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캉스: 들숨과 날숨 그리고 쉼 1
- 김조년(한남대 명예교수, 퀘이커)
바캉스(vacances)란 말을 내가 처음 들은 것은 1960년대였다. 물론 그 말을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사용하고, 그 의미에 맞는 삶을 살았겠지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다니고 할 때 낯선 그 말을 들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여름철 바닷가로 휴가를 가는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고 기억된다. 그 때는 산업화한다고 하여 온갖 힘을 다 쏟아붓던 때다. 한 치의 땅도 놀려서는 안 된다고 개간을 강조하던 때요, 초과시간이란 말을 내놓을 수 없이 모든 힘을 쏟아 일을 할 때다. 주어진 휴가를 반납하고 일을 하면 굉장히 큰 자랑스런 일을 하는 것으로 인정되던 때다. 그러한 때 비키니나 수영팬티를 입고 바닷가를 거니는 느낌을 주는 이런 말은 참 생소하였다. 그 때 그런 관행이 오늘날에 와서 노동시간 52시간을 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적절한 최저임금제를 도입하고 실시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할 때와는 너무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쉼을 의미하는 바캉스에 대한 생각을 다시 모아보는 것은 참 의미가 있다.
살아 있는 것이라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고라야 한다. 들숨과 날숨이 잘 어울려야 한단 말이다. 먹고 마시고 내보내고 싸는 것도 균형을 잡아야 한다. 맑고 깨끗한 공기라고 하여 무조건 들이쉬기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탁하고 더러운 것이라 하여 그냥 내쉬기만 할 수는 없다. 맑든 흐리든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고르게 할 수밖에 없다. 한 가지만을 그냥 연속하여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놀랍게도 그것들 사이에는 그러니까 들이쉬고 내쉬는 것 사이, 먹고 내보내는 것 사이에는 아주 중요한 쉼 자리가 있고, 쉬는 시간이 있다. 멈춤이 있다. 빈자리가 있다. 가만히 생각하면 소용돌이처럼 마구 돌아가는 물 구렁이나 바람 속에도 놀랍게 쉼자리가 있다. 끊임없이 출렁이기만 하는 듯이 보이는 파도에도 일렁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쉼과 멈춤이 있다. 그것이 없으면 파도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가고 들어오는 것, 들숨과 날숨을 가르고 하나로 잇는 것은 쉼이요 멈춤이다. 그런 쉼이 없고 멈춤이 없으면 삶이 되지 않는다. 파도의 높은 꼭짓점이나 산의 정상 또는 파도의 밑바닥과 깊고 낮은 산골짝, 즉 노자가 말하는 곡신(谷神)이요 우주에 있다는 블랙홀[玄妙之門]은 거대한 쉼터인지 모른다.
며칠 전 아주 기쁘고 재미있는 모임이 있었다. 우리 대전 사회의 작은 몇 시민모임들이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스승이라고 여길 수 있는 사람들 몇을 모셔서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제비 뽑아서 그 쪽지에 써 있는 문구에 대한 대답을 하는 순서가 있었다. 내가 뽑은 것은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제안 같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다들 열심히 자기들이 하여야 할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기에 별도로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젊은이들로서 아주 탁월한 생각과 행동방향을 가지고 하는 희망찬 모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두 가지 제안할 것이 있다면 고전을 함께 공부하는 모임들이 여기저기 만들어지면 좋겠고, 자기가 맡은 일을 시작할 때나 끝에, 하루를 시작하고 끝마감할 때, 짧든 좀 길든 고요히 명상하거나 묵상하는 기회를 꼭 가지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 무섭게 몰아치는 사회분위기나 일터의 상황 속에서 일과 사람의 관계를 제대로 찾고 이끌어가려면 그런 숨고르는 시간, 진정한 쉼의 시간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삶을 살찌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탁월한 과학 기술과 잘 짜여진 사회체계는 숨을 몰아쉬게만 하거나 한 골목으로 내달리게 몰아만 간다. 이 때 숨통을 틔우는 일이 바로 짧은 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쉼터를 아예 만들어 놓는 것도 좋겠다. 대통령 집무실이나 국회의사당의 어느 곳에, 시장실이나 도지사실 또는 사장실이나 직장 어느 적절한 장소에, 시내의 어떤 곳에 가장 고귀스러운 지성소 하나씩을 만들어 놓는 것이 좋겠다. 거기에서 자기와 궁극의 존재가 잠시라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상화되면 참 좋겠다. 일상의 쉼터 말이다.
