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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3기/세월호 참사 이후 10년

노래와 기도, 기도와 노래 / 김진수

 

김진수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K 총무, 416합창단)

 

저는 노래가 가진 힘을 믿습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심지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어도 같은 노래를 부르며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또 노래에는 듣는 이와 부르는 이를 같은 마음으로 엮어내는 힘이 있지요. 한 사람이 신나게 노래하면 모두가 신이 나고요, 노래하는 사람이 간절하고 애절하게 노래하면 듣는 모두의 마음도 미어집니다. 노래가 가진 힘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참 비슷한 것이 하나 떠오릅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노래와 기도, 기도와 노래. 이것이 제가 416합창단에서 노래하는 이유입니다.

416합창단의 2집 앨범을 준비하면서 처음 불러본 노래가 있습니다. 류형선 선생이 짓고 방기순 가수가 불렀던 '종이연'이라는 곡입니다. "궁금하다. 이 나라가 다 운 것인지, 왜 더 울지 않는 것인지, 울어야 마땅한 일이 이리 넘쳐나는 데 이 나라의 울음보는 왜 작동하지 않는 것인지"라고 말했던 류형선 선생이 세월호 8주기 추모곡으로 헌사한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기꺼이 내어주셔서 합창단의 목소리로 불렀습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목소리로 부르는 추모곡은 도대체 어떤 노래가 되고 어떤 기도가 될까요. 함께 노래한 지 9년이 되어가지만, 아직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가사 한 줄 한 줄이 서럽고 처절하고 반짝이기 때문입니다.

본 고는 '종이연'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따라가며 지난 10년을 돌아보는 글입니다. [사건과 신학]에 실리는 다른 글들보다 더 말랑말랑한 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이 지금은 보여
그늘진 사람들이 모두 다 보여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 흘리는 세상을 만들게"


2014년 4월이 되어서야 눈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자라온 신앙 전통에서는 하늘만 바라보게 했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다스리는 이 세상에는 우연이라곤 없었습니다. 인생의 모든 크고 작은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고, 사람의 역할은 그 뜻을 분별해 따르고 순종하거나, 그 길을 떠나 지옥으로 향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전지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이 이미 다 정해놓으셨다고 믿었습니다. 늘 하늘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뜻을 찾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일상을 바치고, 그렇게 교회가 그려준 작은 세계 안에서 행복하게 자라왔습니다.

그래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흔적이 온 데 간 데 없었기 때문입니다. 작고 아름다웠던 나의 세계가 부서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잔해를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눈을 돌려보니 신의 흔적이 곳곳에 어렴풋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몰랐던, 보이지 않았던 성흔이었습니다. 그 발자취는 팽목항에, 진도 체육관에, 안산에, 광화문과 청와대 앞과 온갖 거리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 그늘진 사람들, 갈릴리 나사렛의 예수가 발 벗고 찾아 나섰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과 그늘진 사람들을 보게 되는 것은 또 한번의 회심이었습니다. 예수를 보던 눈에서 예수가 보는 것을 바라보게 되는 전환이었습니다. 크고 빛나는 왕관을 쓴 할아버지 하나님이 아니라, 갓난아기로 세상에 온 작은 신을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광야를 걸으며 들풀같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낙원에 머물지 않는 신을 따라 사람에게로 향하는 여정이었습니다.

예수가 만난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보다 명확해집니다. 철저히 주변부에 있던 사람들, 착취를 당하거나, 소외되어 있거나, 마땅히 누릴 자신의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런 사람들만 찾아다녔고, 그렇게 그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세계는 바리새인도, 사두개인도, 왕과 귀족들도 틈탈 수 없었습니다. 하늘과 땅이 뒤바뀌고,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가 뒤바뀌고,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닦는 세계였습니다. 마침내 그곳에서 외로운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늘진 사람들이 보입니다.

광주의 어머니들이 세월호 유가족들을 찾아왔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들을 찾아갔습니다. 스텔라데이지호,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비롯한 여러 사회적 참사들,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 권리를 빼앗긴 장애인들과 쫓겨난 사람들이 서로 연결됩니다. 그렇게 외로운 사람들이 외로운 사람들을 찾고, 그늘진 사람들이 그늘진 사람들을 위로합니다. 바로 이 곳이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닐까요. 갈릴리 해변가를 헤메이던 예수처럼요.


내 품에 머물렀던 기억을 모아
별처럼 촘촘했던 추억을 모아
별이 뜨고 지는 길목에 날마다 모여서 노래할게


기억을 나누는 것은 삶과 삶이 얽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모르는 당신의 세계에 대해 알아가는 것, 당신이 모르는 나를 알려 주는 것, 그리고 함께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 기억을 나눌 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 곁에 있으면 그런 기억들을 자주 엿볼 수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던 날의 기억, 세 살 적 함께 여행갔던 기억, 일곱 살이 된 아이와 사춘기를 맞은 아이들은 얼마나 다른지 이야기 하며 눈물도 짓고 웃음도 나곤 합니다. 그렇게 내 삶에 스며든 아이들에 대한 기억은 몇 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지금 여기서 피어납니다. 사진으로만 본, 이야기로만 들었던 그 아이들의 삶 하나 하나가 완전한 타인이었던 내 삶을 뒤흔들어 다시 한번 거리로 나설 힘이 됩니다. 

