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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3기/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들 / 오세조

 

오세조(NCCK 신학위원장, 팔복루터교회)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12)


들어가는 말

   지난 2월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다녀왔다. 성경에 나오는 지명과 사진으로만 본 약속의 땅을 내 눈으로 직접 봤다. 약속의 땅을 본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약속의 땅에서 내가 본 기억에는 좋은 추억만 있지는 않다. 버스를 타고 약속의 땅을 여행하면, 늘 따라다니는 한 광경이 내 기억과 무의식 속에서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바로 팔레스타인 지역과 유대인 지역을 구분하는 8m 높이의 분리 장벽이다. 이 장벽을 통과할 때면 총을 든 군인들이 양쪽에서 검문한다. 특별히 이 분리 장벽을 팔레스타인 지역 쪽에서 바라보면 제삼자인 내 마음에도 알 수 없는 거부감과 저항감이 든다.

  지난 10월 7일 유대인의 안식일에 팔레스타인 이슬람 저항운동 단체인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 2014년 가자지구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충돌이 다시 발발했다. 지금까지 양측의 충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양측 모두 전면전을 포고함으로써 세계의 우려스러운 시선이 중동으로 다시 집중된다. 중동의 화약고가 위험해졌으며, 앞으로의 상황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올해 2023년은 이스라엘 건국 75주년이지만, 70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강제 이주를 당한 ‘알 나크바’(대재앙) 75주년이기도 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지구촌에 다른 전쟁이 일어났다. 


프리모 레비의 딜레마 [각주:1]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가로 24살 때부터 파시즘에 저항해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운동과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유대인’이라는 죄목으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투옥되었다. 이후 그는 ‘프리모 레비’라는 이름 대신 “174517” 번호로 분류되었으며, 가슴에는 유대인의 상징인 노란색 다윗의 별이 그려졌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는 오직 죽음과의 사투만 있었을 뿐 희망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프리모 레비는 자신이 존엄한 한 인간임을 잊지 않기 위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환경을 탓하지 않고, 항상 옷을 단정하게 입고, 비누가 없을지라도 몸을 깨끗이 했으며, 몸을 꼿꼿이 세웠다. 독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런 행동은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깨닫게 해 주는 행동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나치에 대한 저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는 1년 10개월의 죽음의 시간을 통과해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지옥 같은 이 수용소의 참혹한 경험을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회고록을 통해 세상에 알리고 또한 공개적인 증언을 하여 나치의 광기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러던 중 그는 한 가지 딜레마에 빠진다. 그가 책과 강연을 통해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가둔 나치의 광기와 폭압을 폭로했던 그 시간, 동포인 유대인들은 강대국의 비호 아래 팔레스타인을 무차별하게 공격했기 때문이다. 그가 봤을 때, 피해자였던 유대인들이 이제는 가해자가 되어 나치와 다름이 없는 참혹한 비극을 반복해 낸다. 자신을 가둔 나치나 팔레스타인을 공격한 이스라엘이나 그의 눈에는 서로의 ‘공존’을 거부하며 상대방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한 것이다. 아마 그는 같은 유대인으로서 이것이 부끄럽고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시 「빨치산」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그때처럼 보초를 서면, 적들도 감히 
우리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적들 말인가?


 
   우리 시대 저항의 시인인 이산하는 이 작품 속의 ‘적’은 나치가 아니라, ‘내 안의 적’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우리 안에 있는 적에 대해 자신이 보초를 서야만, 자아(自我)가 무너지지 않고 분열되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나의 보초는 나이고, 우리의 보초는 우리이기 때문이다.”라고 이산하는 말한다. 결국 우리 인간의 문제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이다. 그리고 그 악마가 내가 보초를 서지 않으면 나를 집어삼킬 것이다.


