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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3기/NCCK 100주년을 맞이하며

NCCK 백주년을 맞이하며 -백주년을 맞이하여 한 번쯤은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것들- / 이인배

 

이인배 (NCCK 100주년 위원회 연구원)

 

# 사건은 신학을 통해 의미를 가진다

 

어떠한 사건이 존재하는 경우 그냥 잊혀져 버리는 사건이냐, 아니면 그것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기억되면서 지속적으로 회자가 되어서 살아있는 역사가 되느냐는 그 사건을 기록으로 남기는 사람에게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그 기록의 작업을 우리는 거창하게 ‘신학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처음 『사건과 신학』이라는 잡지를 소개받았을 때 머리속에 떠오른 생각이다. 시적인 표현으로 본다면 단순한 몸부림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을 ‘내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신학화 작업을 했을 때) 그것이 나에게 의미 있는 것(꽃)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가는 사건이 의미 있는 것이 되도록 노력하는 동시에, 그것이 나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해석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역사가를 신학자로 바꿔도 그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2년 전부터 NCCK 백 주년을 맞이하여 과거의 기록을 정리하는 작업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단순한 과거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했지만, 참여하는 과정에서 NCCK가 남긴 과거의 흔적들은 기독교 역사를 뛰어넘어서 일반 역사 속에서도 정말로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잊고 있었던 활동이 오히려 일반 사회에서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때 TV 예능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끌었던 「알쓸신잡」에서 유시민 작가가 종로 5가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고 뿌듯했지만, 한편으로는 ‘옛날에는 저런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이런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접할 때, 사진 몇 장이나 한두 줄의 기록으로 접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사건의 당사자들에게는 커다란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였고, 인생이 걸린 문제였으며, 자신들의 꿈이 담겨있는 것이기에 쉽게 평가하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정말 멍청하고 바보 같은 결정이라고 생각되는 사건도 그 시대 사람들이 (그들 수준에서) 나름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라는 사실까지는 부정할 수는 없다. 먼 훗날, 아니 멀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에 오늘의 NCCK 모습이 어떻게 평가될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과거 선배들의 모습 중에서 아쉬운 것은 반성하며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고, 자랑스러운 것은 계승하고 더 발전시키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 과거를 통해 반성하고, 미래를 향해 다짐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한국 교회 최고(最古)의 연합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백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연합과 일치를 통해 실제 삶의 현장, 교회의 현장, 나아가 역사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러한 연합과 일치를 위해서는 자기 것만 주장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버리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인내하고 양보하는 모습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우리 민족으로서는 생각하기도 끔찍했던 어둠의 시대인 1924년에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로 출발하였다.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피부로 와닿을 수 없는 좌절과 절망의 시대였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시대에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연합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 의지하고 서로 위로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어려운 암흑의 시대를 혼자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연대감을 심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식민지 억압 기간이 길어질수록 변절하고 좌절하고, 현실에 순응하는 현상이 발생하였고, 1930년대에 연합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일제에 의해 해산되기 직전, 이미 장로교가 빠진 상황이었다는 것은 분명 지적받아야 한다. 어떤 조직이든지 외부의 압박보다 내부적인 분열이 가장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는 별로 한 것이 없었으며, 오히려 정치권과 결탁하여 이익을 챙기려는 모습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것은 전쟁 이후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유달리 기독교에만 있었던 모습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개신교 내부에서는 지속적인 갈등과 분열로 인해서 외부로 시선을 돌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종교는 강력한 권력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저항보다는 순응과 타협이 현명한 방법이라는 노하우를 터득한 것 같다. 적당한 타협으로 권력에 순응했을 때 적절한 보상이 뒤따른다는 사실도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 되었을 것이다.

 

NCCK 백 년은 무수히 많은 사람의 젊음, 인생, 꿈이 어우러져서 기록된 역사이다. 백 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하찮게 여기고 넘어갈 수 없다. 한두 줄로 간단하게 평가하고 넘어갈 수 없는 역사이다. 물론 오늘의 시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면서 너무나 아쉬운 순간들이 있는데, 위에서 간단하게 소개한 것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로서는 아쉬움으로 남은 NCCK의 모습이었다.

 

# 변화된 시대, 우리의 주소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평생 해오신 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선배들은 한결같이 NCCK의 전성기로 독재정권에 맞서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고, 통일운동을 위해 앞장섰던 것을 언급하신다. 그분들이 일생을 통해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헌신한 것은 가슴 깊은 곳에서 존경을 해도 한없이 부족하다. 그분들의 헌신과 희생 덕분에 오늘 조금은 나은 세상이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이 NCCK의 자랑스러운 과거였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실현이 되었고,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해지고 전문화된 시점에서는 과거 NCCK가 했던 활동들의 대부분 시민단체나 전문가그룹이 담당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그래서 어쩌면 과거의 향수가 오히려 오늘의 NCCK의 변화를 가로막고 발목을 잡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변화된 시대에 변화된 모습을 찾아야 하는 NCCK가 여전히 과거의 활동에만 미련을 두고 있다면, NCCK에게 미래는 있을까? 오늘의 시대는 예전같지 않다. 로잔대회가 몇천 명을 동원했다고 우리도 그 정도는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져야 할까? 적은 수라도 올바른 마음과 올바른 신앙을 지키려는 몸부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NCCK가 있어야 하는 자리는 어디인가?

특별히 이번에 NCCK는 백 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과거 일반 평민들을 중심으로 세워졌던 동대문교회가 철거될 때 챙겨두었던 서까래로 기념 십자가를 제작하기로 하였다. 그리고는 실무적으로 십자가 제작을 세월호 유가족들이 운영하는 4ㆍ16 목공소에 요청하여 만들면서 백 주년의 의미를 더욱 깊게 하였다. 나중에 세월호 유가족들과 대화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들은 사회적 관심이 많이 떨어진 요즈음에 사람들의 진심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가장 슬픈 것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인데 이제는 뉴스에 언급되지도 않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곁을 떠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NCCK가 고맙다는 말을 해주었다. NCCK가 있어야 하는 자리는 바로 세월호 유가족,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이 있는 그 자리라고 생각한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지난 9월 22일 연동교회에서 NCCK백주년 에큐메니칼 감사예배를 드렸다. 과거 에큐메니칼 운동을 돌아보고 그 시절에 관해 감사하며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준비한 것이다. 물론 그때 에큐메니칼 원로분들이 많이 참석하셨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NCCK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때 지금은 거의 아흔이 되신 원로 목사님 한 분이 예배에 참석하러 오셨다. 그분은 소위 말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지도자로 활동은 하지 않으셨지만, 매번 NCCK의 활동에는 건강이 허락되는 한 빠짐없이 참석하시던 분이었다. 1년 전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커다란 수술을 하셔서 움직임이 쉽지 않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예배에 참석하실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예배드리기 20분 전에 연동교회에 오신 것이다. 물론 수술 이전에 뵈었던 (건강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예배가 끝나고 원로들을 위해 준비한 식사가 있다고 알려드렸지만, 예배 후에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는 가운데 챙겨드리지 못해서 식사도 못하고 가신 것을 나중에 알았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이 상당히 위축되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내가 꼭 드러나야만, 내가 순서에 있어야만 참여하는 것이 에큐메니칼은 아니다. 묵묵히 참여하는 노 목사님의 모습을 통해서 그러한 분들이 진정한 에큐메니칼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