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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3기/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와 환경 주일

기후위기 대응,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 / 임지희

 

임지희 (기독교환경운동연대 활동가)

 

나는 청년인 내 삶의 자리가 기후 위기 문제를 절박하게 받아들이게 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이 많은데, 어떤 미래를 상상하던 “기후위기”가 그 미래를 가로막았다. 직업을 선택할 때도,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간다고 할 때도, 아이를 낳는다고 할 때도,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기후위기는 피할 수 없는 낭떠러지같이 느껴졌다. ‘기후우울’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기후위기 문제를 바라보면서 겪는 무력감, 죄책감, 불안, 우울 등의 감정과 마음의 상태를 ‘기후우울’이라 부른다. 지난해 6월 세계보건기구는 기후변화가 정신건강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하며 기후변화에 대응할 정신건강 지원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기후위기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동료 시민들의 안부를 묻고 싶다.

내가 환경단체에서 일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많이 받는 질문이 있다. 기후위기가 심각한데 이미 늦은 것 아니냐고 말이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슬프다. 그 말 그대로 현실은 너무도 암울하기에. 환경운동단체에서 일하기를 선택하면서 최악의 시나리오도 생각해보았다. 티핑포인트 1.5℃를 막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 할지라도 지구 온도가 상승하면서 맞이하게 될 달라지는 지구환경과 그에 따른 고통과 아픔 혹은 죽음이 조금이나마 평등하고, 존엄해야하지 않을까란 생각에 다다랐다. 너무 늦은 것 아니냐고 묻는 분들께 나는 대답하고 싶다. 늦었다고. 늦었지만 우리가 변화를 위한 노력을 멈춰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고. 그리스도인이라면 더더욱.

 

이미 우리 곁에 찾아온 기후위기

전 세계적으로 폭우와 폭염, 가뭄, 산불 등 기후재난이 나날이 더욱 빈번하게 대규모로 발생하고 있다. 기후위기는 단지 미래의 일이 아닌 바로 오늘날의 문제로 닥쳐왔다. 기후변화로 인해 생존을 위협받고,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이들이 수백만 명에 이르고 있다. 국제 NGO 자국내난민감시센터(IDMC)에서 올해 5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한 해 동안 발생한 난민 수가 6090만 명에 이른다. 전년에 비해 60% 증가한 수치다. 특히 작년 한 해 발생한 전체 난민 중 기후난민이 3260만명으로 전쟁 난민 2830만명 보다 많은 수를 차지했다.

지난해 세계자연기금에서 발간한 지구생명보고서에 따르면 1970년부터 2018년까지 50년이 채 안 되는 동안 전 세계 야생동물 개체군이 69%가량 감소했으며, 전 세계에 멸종위기에 처해있는 동식물이 약 100만 종에 이른다. 그리고 지구 온도가 상승할 때마다 그 위험성은 높아질 거라 경고한다.

지구에는 무려 1400만 종의 생물들이 살고 있다. 그중에 인류가 밝혀낸 종은 170만 종가량이며, 그중에서도 인간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종은 인류가 밝혀낸 종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인간이 산업화 이후 온실가스를 뿜어대기 전까지 지구는 때에 따라 내리는 비와 알맞은 기온으로 각 생물이 생명의 그물망을 이루며 균형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1400만 종이 숨 쉬고 있는 지구에 “단 한 종”,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지구 온도가 올라가고, 기후시스템이 붕괴되며, 지구 곳곳의 생태계가 파괴되는 전 지구적인 생태위기를 마주했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이다.

IPCC 6차 보고서는 지구 온도 상승의 원인이 인간의 활동 때문임을 명확히 지적했다. 성서는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는(마태복음5:45) 분이라 증언한다. 성서의 관점에서 본다면 기후란, 악인이냐 선인이냐, 의로운 자이냐 불의한 자이냐 상관없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지구에 사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바로 기후이며,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인에게조차 내리시는 은총이 기후인 셈이다. 그런데 이 기후체계가 인간에 의해 무너지고 있다.

 

기후위기와 신앙의 위기

우리는 해와 달과 지구의 움직임부터 시작해 꽃과 벌과 나비, 수많은 동식물이 살아 움직이는 생태 환경적 조건들을 힘입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바쁜 일상, 해야 할 일들에 쫓겨 정작 우리가 생명을 빚지고 살아가고 있는 조건들을 알아채고, 그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품기가 쉽지 않다.

 

‘주님,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께서 지으신 것으로 가득합니다. 저 크고 넓은 바다에는 크고 작은 고기들이 헤아릴 수 없이 우글거립니다(시 104:24-25).

