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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조국사태;가짜뉴스VS진짜뉴스? "의도없는 사실은 없다"

언론의 편파성이 빛이 나고 갈채를 받을 때

이정훈(에큐메니안 편집장)

 

2006년 개봉해 소위 대박을 터트렸던 <라디오 스타>라는 영화가 있었다. 한국 영화계의 두 연기파 배우인 안성기 씨와 박중훈 씨가 주연했던 영화였다. 오래된 영화이니 잠깐 줄거리를 더듬어 보자.

 

영화 <라디오 스타> 중에서

 

명곡 <비와 당신>으로 88년 가수왕을 차지했던 ‘최 곤’(박중훈 분)은 그 후 대마초 사건, 폭행사건 등에 연루돼 이제는 불륜커플을 상대로 성업 중인 미사리 카페촌에서 기타를 튕기고 있는 신세지만, 아직도 자신이 스타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렇게라도 명맥을 유지하며 조용하나 싶더니 카페 손님과 시비가 붙은 최 곤은 급기야 유치장 신세까지 지게 된다. 일편단심 매니저 ‘박민수’(안성기 분)는 합의금을 찾아다니던 중 지인인 방송국 국장을 만나고, 최 곤이 영월에서 DJ를 하면 합의금을 내준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프로그램 명 '최 곤의 오후의 희망곡'. 하지만 DJ 자리를 우습게 여기는 ‘최 곤’은 선곡 무시는 기본, 막무가내 방송도 모자라 부스 안으로 커피까지 배달시킨다. 피디와 지국장마저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드는 방송이 계속되던 어느 날, 최 곤은 커피 배달 온 청록 다방 ‘김 양’을 즉석 게스트로 등장시키고 그녀의 사연이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며 방송은 점차 주민들의 호응을 얻는다. 거기에 집을 나간 아버지를 애타게 찾는 한 소년, 고스톱을 치다가 대판 싸운 할머니들의 이야기 등이 여과 없이 방송되며 더욱 인기는 급상승하게 된다.

 

사실 이 영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어떤 때는 방송으로, 또 어떤 때는 언론으로 이야기되는 매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필자는 저 영화를 보면서 언론의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언론이 무엇일까, 언론의 역할이 무엇일까, 언론이 어떻게 하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까 등등을 생각해 보았다는 뜻이다. 먼저 언론이란 무엇이고 역할은 무엇일까. 언론학에서 통용되는 이야기는 차치하고 영화 이야기를 따라가면 언론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이다.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로 말이다. 가감되지 않고 어떤 이들에게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말이다.

 

재미있었던 점은 누구의 목소리냐고 했을 때 이 영화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어떻게 생각하면 이 사회에서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거의 사라져 흔적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운 다방 종사자 ‘김 양’, 자신들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진 아버지를 애타게 찾는 한 ‘소년’, 나이가 들어 이제 툇방으로 밀려나 재미삼아 고스톱을 즐기던 ‘할머니들’까지.

 

하지만 이 목소리들은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 목소리에 울고 그 목소리에 배를 잡고 웃었다. 그리고 자신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모습도 보인다. 일상의 작은 이야기들이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감동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야기를 조금 넓혀보자. 이번 조국 전 법무장관 사태에서 한국 사회 언론의 민낯을 보며 온 시민들은 분노했다. 왜? 조 전 장관을 언론이 편들어 주지 못하고 물고 뜯었기 때문일까. 필자의 대답은 단연코 “아니다”에 “묻고 따블로 가자”이다.

 

시민들이 언론에 분노한 것은 그들이 권력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검찰의 목소리를 그대로 반영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아무런 검증 없이 오로지 검찰이 원하는 목소리를 그야말로 “날 것” 그대로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검찰보다 한술 더 떠 온갖 의혹을 생산해 냈다. 요즘 쓰는 말로 팩트체크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통적인 언론의 역할로 이야기되는 권력을 감시하고 권력을 비판하는 기능은 온데간데없었다. 여기에 언론사 내부의 게이트키핑(Gatekeeping)조차도 사려졌다. 게이트키핑이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어떠한 메시지가 선택되거나 선택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언론정보학에서의 게이트키핑은 뉴스를 생산하는 기자나 편집자에 의해서 뉴스가 취사·선택되는 것을 의미한다. 소위 데스크의 역할이 실종되었다.

또 한발 더 나아가 속된 말로 권위의 상징인 지식인들을 동원해 시민들을 내려눌렸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검찰개혁을 염원하는 시민들의 촛불집회를 “파시즘”으로 몰아붙이는 칼럼을 모 대학 교수의 펜을 통해 유포시킨 일이다. 파시즘의 정의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글을 버젓이 칼럼으로 내보낸 것이다.

 

과거 전통 매체들이 여론을 주도하던 시절에는 공정성과 객관성이 언론의 명분이었다. 하지만 이 때에 조차도 편파성은 여전히 문제가 되었다. 군사독재시절로 대표되던 시절 언론은 권력의 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편파성을 공정성과 객관성으로 포장했을 뿐이었다. 권력으로의 편파성만이 존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편파성이 지지를 얻을 때가 있다. 권력에 의해 짓밟히는 사람들의 모습과 목소리가 드러날 때 언론의 편파성은 호응을 얻게 된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언론을 칭찬하고 언론에게 힘을 실어준다.

 

언론의 편파성은 유지되어야 한다. 오로지 권력 밖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편파적으로 담아내어야 한다. 그럴 때라야 언론의 편파성은 빛이 나고 갈채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