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건과 신학 1기/청년(靑年), 그들의 세상을 말하다 - 2019년

고함: 에큐메니칼(刀)에 대한 쓸모 from Young Ecumenist / 남기평

 

남기평(한국기독청년협의회, EYCK)

 

2019년은 ‘자존감’에 대한 자기계발서가 쏟아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신자유주의 시장에서, 오버스펙이 정점에 달했기 때문에, 판가름을 할 또 다른 기준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서류전형 후(기존의 스펙은 당연하거고), 면접에서는 ‘자신감’과 ‘당참’이 필요하게 된다. 거듭되는 과잉 속에서, 우리(청년이)가 속한 사회는 개인의 쓸모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이제 더 이상 자의나 능동적으로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여러 좌절-실패라는 말을 쓰지 않겠다. 실패는 시도한 후 쓸 수 있는 단어라고 본다-을 직접적으로 겪은 후, 자연스럽게 체화되었기 때문이다. 좌절은 냉소를 불러일으키고, 계속된 좌절은 자존감을 무참히 찌그러트린다. 결국, 우리(청년이)가 속한 사회, 즉 신자유주의 체제에 버티고 서 있기 위해서는 ‘자존감’이 필수다. 사회에서 뺨을 맞고, 다시 뺨을 맞을 맷집을 키우기 위해, 개인의 자존감을 인공호흡기로 살려낸다. 인공호흡기를 떼는 그 순간, 루저(looser) 버튼을 누르고, GG를 칠 수밖에 없다. 이는 사회현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라지는 방식을 택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존감의 하락이든, 탈사회 되든,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기본이고, 사회에 여러 관문과 과제들을 각자의 특출난 개인기로 돌파하는 사회가 된지 오래다. 결국,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가장 쓸모없는 ‘패기’만을 운운할 수밖에 없다. 기성세대들도 그리고 밀레니얼 세대이고 답이 없다.



이 사회를 버텨나가기 위해서는 ‘자존감’이 제대로 서있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앞서 말했지만, 자아-존중감은 대 사회를 향한 맷집인 셈이며, 지구력인 셈이다. 자존감은 세 가지가 있을 때,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서 있을 수 있는데, 바로 효능감, 조절감, 안점감이 마련되어야지만 굳건할 수 있다. 먼저, 효능감은 ‘나는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인가’이다. 즉, 성과, 효율 그리고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존감은 사회적이며, 인정투쟁이다. 오늘날은 이 모든 것을 숫자로 환원한다. 환원된 수는 다시금 개인의 자존감과 비례한다. 실 예로 임금노동자의 절대적 숫자크기에 비교로 각 개인의 절대적인 효능감의 판단기준이 되어버렸다. 인정받은 만큼 사회적 안정의 울타리와 터를 다질 수 있다. 이어서 조절감은 ‘나는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이다. 곧, 나의 인생이나 일상을 자율적이고, 계획이 가능하고, 통제가 적절히 이루어질 때, 자존감은 상승한다. 삶의 주도권을 갖는다는 것, 이는 개인의 인생을 약육강식인 세링게티와 같은 사회를 헤쳐 나가는 힘인 동시에 자신감이다. 마지막으로 안정감은 ‘나는 안전한가’이다. 다시 말해, 나의 삶이 예측이 가능하고, 확실성을 가지고 미래를 긍정하며, 실패하더라도 사회적 의존의 공간, 그리고 패자부활전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지지기반’을 통해 만약 자존감이 하락하더라도, 다시금 회복시킬 수 있는 환원력이다. 그래야 다시금 그 넓디 넓은 세링게티에 입장할 수 있다. 환원력이 없다면, 좋은 먹잇감이나 비교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효능감, 조절감 그리고 안정감은 자존감의 수위가 들쭉날쭉해도, 자존감이라는 생물을 다시금 회복시켜주는 보약이다.



