주의와 시민성, 그리고 연대를 위한 공동체를 강조하는 교육적 흐름들이 대두되고 있다. 대안학교, 혁신학교, 미래학교, 마을교육공동체 모두 이런 가치의 다른 이름들이다. 물론 사업화되면서 변질되는 사례들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원뜻을 살리려는 풀뿌리 노력들이 우리 사회 소중한 전범으로 존재한다. 개천의 용을 만들기 보다는 개천 그 자체로 살기 좋은 곳이어야 한다.
 
신앙과 교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겨자씨만한 믿음의 크리스천이지만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이 교육과 학교만의 이야기는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최근에는 마을목회에 관심있어 하시는 분들로부터 대안학교나 마을교육공동체에 대한 질문들을 많이 받기도 한다. 그 관심들에도 다시 희망을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