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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3기/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

우리도 공범이다: 시온에 새겨진 광기의 잔혹사 / 이상철

 

이상철(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그러나 바로 그 날 밤에, 주께서 나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종 다윗에게 가서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살 집 을 네가 지으려고 하느냐?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 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집에서도 살지 않고, 오직 장막이나 성막에 있으면서, 옮겨 다니며 지냈다. 내가 이스라엘 온 자손과 함께 옮겨 다닌 모 든 곳에서,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라고 명한 이스 라엘 그 어느 지파에게라도, 나에게 백향목 집을 지어 주지 않은 것을 두고 말한 적이 있느냐?'”(삼하 7,4-7)



I. 
이스라엘과 하마스간의 전쟁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할지 가슴이 아프고 난감하다. 우선 모든 불행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팔레스타인 분할과 지배의 역사를 복기할 필요가 있다. 2023년 올해는 2차 세계대전 이후(1947. 11.29) 열린 국제연합 총회에서 팔레스타인 영토 분할안을 채택한지 76주년이 되는 해이다. 국제연합은 당시 팔레스타인 영토를 유대국가(영토의 56%)와 아랍국가(44%)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을 국제관리체제 하에 두기로 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그동안 이런 저런 중동전쟁의 역사를 거치면서 이스라엘은 미국의 비호아래, 국제적 약속을 어기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쫓거나 일정구획으로 몰아넣으면서 자신들의 영토를 넓혀왔다(1947년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약 70만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추방되었다). 현재는 44%를 약속받은 아랍 민족이 10%에도 못 미치는 몇 개의 자치구역 영토에 살고 있다. 그렇게 자신들의 땅을 계속 잃어가면서 저항하고, 그러다가 죽고 다시 그 한과 원망으로 저항을 하고,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더 강하게 진압을 하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1967년 6월, 이른바 제3차 중동전쟁 후 이스라엘은 웨스트뱅크, 동예루살렘, 가자지구를 차지한다 (가자지구는 길이는 40km, 너비는 8km로 남북으로 길쭉하게 뻗은 직사각형 모양). 1977년에 5천명에 불과했던 이 지역의 유대인 정착민 수는 1992년에 12만 명에 이르렀고, 그 후 10년 동안 다시 두 배나 증가하여 25만 명을 넘어섰다(이스라엘 정착민들은 가자지구 땅의 약 25%를 차지함). 이스라엘의 점령 통치에 맞선 팔레스타인인들의 무장저항이 이어졌고, 1987년 이스라엘에 맞선 민중봉기(인티파타)가 일어났다. 후에 양국의 평화협상은 1993년의 오슬로 조약체결로 결실을 맺게 된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은 가자지구와 웨스트뱅크에 자치정부를 수립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1995년 오슬로 II조약은 요르단 강 서쪽의 6개 도시와 450개 도시에서 이스라엘의 완전철수를 요구하는 조항을 추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1995년 11월 4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회담을 이끌었던 라빈 총리가 극우 유대교 근본주의 세력에게 암살되면서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는 다시금 큰 위기에 빠진다. 그후 강경파인 네탄야후(1996-1999 재임)와 에후드 바라크(1999-2000 재임)가 점령지 반환을 거부하면서 팔레스틴의 평화무드는 깨지고 말았다. 2001년 총리로 선출된 아리엘 샤론은 자살테러가 증가한다는 핑계로 웨스트뱅크를 재점령하고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하였고, 2007년에 하마스가 가자지구의 패권을 장악하자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동쪽과 북쪽에 8m 높이의 콘크리트와 철조망 장벽을 쌓아버렸다. 가자지구의 남쪽은 이집트 국경(라파), 서쪽은 지중해와 면해있어 사실상 거대한 감옥인셈이다. 

II.
하마스는 유대교 안식일인 지난 10월 7일 새벽 이스라엘을 상대로 '알-아크사 홍수(Al-Aqsa flood)' 작전을 펼치면서 수천발의 로켓을 쏘면서 선전포고를 했다. 알아크사는 예루살렘 성지 밀집 지역인 구시가지 내 고지대 구역을 가리키고, 이곳에 건축된 모스크(이슬람 사원) 명칭이기도 하다. 특별히 이곳 ‘알-아크사’ 지역은 이슬람교와 유대교 및 기독교 모두 중요한 성지로 여기는 곳이라 예민한 곳이다. 우선 ‘알 아크사’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승천한 장소로 알려진 이슬람 3대 성지 중 하나이다. 메카(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선언한 제1성지), 메디나(무함마드가 박새를 피해 메카에서 메디나로로 이주/ 해지라: 거룩한 도망)에 이어 세 번째 성지인 이곳을 향해 매년 수많은 무슬림이 순례를 위해 방문한다. 

