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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장애인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 탈시설권리 투쟁

장애인 인권운동, Zero-Base(제로-베이스)를 만드는 것 / 이정훈

 

이정훈 (NCCK 장애인소위원회 위원)

 

‘출근길 지하철 타기 투쟁’으로 인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와 ‘박경석’ 전장연 대표가 만들어낸 파장, 이에 대한 이준석의 혐오 발언으로 인해 장애인 인권운동이 꿈에도 소원했던 전국구가 되었다. 누군가의 말대로 21년간이나 외쳤는데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던 한국 사회가 드디어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장애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들어보려는 마음의 준비는 된 것으로 보인다.

 

먼저, 글 끝이 아니라, 글 앞에 사족을 붙여본다. 전장연이 장애인 인권운동을 모두 대변하느냐에 대한 반발이 있을 수 있겠다. 물론 아니다. 장애인 인권운동의 스펙트럼도 굉장히 넓다. 마치 한국사회 변화를 위해 투쟁했던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처럼 장애인 인권운동도 동일하다는 말이다. 다만 그간, 소위 전장연이 바닥에서 해왔던 운동은 무시할 수 없을만한 성과를 거둔 것에 대해 누구도 반박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대표적인 것만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 도입’, ‘저상버스 도입’,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 등이다.

 

다시 돌아가 전장연으로 대표되는 ‘장애-민중들’의 요구는 단순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여기에 장애인 인권문제의 핵심이 모두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을 압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동권’과 ‘탈시설’이다.

 

이동권은 말 그대로 장애인이 차별과 배제 없이 이동의 권리를 향유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하철 엘리베이터 문제로만 한정하는 건 사실 오해의 소지가 크다. 가령,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교통수단은 시외버스와 고속버스이다.

 

문제는 이 시외버스와 고속버스에 장애인이 탑승할 수 있는 편의 장치가 마련된 것이 전국을 통틀어 한 대도 없다. 매년 명절만 되면 전장연은 버스터미널을 점거하고 귀향길 버스 타기 투쟁을 진행했다. 이 운동도 몇 십 년째 해왔지만 겨우 4년 전에야 고속버스 3대에 편의시설을 설치하고 시범운영을 시작했다. 시외버스는 아직도 묵묵부답인 상태이다.

 

그럼 KTX나 SRT 등 고속열차들은 장애인 탑승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고, 장애인 할인도 받을 수 있으니 이용하면 되지 않겠냐는 말이 있을 수 있다. 일견 맞는 말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이 고속열차들이 커버하는 지역이 시외버스나 고속버스를 능가하는가 하고 되묻는다면 논쟁의 여지도 없다. 우스갯소리로 고속열차가 집 앞까지 가지 않는다. 즉 장애인 이동권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또 하나 전장연의 강력한 주장 중에 하나인 ‘탈시설’ 문제를 언급해 보자. 액면 그대로 이 단어를 이해해 보자면, ‘규모’가 어떻게 되었든 장애인 거주(보호) 시설에서 생활하던 장애인이 거주 시설을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탈(脫)’시설이다.

 

하지만 이 단어를 이렇게만 이해하는 것도 논쟁의 소지가 많다. 시설에서 왜 나오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장애인 거주 시설이 생활하기에 더 이점이 많지 않느냐는 반론이 제기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탈시설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탈시설은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일하게 지역 사회에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처음 조어가 될 때 핵심을 이야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지만 표면적 이해에만 머물면 문제가 많다.

 

조금 옆으로 비껴나는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다. 전장연이 처음 탈시설을 주장했을 때 장애인 거주 시설을 운영하는 주체들이나 학계에서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되었다. ‘장애인 거주 시설의 ‘규모’를 줄이면 되는 것 아니냐’, ‘장애인 거주 시설을 인권적으로 운영하면 되는 것 아니냐’ 혹은 ‘혼자서 숨 쉬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이 어떻게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냐’는 반론이었다. 마치 ‘자신의 집처럼’ 1인 1실이나 혹은 2-3인이 생활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도 간단하다. 마치 ‘자신의 집처럼’이라고 표현하지만 집이란 매매의 각 주체가 있기 마련이다. 1인 1실이든 2-3인이 생활하는 거주 공간이든 계약 주체가 누구냐를 따져 물으면 답은 간단하게 나온다. 지역사회에서 생활할 때 누구든지, 그 주거 형태가 전세가 되었던 소유가 되었든, 계약의 주체는 거주하는 당사자이다. 장애인 거주 시설을 운영하는 주체들이나 학계의 반론에 숨겨진 사실은 1인 1실이든 2-3인실이든 계약의 당사자는 거주 시설을 운영하는 주체이지 장애인 당사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시설의 소규모화’나 ‘인권적 시설 운영’이라는 말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

 

이제 탈시설 문제에 있어 가장 논쟁이 되는 부분을 언급한다. 장애인 거주 시설을 운영하는 주체들은, 앞서 언급했던 대로, 숨 쉬는 것 외에는 혼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장애인이 어떻게 지역사회에서 생활할 수 있냐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투입해야 할 재정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냐는 문제제기이다. 전장연의 요구처럼 24시간 활동지원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활동지원사들에게 지급해야 할 천문학적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 부분은 상상 속의 논쟁이 아니다. 글을 쓰고 있는 필자가 직접 보건복지부 담당 과장에게서 들었던 말이다. 박경석 대표와 필자가 세종시로 내려가는 복지부 과장과 급하게 기차역에서 만났을 당시 “그에 따른 비용을 계산하면 중증장애인 1명당 XX원입니다. 그럴 바에는 거주 시설에서 생활하는 것을 보조하는 게 훨씬 쌉니다.”라고 말했었다. 정말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그것도 복지부 과장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맞다. 여기에 더해 이런 재정부분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장애인 거주 시설을 운영해 왔던 주체나 종사자들의 밥줄은 도대체 누가 책임지느냐는 반발도 발생한다. 한국 사회에 그 많은 장애인 거주 시설을 도대체 어떻게 일거에 다 없앨 수 있고 종사자들이 하루아침에 해고되면 어쩌라는 것이냐 등이다.

 

이에 대한 대답도 간단하다. 전세계에서 장애인 거주 시설 모두 폐쇄한 국가가 한 곳도 없냐를 생각해 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우리보다 GNP나 GDP가 낮은 국가들에서조차 장애인 거주 시설을 폐쇄한 국가도 많다. 그런데 한국이 못한다는 것은 논리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부터 국가가 개입해야 할 지점이다. 국가가 장애인 인권을 고려한다면 의지를 가지고 예산을 편성하고 시행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전장연은 국가 예산을 그렇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국가가 의지를 보인다고 해도 구체적인 예산을 수립하고 집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이에 대한 단적인 예가 바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그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 광화문 지하도에 마련되어 있던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농성장’을 방문하고 제도 개선을 약속했지만 정부가 끝나가는 시점까지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과 똑같다는 말이다.

 

이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장애인 인권운동은 ‘Zero-Base(제로-베이스)’를 유발시키는 것이다. “국가의 예산 등을 백지 상태로 되돌려 결정하게 만드는 것”이고, “장애인 문제 등을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결정하거나 검토하게 만드는 것”이다. 장애인 이동권이나 탈시설은 바로 한국 사회 장애인 문제를 제로-베이스로 만들어 새롭게 하는 출발선일 뿐이다. 즉 이동권이나 탈시설이 궁극적 목표가 아니다. 더 정확하게는 이동권이 완벽하게 보장되고 어떠한 중증의 장애인이라도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질 때 장애인의 인권은 출발선에 서게 되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