무사 두베의 이야기 [각주:2]

   아프리카 출신의 여성 신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무사 두베(Musa W. Dube, 1964~ )는 자기의 경험을 이렇게 고백한다. “백인 남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그는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는 땅을 가지고 있었다. 그 백인 남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우리 모두 눈을 감고 기도합시다.’ 기도가 끝난 후, 눈을 떠 보니 그 백인 남자는 우리의 땅을 가졌고, 우리는 성경을 가졌다.” 이런 역사적 경험 때문에, 그녀는 제국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기존 성경 해석을 거부하며 ‘탈식민주의 성경 읽기’를 제안한다. 서방 학자들에 의한 전통적인 성경 해석에 매우 익숙한 그리스도인은 그녀의 이런 방법에 대해 불편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방법은 우리에게 성경과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과 해석방법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관점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랜 갈등과 전쟁의 역사를 바라보면 그동안 제국에 의해 통제되고 가려진 모습을 보게 된다. 즉 실제와 현실을 직면하게 된다. 물론 실제와 현실을 직면하는 일만큼 우리에게 괴로운 일은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과거를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이해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새로운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 


만들어진 유대인

   모든 그리스도인은 아닐지라도, 많은 그리스도인은 구약성경을 근거로 유대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추방당해 2000년 동안 나라를 잃어버렸지만, 마침내 유대인들은 야훼에 대한 신앙과 불굴의 의지로 약속의 땅을 다시 찾아 지금 이스라엘을 건국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은 팔레스타인보다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편이다. 그러면 정말로 지금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그 유대인들이 가나안 땅에서 추방당한 원래 유대인들의 직계후손들일까?

   최근 화제작인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룰루 밀러(Lulu Miller)는 분류학자들이 타당한 생물 범주로서 더 이상 “어류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우리 인간의 직관과 관념이 얼마나 허술한 개념인가를 알려준다. [각주:3] 그렇다면 유대인을 포함한 ‘민족’이라는 개념은 실제로 존재하는 걸까? 사회인류학자인 어니스트 겔러(Ernest Gellner, 1925~1995)는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신이 내려 준 자연스러운 인간 분류법이자, 타고난 (중략) 정치적 운명으로 여기는 민족은 일종의 ‘신화’다. 때로는 기존의 문화를 받아들여 민족으로 뒤바뀌고, 때로는 민족을 새롭게 고안하며, 종종 기존의 문화를 삭제하는 민족주의, 그것이 ‘현실’이다”. [각주:4]


   민족과 민족주의는 인간이 만든 일종의 ‘신화’라는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슐로드 산드(Shlomo Sand, 1946~ )는 『만들어진 유대인』 [각주:5] 이라는 그의 책에서 지금의 유대인은 근대 이후 19세기 독일에 거주하던 유대 지식인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이스라엘이라는 땅을 팔레스타인이 아닌 유대인들이 ‘홀로’ 차지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에 대해 과감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면서 산드는 지금의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한 이 역사적 신화가 이제는 이 사회를 붕괴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각주:6] 이런 이유로 경희대 사학과 강인욱 교수는 중앙일보 칼럼에서 이스라엘 건국은 ‘문화재 전쟁의 원조’라고 평가한다. [각주:7] 그러면서 강 교수는 팔레스타인이 역설적으로 고대 이스라엘의 모습과 가장 유사하다고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공존의 첫 단추: 평등과 정의[각주:8]

   한편 우리 인간의 역사 속에 ‘정착민-식민주의와 원주민의 대결’은 다음 세 가지 결과 중 하나로 끝난다. 1) 북아메리카에서처럼 토착민이 제거되거나 완전히 정복되는 경우, 2) 드물지만, 알제리에서처럼 식민주의가 패배하는 경우, 3) 남아프리카, 짐바브웨, 아일랜드에서처럼 타협과 화해의 맥락에서 식민주의가 자신의 패권을 포기하는 경우. [각주:9]
 
  그러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결은 위 세 가지 결과 중 어떤 결과로 끝이 날까? 아무도 예측할 수는 없다. 다만, 타협과 화해의 맥락에서 정착민-식민주의(이스라엘)가 자기의 패권을 포기하고 원주민(팔레스타인)과 공존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접근 방법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랜 갈등을 해결하고 공존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 모든 주민의 이익을 위해 이 지역 발전을 촉진할 것이다. 이스라엘국은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내다보았던 것처럼 자유, 정의, 평화에 토대를 둘 것이다. 이스라엘국은 종교, 인종,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주민에게 사회적, 정치적 권리의 완전한 평등을 보장할 것이다. 이스라엘국은 종교, 양심, 언어, 교육, 문화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위의 글은 이스라엘 「국가수립선언문」 중 일부이다. 유엔의 기본정신에 아주 충실하다. 하지만 위의 ‘국가 수립 정신’대로 이스라엘 정부는 과연 팔레스타인 땅을 통치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스라엘 내에서 몇몇 중요한 권리는 유대계 시민에게만 보장되며, 20%를 차지하는 팔레스타인계 시민에게는 부여되지 않는다. 점령지에서 이스라엘 군사 체계 아래 살고 있는 500만 팔레스타인은 권리가 전혀 없는 반면, 50만이 넘는 점령지의 이스라엘 식민자들은 완전한 권리를 누린다. 이러한 사회현상은 「국가수립선언문」의 기본 정신과는 반대로 오랫동안 권리의 불평등에 바탕을 둔 수십 개의 중요한 법률을 이스라엘 정부가 세웠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산드는 이스라엘 정치가 21세가 글로벌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족정’(ethnocray)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정의한다.