 

시편 말씀에서 시인은 주님께서 지으신 땅과 바다에 수많은 생명이 충만함을 찬양한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생명을 주님의 영을 불어넣어 창조하시고, 다시 새롭게 하시며 돌보심을 노래한다. 땅과 바다에 생명이 가득함을 헤아려보며,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생명이 그 삶을 유지해 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새로움을 불어넣으며 돌보고 계시다 말한다(시 104:27-30). 이 모든 것들의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고 찬양하고 있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지구는 경이로움 그 자체다. “주님!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라고 시편의 시인이 경탄했던 것처럼 지구에는 생명이 가득하다. 땅에는 푸르름이 펼쳐지고, 바다에 파도가 일렁이며, 구름이 제각각의 모양대로 흘러가며 온 땅과 바다에 생명이 충만한 곳,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구다. 지구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신비이며, 경이로운 일인가. 우리를 살게 하고 있는 지구의 동물과 식물 수많은 생명을 기억함으로써, 그리고 나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우주의 거대한 신비를 헤아려봄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입체적이고 선명하게 받아들이고, 고백할 수 있다.

광활한 우주에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지구 위에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는 생명이 하나라도 있는가? 인간은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돌볼 권한을 부여받았지, 탐욕을 부리며, 파괴할 권한을 받은 것이 아니다. 기후 위기로 인해 생명이 가득한 창조 세계가 신음하고 있다. 이는 생존의 위기인 동시에 녹색 은총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신앙의 위기이며, 교회의 위기다.

 

지구 끝까지 교회의 앞마당으로 돌본다면

교회의 앞마당은 어디까지일까? 부동산계약서가 명시하는 곳까지일까? 흐르는 강과 넘실대는 바다, 울창한 숲, 파괴되어 가는 생태계가 우리의 교회일 수는 없을까?

고통 중에서 탄식하는 욥에게 하나님께서 폭풍 속에서 대답하신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 38:4), 아침과 새벽이 어찌 찾아오고,(욥 38:12) 비가 어찌 내리는지 묻는다.(욥 38:28) 욥기 38-39장 100구절 이상에 걸쳐서 우주의 운행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되묻는다. 신학자 캐서린 캘러는 그의 책 『지구정치신학』에서 욥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대답을 통해 인간중심주의적인 사고를 깬다고 지적한다. 우주의 움직임을 세세히 언급하며 근원을 묻는 질문들을 통해 인간 중심적인 시야를 벗어나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돌보시는 광활한 세계를 보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교회는 지금 기후위기 속에서 외치고 계신 지구에 인간만이 살고 있지 않다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수많은 생명이 살고 있다는 음성을 들어야 할 때이다.

‘에코사이드(ecocide, 생태학살)’에 관해 들어봤는가? 에코사이드는 제노사이드(genocide, 인간집단학살)에 빗대어 만들어진 용어로 베트남 전쟁 중 고엽제 살포로 인한 대규모 생태계 파괴 행위의 부정의를 고발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로 인한 피해는 참혹했다. 토양과 숲이 파괴되었고, 당대뿐 아니라 후손 세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각종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베트남은 현재까지 400만명 가량이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세계에서는 에코사이드를 범죄로 규정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 중이다. 지난 3월 유럽 의회 법무위원회가 EU법에 에코사이드를 범죄로 포함시킬 것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으며, 에코사이드 법제화를 추진하고 있다. 또한 베트남, 프랑스, 에콰도르, 우크라이나 등의 국가는 에코사이드가 이미 법률에 포함됐다.

이처럼 세계는 생태계 대규모 파괴를 학살로 명명하며, 범죄로 규정하고, 법으로 규제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들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창조 세계 보전은 교회의 사명이다. 창조 세계를 지키기 위한 더욱 긴급하고 대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

기후위기 시대, 교회 예배당은 기후위기 상황이 너무 통탄스럽다고, 기후위기로 고통받는 생명들을 살려달라고 가슴치며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되고, 각 교회의 당회, 교단 총회는 기후위기 대응을 시급히 실행하기 위해 치열하게 논의하고 방안을 마련하는 자리가 되고, 한국교회의 각 선교지마다 기후재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는 사역이 이루어지면 어떨까?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교회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가진 것들을 기후위기대응을 위해 내어놓아야 할 때다. 각 교단에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전담 기구를 마련하고, 실질적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예산을 편성하고, 인력을 배치해야 한다. 각 교회에서는 교회와 교우들이 속해있는 곳들의 에너지, 식(植), 의(衣), 주(宙) 등을 생태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또한 기후난민들, 기후 위기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지원해야 한다.

이미 창조 세계를 살리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걸음은 시작되었다. 지난 2021년 한국교회협의회에서 2050 탄소중립 선언을 했다. 감리회, 기장, 예장 교단에서는 2050 한국교회 탄소중립 로드맵을 채택하고 이를 이행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선언을 넘어 실천에 박차를 가해야 할 때다.

또한 지구별을 살리기 위한 기도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매달 첫째 주 주일 오후마다 청계천에서 기후걷기기도회가 열린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주 예수여 지구별을 구하소서” 기도를 드리며 걷기기도회를 진행하고 있다. 참여교회가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첫째 계명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며, 둘째 계명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숨결이 충만한 창조 세계가 파괴되고 있으며, 이웃들이 고통당하고 있다. 교회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할 이유가 더 필요한가? 이유는 충분하다. 이제 우리의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