유대교에게는 이곳을 ‘성전산(Temple Mount)’이라 부른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야훼에게 바치려던 장소이자, 솔로몬 성전이 있던 장소이다. 솔로몬의 성전은 서기 70년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로마군은 신앙 문제에 비타협적인 유대인에게 교훈을 남기고자 서쪽 벽만 남겨두고 성전을 초토화시켰다. 이후 유대인들이 그 벽을 붙잡고 울며 기도를 드려 ‘통곡의 벽’으로 불리고 있다. 이곳은 또한 그리스도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바로 뒤쪽에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고행의 길을 걸은 골고다 언덕과 예수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 등 비무슬림 방문객은 특정 시간대에 특정 구역을 방문할 수 있지만, 경내에서 기도는 이슬람교도에게만 허락되어 있다. 대신 유대인들은 ‘통곡의 벽’에서 기도할 수 있다. 이에 불만을 가진 유대인들은 동예루살렘 점령을 기념하는 '예루살렘의 날' 행사를 매년 열면서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구시가지 주변을 행진하곤 한다. 그런 행위들이 ‘알 아크사’ 사원에서 예배를 드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자극하는 것은 당연하다. 1990년 이스라엘 극우단체가 템플마운트에 유대교 성전을 짓는다고 발표하면서 ‘알 아크사’를 둘러싼 충돌이 본격화되었는데 당시 이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인 20여 명을 살상하였다. 1996년에는 '통곡의 벽' 아래 새 터널을 개통하는 것을 반대하는 시위 도중 충돌이 발생해 63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일부 유대인들은 의도적으로 사원을 집단 방문해 갈등을 유도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2000년 아이엘 샤론 전 총리의 도발이었다. 당시 야당이던 우파정당 리쿠드당의 지도자였던 샤론은 사원을 기습적으로 방문하였는데 이로인해 제2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저항운동)가 촉발되었다. 

올해에도 일부 유대교 극단주의자들이 4월 5일부터 시작하는 유대교 축일을 기념해 ‘알 아크사’에 침범했고 저항하는 무슬림 350명을 이스라엘군이 모스크로 들어가 구금하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 5월에는 이스라엘의 극우 정치인들이 사원 경내에 기습적으로 들어가 도발하면서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쌓이면서 하마스의 인내심은 한계치를 넘어서 버렸다. 10월 7일 공격 당시 공개된 음성녹음에서 하마스의 ‘알-카삼 여단’의 사령관 무함마드 알-데이프는 이번 폭력 사태는 이른바 “알-아크사 모스크 뜰 안에서 감히 우리 예언자를 모욕한” 이스라엘인들의 “알-아크사 모스크에 대한 일상적인 공격”에 대한 보복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동안 쌓였던 것이 터진 것이다. 이번 사태는 ‘알-아크사’를 둘러싼 갈등이 표면적 이유이겠으나 문제의 본질은 꽤나 복잡하고 심오하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 종교들 사이 신을 향한 진정성, 정통성 문제, 그것을 둘러싼 인정투쟁 성격이 거기에는 있다. 지금까지 이번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경위에 대한 간단한 리뷰였다. 
 
III.  
미국유학시절 ‘아브라함의 종교들’이라는 세미나에 참여한 바 있다 (참고로 내가 공부했던 시카고신학교 교수진에는 현재 이슬람 이맘, 유대교 랍비가 정교수로 있어 종교간 대화와 화해를 도모하는 세미나를 이끌고 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갈등과 화해의 역사를 추적하는 시간이었다. 이슬람 이맘과 유대교 랍비와 그리스도교 신학자 3명이 함께 수업을 진행한다. 수업의 1/3은 이맘이 보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나머지 1/3은 랍비가 보는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나머지 1/3은 목사가 보는 이슬람과 유대교 순이다. 물론 각 종단간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유일신, 종말론, 신념체계 등이 비슷하였고, 무엇보다 다른 종교들에 비해 그들 모두 호전적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사라센 제국의 확장, 십자군 원정, 현대의 중동분쟁에 이르기까지 서구에서 일어났던 전쟁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 예루살렘을 본인들의 성지라 주장하는 종교인들 사이 전쟁 아니었나.

신들의 도시 예루살렘은 다윗 전에는 토착민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섬겼던 태양신 샤하르(Shahar: 일출의 신)와 샬림(Shalim: 일몰의 신)을 숭배하던 곳이었다. 예루살렘의 ‘살렘(평화)’은 가나안 사람들의 신 이름 ‘샬림’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이후 ‘샬렘’과 평화라는 뜻의 히브리어 ‘샬롬(Shalom)’이 혼재되어 쓰이다가, ‘샬림의 도시’가 ‘샬롬의 도시’로, 즉 ‘일몰의 도시’에서 ‘평화의 도시’로 예루살렘은 그 이름이 변경되었다. 유대인과 아랍인은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예루살렘은 그들의 본향이다. 하지만 신의 축복을 받은 자가 누구냐를 두고 양자는 엇갈린 주장을 펼친다. 유대인은 아브라함과 정실부인인 사라에게서 태어난 적자 이삭의 후손이고, 아랍인은 아브라함과 하녀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인데, 축복권을 둘러싼 양자간의 인정투쟁이 시간이 흘러 오늘의 참극을 야기했다.

