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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장애인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 탈시설권리 투쟁

[인트로] 장애인들의 투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 보통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장애인들을 도와주려고 한다. 실제로도 내가 장애인 형님을 부축하며 이동을 할 때면 길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준다. ······· 그러나 만일 그 장애인이 비장애인의 길을 가로막으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한다면, 사람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이렇게 하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 세상 사람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장애인을 시혜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 시선의 진실이 드러난다. 장애인들은 자신의 이동과 교육과 노동을 ‘권리’라고 말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은혜’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

 

황푸하의 이 글이 우리가 4월 사건과 신학의 주제로 “장애인의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 탈시설권리 투쟁”을 삼은 이유를 잘 말해주고 있다. 누군가의 당연한 권리(우리는 이것을 하늘이 내린 권리라는 뜻으로 천부인권이라 부른다.)를 내가 베푸는 은혜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회를 문명사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고 있다. 우리사회가 그러고 있다는 말이다. 경제규모 세계 10위를 꾸준히 유지하며,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도 타고, K-드라마는 연일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자칭 문화선진국인 대한민국 말이다.

 

지난 4월 14일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황푸하는 전동휠체어 장애인들의 바퀴를 축복하며 단 하루를 살더라도 영원한 부활의 하루를 살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는 그 하루가 “할 수 없으니 ‘오늘은 비장애인만이라도 사람처럼 사는 세상’이 아니라, ‘오늘부터 장애인들도 사람처럼 사는 세상’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사람처럼 살 수 있는 세상”이라고 이야기 했다.

 

“······· 단 하루를 살더라도 시체 썩은 냄새 풍기는 죽음의 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삶을 살자고, 그러니까 영원한 하루를 살아내자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권유한다. 나는 내가 하루라도 사람처럼 살고 싶기 때문에, 다시 말해 진정 살아있는 삶을 맛보고 싶기 때문에 장애인 권리 투쟁을 지지한다. ‘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발인가.’ 베다니의 마리아가 모든 이들의 부활을 향한 예수의 발을 축복한 것처럼, ‘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바퀴들인가.’ 우리 교회는 그 휠체어 바퀴에 향유를 부어 축복하기로 했다. ·······”

 

매일 아침 혐오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는 장애인들을 세상의 폭력과 차별로부터 지켜주시고, 그 복된 발이 가는 곳마다 거룩하게 하셔서, 결국에는 모든 혐오와 조롱을 이기고 모든 이들을 구원하는 그 부활을 우리 모두가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4편의 글을 세상으로 보낸다.

 

<사건과 신학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