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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1216 부동산대책

<취지문> 건물주가 조물주인 세상에 집은 없다. / 양권석



양권석 (성공회대학교)

 

“부동산 정책이 아니고 주택정책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언론과 미디어와 시장은 주택정책을 부동산정책으로 자동번역하고 있다.” 지난해, 정부의 정책을 비웃듯이 강남의 부동산 가격이 치솟고 있을 즈음에, 주택정책 전문가라는 사람이 나와서 했던 말이다. 내가 이 말을 지금도 기억하는 이유는 미디어와 시장에서뿐만 아니라 내 자신 안에서도 그 자동번역기가 거침없이 작동하고 있음을 깊이 깨닫게 해 주었던 일침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생각하거나 의심할 틈도 없이, 주택이나 주거정책이 부동산 정책으로 자동 번역되고 있는 이 현실이야 말로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고 공언하는 사회의 오만이 자리잡고 있는 바탕일 것이다.


부동산 문제와 별로 관계가 없을 것처럼 보였던 또 한 가지 기억이 갑작스럽게 겹쳐 온다. 작년 어느 때인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주관하는 교회일치 모임에서 한 목사님이 했던 이야기다. 모두가 교회의 일치에 관해서 신학적 고민을 하고 있는 자리에서, 그 목사님은 뜬금없이 교회 일치 같은 이야기 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일치가 안되어서 문제가 아니라, 일치가 너무 잘되어 있어서 문제라고 강변하였다. 메가니 기가니 하는 대형교회에서부터 셋방살이하는 작은 교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장로교 감리교 등등의 교파적 차이마저도 초월해서 모든 교회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 목사님의 주장이었다. 모두가 으리으리한 성전을 가득 메운 넘치는 신자 수를 향한 욕망으로 하나가 되어 있어서, 교파와 전통의 차이는 이미 무색해졌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 목사님의 눈이 조물주가 아니라 건물주와 야합하고 있는 교회를 가장 예리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건물주가 조물주를 찬탈하고, 강남불패 혹은 부동산 불패라는 건물주들의 신화가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신화가 되었을까? 일차적으로 오랜 동안 계속 되어 온 정책의 실패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규제를 내 세우면서도 투기라는 불의하고도 무절제한 수단을 방조하거나 지원해 온 정책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불패의 신화가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 안에는 심각하게 왜곡된 정신상태와 깊은 허무가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로 부동산 투기 불패 신화로 뒷받침되는 건물주가 조물주 위에 서는 사회는 성실하게 일한 만큼 삶이 보장된다는 가장 상식적이면서도 성서적인 원칙을 비웃는 사회다.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도,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도, 시장의 상인에게도, 그리고 일반 직장인들에게도, 그들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양심적으로 잘 해 내는 것이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보람이고 행복이어야 할 것인데, 부동산 불패의 사회에서는 성실하게 양심적으로 일해서 삶을 지킨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패배한 약자들의 오기 정도로 취급 받는다. 사업과 장사와 농사와 개인의 삶을 지키는 길은 성실하게 그리고 양심적으로 맡은 일을 수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 투기 수익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느냐에 달린 문제가 되고 만다.


둘째로, 부동산 불패의 신화가 지배하는 사회는, 자유와 소유의 역할이 전도된 사회이고, 소유와 안전의 불의한 동맹이 지배하는 사회다.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참된 자유를 위해서 소유가 있는 것이지, 자유가 무절제하고 무한한 소유의 욕망을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 삶의 위기에 처해서 공포와 두려움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더 많이 쌓고 더 많이 소유하여 안전을 도모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소유는 빼앗긴 자의 자유는 물론이요 그렇게 배타적으로 소유한 자의 자유마저도 짓밟는 죽음의 길이 된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다. 영원의 삶의 길은 배타적 독점을 통해서가 아니라, 상생을 위한 나눔에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자유와 안전은 배타적 소유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누며 더불어 사는 길을 찾을 수 있을 때 오는 것이다.


셋째로 부동산 투기 불패의 신화를 바탕으로 건물주가 조물주 위에 서는 사회는 교회가 말하는 하느님 사랑의 보편성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부동산 가치에 훼손을 가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거부하는 사회다. 그래서 장애인학교, 임대주택, 이주민 시설은 혐오시설이 되고, 그런 시설에 속한 사람들을 향한 차별의 시선을 강화한다. 그 뿐인가 장례식장이나 납골당 같은 우리 삶의 소중한 과정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경멸과 혐오를 보면, 부동산 불패의 믿음 안에 있는 그들의 영원한 삶에 대한 주장은 죽음을 포함하는 생명의 전 과정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근본적인 부정이다.


마지막으로 건물주가 조물주 위에 서는 세계에서 건물은 있어도 집은 더 이상 없다. 각자의 자유를 지켜주고 가족과 더불어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삶을 나누고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바탕이 되는 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부동산이 된 집은 불의한 자유를 위하여, 나만의 안전을 위해서, 배타와 독점을 지켜내야 하는 전쟁터가 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이런 생각들을 나누면서, 2020년 새해 첫 달의 사건과 신학의 주제를 부동산투기의 문제로 삼았다. 참으로 귀한 여러분들의 글을 모아 보았다. 다양한 각도에서 많은 생각들을 하게하는 글들이다. 최형묵, 송진순, 한수현 세분 신학자의 글은 풍부한 성서의 전거들을 통해서 우리가 집과 건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말해준다. 구약성서의 희년 정신, 부동산이 된 건물들을 버려두고 마구간에 오신 예수, 그리고 인자는 머리 둘 곳 조차 없다 하신 예수님의 삶에서 부동산과 집의 차이를 읽어내고 있다. 그리고 교회가 부동산 불패의 신화와 공모해 온 과정들도 성찰하고 있다. 아울러 쌔미 선생과 이성영 선생의 글도, 부동산 투기의 세계가 가진 문제들과 우리의 잘못된 시각에 대해서 뼈아프게 지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늦기 전에 부동산 불로소득의 만찬을 거부하고 땅과 집을 ‘투기상품’이 아닌 ‘삶의 터전’으로 되돌려 놓기 위한 전방위적인 시도에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는 이성영 선생의 간곡한 호소 앞에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다. 아무쪼록 다섯 분의 귀한 글이 부동산은 시장의 문제이지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고 안일하게 생각해왔던 우리를 일깨우고 다시 세우는 귀한 자극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