흔히 그리스도교는 기억의 종교라고 합니다. 우리 전통의 큰 기둥인 성례는 ‘나를 기념하라’라는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서 있지요. 아마도 예수의 제자들은 떡을 떼고 잔을 나누며 그들의 스승이자 구주인 예수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우리 선생님이 그랬었지, 그땐 좋았는데’ 따위의 푸념이나 추억팔이가 아니라 오늘의 일이자 내일을 바라보게 하는 힘이었을 것입니다. 그 힘 덕에 이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흐르고 흘러 오늘 우리에게까지 닿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기억과 예수 제자들의 기억 사이에는 공통 분모가 있습니다. 바로 ‘같은 경험을 한 서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찢어지고 피 흘리는 경험, 상실의 경험, 그리고 그 기억을 함께 나눌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리를 헤메며 사람들을 만나고, 진실을 갈구하고, 권력에 저항하며 몸과 영혼에 새겨진 상처들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나누던 떡과 잔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 서로에 대한 기억이 담겨있었고, 세월호 유가족들의 노래에는 아이들의 추억, 함께 걷고 외치고 싸우고 울던 기억이 담겨있습니다. 마침내 우리가 떡을 뗀다는 것은, 함께 노래한다는 것은 삶에 깊이 새겨진 기억들을 모아 지금 여기 불러내는 것이고, 불러낸 기억에 힘입어 오늘을 함께 살아내는 것입니다, 예수가-아이들이 살았어야 했을 내일을 살아가는 것이고, 예수가 전했던-아이들이 바랐던 진리-진실을 온 천하에 밝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이유고, 유가족들이 여전히 거리에 서 있을 수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놀랍게도, 우리 모두도 같은 기억이 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아침 뉴스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원구조’라는 오보도, 보험금이 얼마인지 헤아리던 이들도, 이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라던 망언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라고 울며 절규하던 유가족의 모습도, 그런 유가족들을 막아서던 권력의 모습도, 그리고 그 권력의 몰락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노란 리본을 달고 손을 흔들던 새 권력자의 모습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몇 년 간의 허무함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10년의 기억을 우리 모두는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과 추억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가방에 리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옷깃에 리본을 달아야 하겠습니다. ‘좋아요’를 누르고, ‘공유’를 하고, 거리로 나오고, 피켓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기억과 기억을 잇대어 오늘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한 가지, 416합창단이 매주 하는 기억의례(?!)를 소개하려 합니다. 매 주 월요일마다 모이는 연습 시간의 한복판에서 그 주에 생일을 맞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별기억식’을 진행합니다. 그냥 이름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에 대한 한 줄 짜리 소개도 덧붙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모든 표현을 현재형으로 바꾸어 읽는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친구들은 별기억식 속에서 “~가 되는 것이 꿈인” 친구가 됩니다. 아이들은 별기억식 동안 여전히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노래하는 단원들의 삶에 새겨집니다.

기억을 꺼내고 모아서 연결짓는 것, 그리고 오늘 여기에서 다시 살아내는 것.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천 년 동안 해온 전문영역 아닐까요.


세상이 조금은 더 울 수 있도록
울어서 조금은 더 착해지도록
종이연 하늘 높이 날리며 너를 사랑해


도로테 죌레는 ‘기도란 세계를 위한 책임을 걸머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와 함께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손이 아닌 다른 손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어떤 다른 눈도, 어떤 다른 귀도 갖고있지 않다. 우리가 듣지 못하는 비명은 그도 듣지 못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불행은 그도 알지 못한다. 기도에서 주술을 극복하려면, 하나님이 직접, 기적적으로, 위로부터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는 우리의 손을, 우리의 눈을, 우리의 귀를 갖고자 한다. 그렇게 약하고 그렇게 가련하고 그리고 그처럼 "인간적이기 만한" 존재가 그분이다. 기도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강한 "초 인간"과 동일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를 위한 책임을 걸머지는 것이다.”([다른 행복의 권리] 중)

하늘에서 꿈처럼 내려오는 평화를 받기만 기다리는 그런 수동적인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협력하고 행동하고 연대하는 기도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그저 주문처럼 흩어지는 게 아니라 “잊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이라는 책임의 약속이 됩니다.

기도하는 것은-종이연을 띄우는 것은 세상을 더 착하게 만들겠다는 구체적인 의지입니다. 그 날 무슨 일이 있었고, 커다란 배가 어떻게 가라앉았는지,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나아가겠다는 의지입니다. 세월호 이후에도 바뀌지 않는 사회를 향해 이윤보다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외침입니다. 그 어떤 것도 사람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어야 한다는 외침입니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다짐이고,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사랑의 다짐입니다. 그렇게 416합창단은 노래 같은 기도와 기도 같은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띄우는 종이연이 조금 더 튼튼했으면 좋겠습니다. “잊지 않겠다”라는 10년 전의 약속이 새겨진 종이연을 다시 한번 띄우면 좋겠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기억이 이어지도록, 이어지고 이어져서 세상이 조금 더 착해지도록, 하나님의 뜻이 오늘 여기서도 이루어지도록 서로의 손을 잡읍시다.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 흘리는 샬롬의 세계를 만들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