691년 무렵 예루살렘을 장악한 이슬람세력들은 그 자리에 ‘알-아크사’ 사원을 세운다. ‘알-아크사’ 사원은 ‘가장 먼 사원’이란 뜻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가 621년 메카에서 신비한 네 발 달린 동물을 탄 채 가장 먼 사원까지 날아가 그곳의 바위를 박차고 하늘나라로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무함마드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이 사원의 위치가 특정되지 않았는데 그의 사후 점차 예루살렘으로 고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애초 정확한 위치는 없었는데 나중에 (권력에 의하여) 그곳이 예루살렘으로 고정이 된 것이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폭력의 잔혹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십자군 전쟁이다. 십자군 원정은 인류역사상 가장 집요한 탐욕으로 예루살렘을 채웠던 시기다. 이교도에게 함락당한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허울에 불과했다. 십자군에 참여했던 각각의 주체들(사제, 봉건영주, 기사, 상인, 농노)은 자신들의 욕망과 결핍을 충족시킬 대상이 필요했고 모두의 니즈(needs)가 예루살렘을 향한 환상으로 수렴되었다. 십자군 원정은 교회중심의 중세 유럽이 지녔던 자기분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고 십자군 원정의 실패 후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중세는 서서히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IV.
십자군 원정을 소재로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졌는데 그중 하나인 <킹덤 오브 헤븐>(2005, 리들리 스콧 감독)을 잠시 소개하면서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의 심층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가 보기로 하겠다. 이 작품은 3차 십자군 원정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고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이야기를 내용으로 한다. 당시 예루살렘은 이웃종교인(유대인, 무슬림)을 환대하던 프랑스 출신 ‘보두앵 4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나병으로 죽어가면서도 예루살렘을 그 이름에 걸맞는 평화의 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각각의 이해관계를 지녔던 십자군 참여자들의 호전성을 평화의 메시지로 막을 수는 없었다. 

영화에 보면 십자군으로 참여한 병사인 ’발리앙‘이라는 대장장이가 등장한다. 살라딘의 대군은 예루살렘성을 포위하고 성 주민들이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예루살렘성 안의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가 더해만 간다. 이때 발리앙이 예루살렘 성안에서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한다: “예루살렘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곳은 로마인들이 무너뜨린 유대인들의 성지 위에 세워졌고, 무슬림의 성지는 여러분들의 성지 위에 지어졌습니다. 무엇이 더 신성합니까? 통곡의 벽? 바위 돔 모스크(알-아크사)? 성묘교회(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들인 교회)? 어느것이 정당합니까? 어느 하나만 정당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정당합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킹덤 오브 헤븐>에 나왔던 발리앙의 대사가 떠올랐다.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은 유대인이 550년, 그리스도교가 400년, 이슬람이 1200년 통치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우주의 배꼽이라고도 표현하는가 보다. 하지만 이 도시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발리앙의 발언을 듣고 있던 대주교가 “신성모독이야!”라고 저지를 하지만, 발리앙은 계속 자신의 말을 이어간다: “우리가 예루살렘을 지키는 것은 이런 돌덩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성벽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발리앙은 예루살렘 주민들을 살리기 위해 살라딘과 협상을 하는데, 항복하여 몸값 내고 퇴각하는 조건으로 학살을 막는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살라딘을 향해 발리앙이 묻는다. 예루살렘이 무엇입니까?(pause) 살라딘이 웃으면서 말합니다. “Nothing!” 그리고 뒤돌아 걸어가던 살라딘이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인다. “and Everything!” 살라딘에 의하면 예루살렘은 모든 것 안의 모든 것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 속에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 유대교, 이슬람, 그리스도교 세 종교가 모두 예루살렘을 자신들의 성지라 주장한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는 어떤 신이 존재하는 것일까? 

V.
예루살렘을 둘러싼 신화의 시작은 앞서 언급했듯이 다윗부터이다. 글의 서두에 인용한 사무엘하 본문은 시온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지던 무렵을 배경으로 한다. 오랜 권력투쟁 끝에 왕위에 오른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기고 백향목으로 지은 아름다운 성전에 하느님을 안치시키려 했다. 거기에는 본인의 취약했던 권력의 정통성을 쇄신시키려는 다윗의 노림수가 숨겨져 있었다. 다윗은 모세의 십계명이 보관되어 있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옴으로써 세겜, 실로, 베델 등 북쪽 지파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동시에 통합의 명분까지 획득하려고 했다. 그래서 하느님의 법궤를 안치할 성전을 세우려 했던 것이다. 