서두가 길었지만, 현재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입해보겠다. 과연 자신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의 자존감의 현실은 어떨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일부 몇몇은 자존감이 과잉이고, 일부는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으며, 또 다른 일부는 자존감 따위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피로감에 노출되어 있다. 전자는 그들이 자존감을 비대하게 만들 수 있는 토양이 확실히 존재했다. 이슈마다 자신들의 안정과 주도권을 가지고, 비록 작은 결과더라도 이루어냈다. 사회가 그만큼 암울했기에, 작은 결과가 크게 보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들은 해외단체의 지원과 지지를 통해서 안정감, 곧 지지기반도 확실했다. 그리고 30년이 지났다. 아직도 이들의 자존감은 비대하다. 온갖 중요한 자리는 그들의 몫이었고, 심지어 정부의 고위직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들의 자존감을 드높였다. 그런 자리는 효능감, 조절감, 그리고 안정감을 느끼고,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당신네들 뒤를 돌아보시라. 무엇이 남았는가?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곳은 바로, 효능감과 안정감이 필수다. 하지만 에큐메니칼 운동에 이 효능감과 안정감이 증발했다. 어찌 보면, 이들의 자존감은 미래를 갉아먹으면서 자라나서 비대해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각변동까지는 아니지만,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진지 오래다. 이를 체감할 수 있는 사건-으로 표현한다, 기쁘고 보람찬 일보다는 안타까운 일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에-은 바로 WCC 부산총회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자존감을 굳건하게 세울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그동안도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형이 바꾸고 있음을 다들 체감했다. 이는 효능감, 조절감 그리고 안정감을 교회로부터 얻어야한다는 당위였다. 86세대들은 이를 해외의 지지와 원조로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는 힘을 공급받았고, 사회에서 자존감을 세웠다. 하지만 이러한 1차 방정식이 이젠 틀린 값이 되어버렸다. 이제 교단, 지역교회 그리고 개교회로부터 자존감을 공급받아야했다. 자존감이 비대한 이들은 교회로 산출되는 방정식을 풀어본 일이 없다. 그러니 WCC 역대급 행사로 전락하고, 자신의 자존심을 최대한 세우는 방식으로 대형 행사만 되었다. 그 이후 남겨진 커다란 ‘똥’은 이젠, 자존감이 바닥인 이들과, 여러 이슈만을 쫓다가 가랑이가 찢어진 이들이 치우게 된 형국이다. 자존감이 비대한 이들은 현 에큐메니칼 운동에 사라졌다.

 

20-30대 젊은 에큐메니칼 활동가들에게 자존감은 바닥이다. ‘패기’만으로 되지 않는다. 패기는 자존감에서 나오니, 패기, 자신감, 당참은 뭐 보지 못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이 운동이 위축되었고, 교단과 교회의 후원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들은 효능감, 조절감 그리고 안정감을 찾을 수 없다. 그러니 고작 2-3년 버티다가, 터덜터덜 포기한다. 이것은 실패가 아니라, 좌절이다. 좌절한 이를 일으킬 재주는 이 운동에 없다. 그냥 측은한 눈으로 격려할 뿐이다. 활동가들에게는 ‘소명’이 있다. 그 소명은 희생할 각오를 하고 발 딛는다. 즉 실패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좌절’을 선사하는 것은 운동에 대한 환멸을 선물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좌절은 먼 곳에서 오지 않는다. 비대한 자존감을 가진 이들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들을 수 있는 영웅담, 성공담 그리고 그 방시들이다. 이제는 지각변동은 일어났지만,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졌지만, 2019년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은 87의 영광과 그 노하우에 머물러 있다. 자존감을 세울 수 없다면, 청년 활동가들은 사라지기를 선택하던가,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 발 없는 말은 천리간다. 이들에게도 네트워크가 있고, 정보가 있다. 이를 ‘활동비’문제, ‘끈기’문제, ‘개인의 성향’문제, 그리고 미래의 재생산 문제로만 치부하기에는, 이 에큐메니칼(刀)의 쓸모는 ‘배추’하나도 썰 날카로움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니 매력은 없다.

 

나는 묻고 싶다. 당신들의 운동, 활동 그리고 이야기에 매력이 있는가?
이는 세대를 막론하고 묻고 싶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에큐메니칼(刀)를 갈고 갈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