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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3기/이주민을 바라보는 사회와 교회의 시선

이주민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시선 / 오세조



오세조 (NCCK 신학위원장, 팔복루터교회)

 

“너는 이주민을 학대하지 말라. 너 자신도 이집트 땅에서 이주민이었으니 
너는 이주민의 심정이 어떤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23:9).


들어가는 말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는 말은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a is the message)”라는 경구로 유명한 미디어 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인 마셜 맥루한(Marshall McLuhan, 1911~1980)이 『지구촌: 21세기 인류의 삶과 미디어의 변화』[각주:1]라는 그의 책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과학과 기술, 그리고 통신 등의 발전으로 인간이 예전과는 달리 쉽게 서로 왕래하고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뜻으로 지구를 한 마을처럼 비유한 말이다. 이 용어는 이미 막을 수 없는 세계화를 효과적으로 표현하여 유명해졌다. 이처럼 21세는 분명 세계화 시대이다. 그리고 이를 반영하듯 많은 한국 사람이 미국이나 유럽 등 세계 속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반대로 많은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다. 


다른 인종의 사람이 이웃으로 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2023년 한국의 총출입국자는 68,121,658명으로 전년 대비 250.9%로 증가하였으며, 2022년 말 기준 국내 체류 외국인은 2,245,912명으로 전년 대비 14.8%로 증가하였다. 체류 외국인을 국적별로 살펴보면, 한국계 중국인을 포함한 중국인이 37.6%(942,395명)를 차지하고 있으며, 베트남 10.8%(271,712명), 태국 8.1%(202,121명), 미국 6.5%(161,895명), 우즈베키스탄 3.5%(87,698명)이다. 또한 난민 신청자는 2010년부터 꾸준히 증가하였으며 2013년 난민법 시행 이후로 큰 폭으로 상승하여 2023년에는 18,838건으로 전년 대비 약 63.3% 증가하였다. 이와 같은 통계자료는 한국도 세계화의 물결에 합류하고 있으며, 한국 사회가 이제는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음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한편, 이런 세계화 시대 속 한국에 살고 있는 이주민들, 특별히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나 그들의 인권에 대한 처우는 과연 세계화에 적합하게 한국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걸까? 

지난 10년간 위와 같은 통계자료가 보여주듯 한국 사회에서 이주민은 매우 빠르게 증가했지만, 한국인의 이주민에 대한 사회적 거리감(social distance)[각주:2]은 많이 개선되지 않았다. 외국인 밀집 지역과 그 인근에 사는 한국인의 이주민 및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거리감이 전체 한국인의 사회적 거리감보다 상당히 높다고 한다.[각주:3] 그리고 이를 반영하듯 ‘다른 인종의 사람이 이웃으로 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한국은 응답자 중 34.1%가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러한 조사는 ‘세계가치조사’라는 설문조사인데,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시행된 설문에 참여한 OECD 14개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치라고 한다.[각주:4] 이러한 결과에 대해 보건학자인 김승섭은 그의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 된 이민자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과연 한국 사회가 세계화 시대에 구성원으로서 자격이 있는지를 되묻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터넷과 일상에서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이들은 자신들 역시, 한반도만 벗어나면 소수 인종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라고 한다.[각주:5]
 

문제 제기 

그러면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세계화의 흐름 속에 이처럼 우리 주변에 점점 많아지는 이주민, 특별히 이주민 노동자를 과연 어떤 마음과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일을 판단할 때 성경적 근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신·구약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절대 규범(Norma Normans)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주민, 특별히 이주민 노동에 대한 신·구약의 성경적 근거를 먼저 살펴본 후, 초대교회의 역사와 함께 최근에 활발하게 연구되는 공공신학적 관점에서의 이주민을 바라보는 교회의 시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구약성경의 가르침: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

구약학자인 유윤종은 그의 논문 『구약성서의 입장에서 본 이주 노동자 복지에 대한 교회의 개입 방안들』에서 구약성경 내 외국인을 지칭하는 말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정리한다.[각주:6] 1)노크리[각주:7], 2) 자르[각주:8], 3) 게르[각주:9], 4) 토샤브[각주:10]. 이 네 단어 중 오늘날의 이주 노동자의 개념에 가장 적합한 단어는 ‘게르’이며, 태생적으로 가지게 된 보호와 특권을 포기한 채 자기의 노동력을 팔아서 살아가는 국내외의 비-정규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를 포함하는 확대된 용어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방 국가와 이방인들에 대해 배타적인 관계를 유지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게르’라고 불리는 이 그룹의 사람들을 독특하게도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보호하고 돌보아야 할 대상으로 여김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의 야훼 하나님은 이주 노동자를 보호하고 돌보는 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스라엘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주 노동자를 압제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신도 이전에는 ‘이주 노동자’였는데 이런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분이 바로 야훼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야훼의 은혜를 경험한 역사적 경험에 근거하여 자신들도 가나안 지역에 살고 있는 이주민 노동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신약성경의 가르침: 이주민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인자가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양을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자,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이 왕에게 이유를 묻고 왕이 대답하는 아래 비유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 사람들(의인)이 그때 물을 것이다. ‘주님, 언제 주님이 이주민으로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가 당신을 맞아들였습니까?’ 