그런 다윗의 계획에 야훼는 예언자 나단을 시켜 제동을 걸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지으려고 하느냐?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집에서도 살지 않고, 오직 장막이나 성막에 있으면서, 옮겨 다니며 지냈다. 내가 이스라엘 온 자손과 함께 옮겨 다닌 모든 곳에서,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라고 명한 이스라엘 그 어느 지파에게라도, 나에게 백향목 집을 지어 주지 않은 것을 두고 말한 적이 있느냐?”

야훼는 출애굽 이후 법궤와 함께, 장막이나 성막과 함께 이동하신 분이다. 굳이 법궤를 둘 고정된 성소와 성전을 만들 의지와 필요성도 없는 신인데, 다윗은 굳이 예루살렘에 신을 안치시켜려 한 것이다. 결국 다윗의 의도는 성사되었고, 그의 아들이었던 솔로몬을 거치면서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과 욕망은 완성되었다. 그 후 역사가 전개되면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하는 종교들끼리 예루살렘에 대한 저마다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2천년 동안 싸우고 있다. 

그런 인간들을 향해 야훼는 “내가 살 집을 네가 지으려고 하느냐?”고 묻는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 아닐까 싶다. “내가 있을 곳은 내가 정할 테니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께.” 그렇다면 사무엘하 본문은 인간이 마음대로 하느님을 가둘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이고, 신을 가두려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다. 신은 예루살렘에, 메카에, 알-아크사 안에 가둘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야훼종교는 애초에 성전이데올로기, 자리에 대한 집착, 장소에 대한 욕망이 없었던 종교였다. 야훼는 철저히 물신을 배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솔로몬 시대를 지나면서 권력은 야훼의 임재와 현존을 공간화하고 성역화하는 데 성공하였고, 그 중심에 예루살렘이 있다. 그런 예루살렘의 장악을 둘러싸고 벌이는 전쟁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갖는 사람들끼리 수천 년간 이어져 오고 있고, 하마스-이스라엘 전쟁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면 맞다.

VI.   
정녕 신은 시온에 존재하는가? 예루살렘에 신이 있다는 믿음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면, 차라리 예루살렘을 폭파해 지구상에서 없애 버리든, 아니면 아브라함의 종교를 폐기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처방책이 아닐까, 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본다. 그만큼 팔레스타인의 평화가 우리의 긴급한 기도제목으로 떠올랐다는 반증일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답이 안 나온다. 수천 년 동안 쌓여왔던 원한과 죽음의 바벨탑이 어떻게 한순간 사라질 수 있겠나. 우리에게는 전쟁의 시간만큼이나 오랜 사죄와 용서와 화해의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신을 예루살렘에, ’알-아크사‘에, 자신들이 만든 성전 안에, 인간의 언어와 생각의 틀 안에 가두어왔던 종교와 자신들의 카테고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않는 존재들에게 대한 혐오와 적대의 오래된 관성이 이번 사태를 가능하게 했다. 신은 시온에 없다. 신은 당신이 임재할 그곳을 스스로 결정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신이 하늘에 계시다’는 그런 뜻으로 읽어야 한다. 또한 신은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분 분이다.”(엡 4:6) 이 말은 인간의 마음대로 신을 가둘 수 없다는 선포임과 동시에 신을 인간의 카테고리 안으로 가두려는 욕망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다. 하느님은 이 땅 위의 특정한 장소, 사물, 언어 안으로 가둘 수 없는 분이고, 신은 바람과 같아서 보이지 않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분이다. 이런 신을 소유했다고 착각하는 종교들이 (신의 이름을 빌어) 벌이는 만행을 보면서 신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들과의 수직적인 단절을 선언한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너희들이 드리는 예배는 받지 않겠다’(이사야 1장). 

마지막으로 분명히 우리가 인지해야 할 것은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내용들이 우리와 상관이 없지 않다는 점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 발생한 사건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거나 축소시키면 안된다. 모든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패턴이 금번 살육과 이어져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특별히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광장으로 나와 온갖 혐오발언를 일삼는 일부 한국 개신교인들의 행태가 대표적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나타났던 서북청년단으로 대변되는 기독교 우파들의 만행과 거기에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극우 개신교도들의 광기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를 폭격하고 학살하는 그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우리가 과연 가자지구 대학살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도 공범이다! 이런 회개와 반성으로 이번 사태를 바라보면서 대외적으로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한 전 지구적 연대를 도모하고, 내부적으로는 우리 안의 종교적 광기와 파시즘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