   이렇듯 시온주의에 바탕을 둔 이스라엘 정부의 이런 비 자유적이며 차별적인 행동은 서구 민주주의의 바탕이 되는 이상(理想), 특별히 ‘평등과 정의’에 어긋난다. 이런 이유로 중동 문제 전문가이자,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역사학자인 라시드 할리디(Rashid Khalidi, 1948~ )는 팔레스타인의 양대 정파인 파타와 하마스의 기존 전략(외교, 무장 저항 등)이 실패하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도, 시온주의에 있는 체계적인 불평등을 뿌리 뽑는 것이야말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에 모두 더 나은 미래 창조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앞서 민족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만든 신화라고 했으나, 그럼에도 오늘날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과거 이스라엘 땅에 살았던 조상들과 ‘민족적으로’ 연결된 민족이라고 여긴다는 사실이 부정되지는 않는다. 팔레스타인 역시 오늘날 자신들이 조상이 살았던 고향인 그 땅에 ‘민족적으로’ 연결된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점도 부정되지 않는다. 즉 어떻게 생기게 되었든 간에 현재 팔레스타인 땅에는 신화이든 아니든 두 민족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부정될 수 없다. 그리고 한 쪽이 다른 한쪽의 민족적 존재를 부정하는 한, 오랜 갈등으로 시작된 충돌은 전혀 해결될 수 없다. 그러므로 라시드 할리디의 주장처럼, 가장 먼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로의 역사에 관한 이해의 차이가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권리를 비롯한 모든 권리를 완전히 평등하게 보장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더불어 양측은 국제적 후원 및 미국의 배타적 통제를 거부하는 공동목표를 삼아 국제 홍보 및 외교정책을 펼쳐야 한다. 그럴 때 공존과 평화의 첫 단추가 끼워질 희망이 보일 것이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토착민과 공존하는 실제 예가 우리 인간의 역사상 전혀 없을까? 즉 평등과 정의를 기반으로 한 ‘공존’은 그저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한낱 ‘이상’일까? 강인욱 교수는 유대인은 실크로드와 동아시아에서 최근까지 동서 문명의 교류에 이바지하며 토착민과 자연스럽게 공존했다고 한다. 영토에 대한 다툼도 없었고, 각자의 장점을 인정하며 살아왔으며 대대적인 박해도 없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강 교수는 유라시아 유대인의 생존방식이 더욱 소중해 보인다고 칼럼을 결론 맺는다. [각주:10]
   

우리 동네 이야기

   이쯤 해서 이런 생각이 문득 생긴다. 우리 삶도 바쁘고 우리나라 정치도 매우 복잡한데, 왜 우리가 지구 저편에 일어나는 다른 나라의 복잡한 전쟁까지 관심을 가져야 할까? 솔직히 나 살기도 너무 바쁘고 복잡한데 말이다.