그러면 왕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건대, 너희가 지극히 작은 내 형제자매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예수의 이 비유에 따르면, 이주민에게 행한 것이 곧 임금에게 한 것이다. 이는 구약성경의 이주민에 대한 가르침과 일맥상통한 예수의 가르침이다.


초대교회의 역사: 여러 인종과 민족이 함께 한 공동체

래리 허타도(Larry Hurtado)는 그의 책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에서 로마 제국 치하의 초대교회는 박해받는 종교임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엄청난 희생이 있었음에도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중 두 가지를 ‘여러 인종과 민족이 함께 한 공동체’, 그리고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돌보는 데 헌신한 공동체’로 제시한다.[각주:11]
 
사실 그리스도교의 발생 이전에는 인종과 지역에 따라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의 종교를 부모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 동일한 역사와 문화권 안에 사는 사람은 종교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발생하면서 어떤 역사나 문화적 배경을 공유하든 상관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자기가 속한 역사와 문화와는 다른 공동체 즉 여러 인종과 민족이 함께하는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이전의 역사에는 없던 새로운 신앙공동체였다. 더불어 이러한 새로운 신앙공동체는 어려움을 겪는 모든 사람을 신분의 차이 없이 품었다. 

이런 이유로 팀 켈러(Timothy Keller, 1950~2023) 목사는 21세기 같은 탈 기독교 시대에 교회의 미래 모습은 ‘다민족 교회를 세우는 공동체’, ‘가난한 자를 돌보고 정의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그의 제안는 점점 더 세상의 영향력을 잃어가는 한국교회에 큰 방향을 제시한다.


공공신학: 환대의 신학

앞서 살펴본 대로 이스라엘 공동체는 나그네와 이방인을 돌보고 환대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는 그들 스스로 나그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은 이런 구약의 나그네와 이방인에 대한 환대의 가르침과 같다. 즉 낯선 자에 대한 환대는 구약성서로부터 초기 교회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사회윤리였다. 물론 역사와 문화가 다른, 즉 낯선 타인을 자기의 공간에 맞아들여서 식사를 함께하는 행동은 매우 위험하다. 안전하고 평안한 자기의 공간에 낯선 사람을 맞이하는 환대는 나의 익숙함과 편안함을 깨뜨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낯선 사람은 자신의 장소를 박탈당하고 그가 속했던 사회적 관계망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즉 사회가 규정하는 범위 밖의 사람들일 수 있으므로 위험하다. 

여기서 미국을 대표하는 교육 지도자이며 사회운동가인 파커 J. 파머(Parker J. Palmer)가 그의 책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에서 그가 뉴욕의 택시 운전자와 나눈 이야기가 낯선 자와 위험해 보이는 만남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글쎄요, 어떤 손님이 탈지 전혀 알 수가 없지요. 그래서 조금 위험하긴 해요. 하지만 많은 사람을 만날 수가 있어요. 대중을 알아야 해요. 거기에서 인생에 대해 많은 걸 배운답니다. 대중을 알지 못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거죠. 생각을 나누면서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니까요. 꼭 학교에 다니는 것 같아요.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나면 도움이 되지 상처가 되지는 않아요. 한 종류의 사람들만 좋아하면 좋지 않아요! 승객들과 이야기하면서 내가 좋은 생각이 있으며 말해주지요! 상대방은 그렇다고도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요. 그런 식으로 나를 교육하는 것입니다. 아주 즐거워요. 돈을 주고도 이런 교육을 받을 수가 없지요.”[각주:12]


뉴욕의 택시 운전자의 경험대로 낯선 사람과의 만남은 우리의 인식과 편견, 그리고 문화적이며 종교적인 관습을 깨뜨리고 확장하는데 새로운 기회를 줄 수 있다. 내 사고의 울타리와 경계선을 확장하고 심지어는 급진적으로 생각하게 해 준다. 공공신학자인 최경환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고정된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외부와 소통하고 연결되면서 새롭게 형성되며, 타자와의 소통과 관계를 통해 정체성이 형성된다면 비록 빈 의자라고 할지라도 누군가를 위한 자리를 마련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환대의 공공신학’을 제시한다.[각주:13] 그는 교회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 자신을 넘어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은총을 세상에 증언하는 장소이며, 그래서 교회는 세상에서 낯선 자로 존재하며 동시네 낯선 자들을 맞아주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각주:14]