이러한 쉼의 자리는 어느 특정한 직종이나 삶에만 국한되어 만들어질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답답하게 여겨지는 모든 자리에 적절히 놓여 있어야 한다. 긴 거리를 달리는 마라톤 경기를 구경하다보면, 각 선수들이 어느 지점을 달릴 때는 그의 생체리듬에 따라서 물 한 모금 마셔야 하거나, 머리나 얼굴에 찬 물 한 번 뿌려주거나, 입 속에 무엇인가를 넣어야 하는 때가 됐다고 느껴지는 그 지점에 꼭 필요한 그것들이 놓여있다. 여기가 그 마라톤 선수의 쉼터다. 어떻게 삐끗하여 그것을 잡지 못하는 경우라도 곧바로 그와 같은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다른 조건이 만들어져야 한다. 쉼자리는 곧 생기를 넣어주는 곳이요 목마른 자에게 차갑고 맑은 물 한 모금 마시게 하는 옹달샘 터다.
이러한 쉼의 자리는 국제관계, 국가 간의 정치관계나 무역관계에도 꼭 같이 적용되고, 국내 정치계나 경제계에도 꼭 같이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이런 관계들에서 대개 강한 자들, 정치나 경제나 무력에서 강한 자들은 자기중심에서 약한 자들을 아주 강력하게 몰아붙이는 것을 일상으로 한다. 숨 쉴 틈 없이 공격하고 승복시켜야 한다는 전략을 펼치는 듯이 보인다. 한 번 이기는 듯 한 기운이 있으면 파죽지세로 몰아가야 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본다. 모든 관계는 서로관계이지 일방관계는 없다. 서로관계란 곧 함께 사는 길을 찾아서 나가는 일이다. 나만이 옳고 정당하다는 일방관계는 없다. 그런데 지금 미국이 전 세계를 향한 정치외교나 경제협상이나 제재를 보면 아주 오만하고 불손한 일방관계를 내세운다. 그것에 덩달아서 다른 강력한 국가들도 같은 논리를 펼치는 것이 살길이라고 나선다. 이러한 논리들은 상식에 미치지 못하는 북미관계, 남북관계, 한미관계와 한일관계 그리고 국내의 정치관계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관계들의 쉼터는 상식의 자리다.
숨 쉬고 숨 고르는 상식의 자리에서 본다면 미국과 북한은 오만과 키재기의 자리에서 내려와 거기 사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서 서로 대등하고 겸손한 자세로 나가야 한다. 남북관계도 미국으로부터 벗어나는 용기를 가지고 경제협력과 상호교류를 삶의 자리에서 확 풀어나가야 한다. 최근에 막 불거진 한일 간의 무역갈등도 마찬가지요, 북미관계를 풀어보겠다는 명분으로 한국에 더 많은 미군주둔비와 방위비를 증강하여 어마어마한 무기를 판매하겠다는 미국의 논리도 마찬가지다.(이 대목에 대한 대통령의 고민은 누구보다 더 크리라고 본다.) 여당과 야당의 대화에도 대통령의 원칙을 주장하지만, 삶의 숨통을 트기 위하여서 정당하지 않은 야당의 억지논리를 받아들이고 슬쩍 져주는 자리로 가는 것이 쉼터를 고르는 일이라고 본다. 쉼터는 삶의 알짬이다. 재미있고 생생한 자리다. 허허실실의 자리다. 져줌으로 이겨 함께 가는 자리다.
한 발짝 물러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관계를 살펴보는 것, 그것이 쉼의 자리요 돌아봄의 자리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것이 바캉스다. 물론 바캉스를 즐겼다고 하여 사람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보는 시각을 새롭게 하였다고 할까? 겉이 아니라 속이 달라졌다고 하여야 할까? 종교에서 말하면 깨달음을 경험하고, 영의 바람을 쏘였다고 하여야 할까? 거듭난다고 하여야 할까? 그것은 복닥거리는 지금-여기의 자리를, 약간 방향을 바꾼 지금-여기의 자리로 나를 옮겨 앉혀 놓는 것이라고 하여야 할까? 바쁠수록 돌아가고, 급할수록 쉬어간다는 말처럼, 작은 바늘귀에 실을 꿰려면 달리면서는 할 수가 없다. 숨을 고르고 걸음을 멈추고 손 떨림을 가라앉힌 다음에 고요히 작은 바늘 귀에 실을 넣어야 할 것이다. 한 번 쉬면 곧 바로 다른 숨결을 찾는 또 다른 출렁임이 올 것이다. 출렁임의 정상에 오를 이 때 또 숨을 고르는 한 순간이 올 것이다. 그 때는 바로 기도할 때요, 하늘을 바라볼 때요, 속에 자리하고 있는 스승의 말씀을 들어볼 때다. 바캉스, 바깥을 향하던 눈길을 돌려 속사람을 만지고 살피는 시절이다. 개인에게든 사회에게든 참 혁명을 낳는 시간이다.(2019. 8. 14.)
- 이 글은 금강일보 컬럼으로 썼던 것을 보강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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