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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성탄, 성찰 2019

<취지문> 성탄, 피난, 학살

 

양권석(성공회대학교)

 

마태복음서가 전하는 성탄 이야기 안에는, 성탄의 분위기를 일순간에 무너뜨리는 이야기가 있다.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황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같은 시기에 태어난 모든 아이를 죽여서라도, 아기 예수를 없애야 한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탄의 밝은 빛 저편 어둠 속에 헤로데와 그를 둘러싼 예루살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불안과 두려움은 성탄의 기쁨과 환희를 계속 허락할 수 없다. 기대에 가득 찬 성탄의 모습을 일순간에 무너뜨리고, 살아남기 위해 국경선을 넘어 도망쳐야 하는 아기 예수와 그의 가족의 참담한 모습을 전면에 등장시켜 놓는다. 그래서 성탄은 학살의 현장이 되고 난민 가족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되고 만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상의 모든 순진한 아이들을 다 죽여서라도, 아기 예수를 없애야 한다는 권력의 잔인함이 섬뜩하다. 장차 자신에게 도전해 올 새로운 희망의 뿌리와 싹을 애초에 짓밟아 버려야 한다는 권력의 비정함과 용의주도함에는 일체의 감정이 배제되어 있다. 얼마 전 우리가 나누었던 성탄의 기쁨을 생각해 보면, 아기 예수가 엄마 아빠에게 재롱을 떨며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하지만 마태복음에서 만나는 아기 예수는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며 생존이 불투명하다. 살아남기 위해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집과 고향을 떠나야 한다. 아기 예수와 마리아와 요셉을 우리는 성가족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모범으로 삼고 따라야 할 거룩한 가족이다. 하지만 성가족은 겨울 추위도 잊은 채 따뜻한 행복감에 젖어 있는 가족이 전혀 아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약자들과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생존을 위해서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해야 하는 난민 가족이다.

 


지금도 매년 수천만 어린 생명들이 기아와 가난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우리가 조금만 욕심을 낮추어도, 권력이 조금만이라도 정의롭다면 수많은 순진한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지만, 우리는 그 수 없는 생명들을 잔인하게 죽여내고 있다. 그리고 그 때나 지금이나, 권력은 모든 수단을 다해서라도, 생명의 간절한 소망을 짓밟아서라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경제적 착취와 권력의 억압에 신음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고 국경선을 넘고 있는 세계다. 그리고 국경선에서, 바다에서, 버려지고 짓밟히는 어린 생명들을 바라보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세계다. 힘 가진 자들이 자기에게 도전해 오는 사람들은 물론이요, 새로운 희망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언제든지 순진한 생명들을 무참히 살해할 각오를 하고 있는 세계다. 성탄을 축하하며, 아기 예수를 기다린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난민의 입국을 철통같이 가로막겠다는 자를 투표로 뽑는 세계에 살고 있고, 평화를 노골적으로 위협하는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아놓고도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아기 예수가, 그 어린 희망의 싹이 위태롭게 솟아난 곳은 바로 이런 세상이다.

 


세상은 “에이런 쿠르디”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의 다섯 살짜리 형 “리틀 칼리프”를 기억하고 있을까? 터키의 한 휴양지 해변 모래에 얼굴을 묻은 채 숨진 상태로 발견됐던 인형처럼 작은 남자 아이를 얼마나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을까? 무심한 파도가 감청색 반바지에 빨간 티셔츠를 입은 아이의 창백한 얼굴과 작은 몸뚱이를 끊임없이 적셔대는 그 모습. 유럽을 향한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했던 또 하나의 성가족인 쿠르드족 난민 가족이었다.

 


배는 뒤집히고, 아무런 죄 없는 이제 겨우 세 살인 쿠르디와 그의 다섯 살 짜리 형이 그렇게 버려졌다. 아기 예수는 쿠르디와 칼리프로 왔고, 그리고 지금도 바다에서 그리고 가난과 국경선 장벽 사이에서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하고 있는 그들로 오고 계시다. 그리고 그들에게 반드시 새날의 희망이 있음을 피흘리며 죽어가며 말하고 있다.
교회와 신학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성육신’이나 ‘육화’와 같은 어려운 말로 표현한다. 한 마디로 하늘과 땅이 만난 사건이요, 하느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살게 된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교회는 끊임없이 물어 왔다. 왜 그랬을까? 왜 아기 예수는, 그 학살의 현장에, 그 난민의 생존 투쟁 가운데, 위태로운 난민 아이로 왔을까? 왜 그렇게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살다가 가셔야 했을까? 전지 전능한 하느님이라면 모든 선택이 가능했을 터인데, 왜 하필 인간이 되어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살려고 했을까? 욕망 가득한 세상, 자비심도 우정도 없는 세상에 와서, 생존 자체를 위협 받으며 사는 그 길을 택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희브리서의 대답(2:10-18)은 의미심장하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인간과 똑 같은 삶을 살게 한 것이 하느님의 특별한 뜻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이라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하느님 스스로 아들을 인간으로 보내서 우리와 함께 살다가 죽게 할 생각을 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 오심으로, 모든 인간을 형제로 부르고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다르게 말하면, 모든 인간들을 자신의 형제와 자매로 삼기 위해서,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스스로 인간이 되신 것이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느님이 인간의 고통에, 인간의 삶의 경험에, 몸소 참여했다. 지금 고난 받는 자들의 삶에 함께 하기로 작정하였다. 쿠르디와 리틀 칼리프와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고난과 죽음을 겪어 내시도록 아들을 보냈다.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인간과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천군천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든 나쁜 놈들을 다 물리치고 무릎 꿀려서 정의로운 세계를 만들면 될 것인데. 왜 하느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아들을 보내서, 이 세상의 고통 속에 함께하게 하셨을까? 이 질문이 바로 오늘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할 성탄에 관한 질문일 것이다.

 


지식이나 지혜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하느님은 원인도 알고 과정도 알고 결과도 아시는 분일 것이다. 하지만, 논리를 세우고, 아는 것을 따라서 계획하고, 알고 있는 지식이나 지혜를 전제로 실천하지 않았다. 그분은 그 모든 인간에 대한 지혜와 지식을 넘어서서, 인간의 아픔과 고난에 지극히 공감하며 함께하였다. 사람과 생명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였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와 고통을 나누시며, 우리와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셨다.

 


그 사랑만이 모든 지식과 지혜를 넘어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알량한 지식이나 논리나 머리로 재단하고 판단하기에 앞서서, 가난과 고통과 억압 속에 죽어가는 그들과 함께 고통 받으며, 함께 우는 것이 먼저다. 스스로 인간의 몸이 되고, 스스로 인간의 욕망이 되고 고통이 되고, 스스로 인간의 기쁨과 소망이 되시는 그분의 사랑의 길, 그 길을 향해서 우리를 부르고 있다. 그것이 성탄을 사는 길이다. 그것이 믿음의 길이요 교회의 길이다. 진정으로 성탄을 살아내는 우리의 삶과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다시 한 번 깊이 품어 본다.

 

 

 지난 한 해 동안 사건과 신학을 위해 수고한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글을 기고해 주신 수많은 분들, 그리고 편집을 위해서 애쓰신 분들, 함께 생각을 나누어준 많은 분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처음부터 큰 욕심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건과 신학이 핑계가 되고 계기가 되어 새로운 꿈을 더욱 많이 나눌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