나가는 말

앞서 살펴본 대로, 구약성경에서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도 전에는 나그네였기 때문에 나그네를 돌볼 책임이 있다고 반복적으로 말한다. 즉 이방인이었으며 나그네였던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땅에서도 자기와 같은 나그네를 돌보고 환대해야 한다. 하지만 구약성경의 야훼 하나님을 자신들이 믿는 유일신으로 고백하고, 자신들의 민족적 뿌리를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한 신앙공동체에서 찾는 현재 이스라엘이 타자인 팔레스타인을 환대하지 않고 자기의 땅에서 쫓아내려는 모습에서 종교적 신념 또는 믿음과 삶의 실천 사이에는 얼마나 큰 괴리감이 있을 수 있는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하긴 우리나라도 혈통주의가 깊게 뿌리 받고 있어, 이주민에 대한 시선은 매우 너그럽지 못하고 태도도 개방적이지 못하다. 세계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태도와 의식은 여전히 정체되어 있다. 하지만 타자를 위해 자기의 공간을 내주고, 쉼의 자리를 비워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신학에서 말하는 ‘자기 비움’, ‘희생적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역사 속에 한때는 나그네였던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도 세계에 흩어져 살며, 현재에도 미래에도 나그네로 살 것이다. 만일 세계에 흩어져 사는 우리나라 사람이 그 땅에 사는 토착민에게 차별과 배제, 그리고 핍박을 받아서는 안 되듯이 우리나라에 사는 이주민 또한 우리 땅에서 차별과 배제 그리고 핍박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땅에 사는 이주민 모두가 우리의 형제자매이길 소망하며 『헤른후트 묵상집』의 5월 17일 묵상 중에서 아래의 기도문을 묵상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이주민들이 우리 땅에 옵니다. 그들이 자기 고향에서는 생활의 토대를 더 이상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익숙한 것들을 모두 뒤에 두고 왔고, 우리의 언어와 관습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가운데서 낯설어합니다. 당신께 간구합니다. 이 새 이웃들을 향해 열린 마음을 우리에게 주소서. 우리가 그들을 따뜻함과 사랑으로 우리 가운데 받아들일 수 있게 우리를 도우소서. 그들도 당신의 형제요 자매입니다.”[각주:15] 
  1. 원제는 『The Global Village: Transformation in World Life and Media in the 21st Century (Communication and Society)』로 브루스 파워스(Bruce R. Powers)와 함께 쓴 책이다. [본문으로]
  2. 사회적 거리감은 다인종사회에서 집단 간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표이다. [본문으로]
  3. 김석호 “한국인의 이주민에 대한 사회적 거리감” 한국의 사회동향 2019, 통계청 통계개발원 347~356. [본문으로]
  4.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서울: 동아시아, 2017), 237. [본문으로]
  5. 위의 책, 238. [본문으로]
  6. 유윤종, 석말숙, “구약성서의 입장에서 본 이주 노동자 복지에 대한 교회의 개입 방안들,” 「구약논단」 제15권 1호(2009), 174~199. [본문으로]
  7. ‘노크리’는 ‘인식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나카르’에서 왔는데, 아카드어의 ‘누크루’(nukru)는 ‘다른 나라에서 온 이상한 무엇을 가리킨다. 우리말로는 “외국인”으로 번역할 수 있다. HALOT, 699-700. [본문으로]
  8. ‘자르’는 ‘이상한, 다른, 불법의’라는 의미를 가진다. HALOT, 279. [본문으로]
  9. ‘게르’는 우리말로 “나느네”, “객”, “우거하는 자”로 번역되며, 전쟁, 기근, 전염병 등으로 인하여 다른 곳에서 삶의 터를 잡고 살지만, 재산이나, 결혼, 사법권, 제의, 전쟁에서의 권리가 축소된 채 살아가는 사람, HALOT, 201. [본문으로]
  10. ‘토샤브’는 우리말로 “거류민”으로 번역되며 원래 가나안 원주민들의 후손을 가르키는 말, 혹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 HALOT, 1712-1713. [본문으로]
  11. 래리 허타도,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 이주만 옮김 (파주: 이와우, 2017). [본문으로]
  12. 파커 J. 파머,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김찬호 옮김, (파주: 글항아리, 2014), 158. [본문으로]
  13. 최경환,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 공공신학과 현대 정치철학의 대화』, (고양: 도서출판 100), 203. [본문으로]
  14. 앞의 책, 208-209. [본문으로]
  15. 헤른후트 형제단 편, 『2024 말씀, 그리고 하루: 헤른후트 성경묵상집 294판』, 김상기 홍주민 옮김 (오산: 한국디아코니아연구소, 2024).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