   아랍권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집트의 문호 나지프 마흐푸즈(Naguib Mahfouz, 1911~2006)의 소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것은 우리 동네 이야기입니다. 아니 이야기들입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카이로 근처 한 마을은 족장 자발라위(Gebelawi)가 다스린다. 그에게는 여러 자식이 있는데, 막내아들 아드함(Adham)이 형 이드리스(Idris)[각주:11]의 꾀임에 빠져 그만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비밀 유언장과 계약을 읽는다. 하지만 그 현장에 있던 자발라위에 의해 발견되고, 아버지는 아드함과 그의 부인을 자신의 저택에서 추방한다. 이후 자발라위는 은둔자가 되고 타락한 감독관과 폭력배들이 그 동네를 다스리게 되면서 모든 동네 주민의 삶은 비참해진다. 동네의 상황은 자발(Gabal, 모세), 리피아(Rifaa, 예수), 까심(Qassem, 무함마드)이 사는 동안에는 일시적으로 좋아지지만, 폭력배들이 다시 동네를 지배한다. 결국 족장 자발라위는 죽고, 사람들은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여전히 품고 살지만, 현실은 더욱 부패하고 오히려 강력한 감독관이 동네를 지배할 뿐이다. 이제 족장, 예언자, 구원자에 관한 옛이야기는 전혀 쓸모가 없어 보인다. 이때 소설 속의 한 인물이 동네 사람들과 독자들을 향해 이렇게 묻는다.

“우리 동네는 언제 저 이야기들을 말하는 것을 그만둘까? 대체 그 이야기들이 너에게 무슨 도움을 주었을까?”[각주:12]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역설적이지만 질문 안에 있다. 우리가 이 이야기들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우리 동네 이야기’,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지구촌에 일어나는 모든 불평등과 전쟁과 기아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며, 이런 일에 관해 무관심한 것은 프리모 레비가 경고한 우리 안의 적에 대해 보초를 서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할 때, 우리 안에 적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집어삼킬 것이다. 성경 속 악을 상징하는 괴물인 레비아탄과 탄닌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다시 혼돈으로 만들기를 기다리며, 실제로 그것을 자주 시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가는 말

   이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을 바라보면, 한편으로는 그 갈등의 원인에 우리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도 단일민족의 정신이 매우 강하며, 세계 다른 지역에서 한국인에 대한 피습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매우 분노하지만, 정작 우리 사회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핍박에 대해서는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또한 무관심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더불어 한국 개신교회는 이스라엘 유대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선민의식이 강하며, 하나님 백성이라는 이유로 세상과 벽을 높게 쌓으며 자신들 만의 게토를 형성한다. 이스라엘이 8m 분리 장벽을 쌓아 팔레스타인 지역과 자신들을 구별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게토 안에 머물면서 세상 사람들을 구별하며 심지어는 그들을 정죄한다. 프리모 레비의 시들 중, 「아우슈비츠의 소녀」는 이렇게 끝난다.

“잠깐만, 아주 잠깐만 멈추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타인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다.” [각주:13]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인류에게 ‘공존의 희망’이 보일 것이다.

  1. 프리모 레비,『살아남은 자의 아픔』, 이산하 편역 (서울: 노마드북스, 2011), 125-147의 이산하의 글을 참조했음 [본문으로]
  2. 백소영,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서울: 뉴스앤조이, 2018), 240-246. [본문으로]
  3.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지인 옮김 (서울: 곰출판, 2021), 235. [본문으로]
  4. Ernest Gellner, Nations and Nationalism (NY: Cornell University Press, 1983), 48-49. [본문으로]
  5. 슐로드 산드, 『만들어진 유대인』, 김승완 옮김(고양: 사월의 책, 2022); 원제는 유대인의 발명이다. [본문으로]
  6. 슐로드 산드, 『만들어진 유대인』, 583. [본문으로]
  7. [강인욱의 문화재전쟁] 이스라엘보다 14년 먼저 북만주에 유대인 자치구, 중앙일보 2023년 10월 13일자(https://www.joongang.co.kr/amparticle/25199035). [본문으로]
  8. 라시드 할리드,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341-367의 결론을 참조했음. [본문으로]
  9. 라시드 할리드,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 유강은 옮김 (서울: 열린책들, 2021), 343-344. [본문으로]
  10. [강인욱의 문화재전쟁] 이스라엘보다 14년 먼저 북만주에 유대인 자치구 [본문으로]
  11. 꾸란에서 사탄을 가리키는 명칭인 이블리스(Iblis)에 대한 일종의 언어유희이다; 로널드 헨델, 『창세기와 만나다』, 박영희 옮김 (서울: 비아, 2020), 314. [본문으로]
  12. 나지프 마흐푸즈, 『우리 동네 아이들』, 배혜경 옮김 (서울: 민음사, 2015), 373. [본문으로]
  13. 프리모 레비, 『살아남은 자의 아픔』, 36.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