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순(NCCK 신학위원, 이화여자대학교)
지난 12월 16일 “주택시장 안정화 방안”이 발표됐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을 잡아보려는 정부의 초강수 대책이다. ‘분양가 상한제 보완, 대출규제 강화, 시장교란행위 조사 강화’를 골자로 하는 나름의 묘안은 9억원 이상 고가주택 소유자와 다주택자들의 대출 규제를 통한 갭투자 등 부동산 투기 저지를 목표로 한다고 한다.
정부 발표 후 한 달,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이 끝나고 서로 다른 의견들이 팽팽하게 쏟아졌다.
“한국감정원 올해 수도권 집값 7년 만에 하락 전망”,
“엄포 통했다 강남 3구 집값 7개월 만에 하락”,
“갭투자 막고 세부담 증가 보유세를 비롯한 종부세 부담 늘려...
고가주택 대출 규제, 집 투기 저지”
vs
“전셋값 급등 및 전세물량 부족, 전세대출 규제의 악재”,
“명품 학세권 매물 찾기 어려워”,
“‘아파트 청약=로또’ 아파트 매매가가 분양가의 평균 10%이상 높은 ‘로또 청약’으로 횡재”, “비규제지역 무순위 청약에 수만명 몰려…12·16대책 풍선효과”,
“분양가 상한제에도 강남불패”
총선 3개월을 앞두고 정부는 투기와의 전쟁, 주택가격 안정화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그 실효성을 평가하기에는 이르다. 아니 실효성이란 게 나오기는 할까 하는 의구심이 먼저 든다. 분명한 건 내 집 마련이 평생의 꿈인 한국인들에게 속수무책으로 상승하는 집값은 좌절감과 열패감만을 안겼다는 것이다. 계급 이동의 사다리는 진즉에 사라졌고, 빈부격차는 더욱 견고해진 데다 평균 수명 100세를 향해 달려가는데, 노동하지 않고 몇십 년을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유일한 안식처이자 피할 바위. 서민들에게 집 한 채는 그런 존재다. 편히 안식하고 삶을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개념을 넘어 자신의 경제적 위치와 사회적 계급의 시금석, 동시에 나의 존재와 현재와 미래를 담보해주는 투자처가 집이다. 그러니 불안정한 시대, 저금리의 주택담보대출을 손쉽게 꺼내 들고 일생을 믿고 맡길 독보적인 투자처인 아파트에 너도나도 혈안이 되었다. 강남3구(강남·서초·송파)와 마용성(마포·용산·성동)은 문자대로 금따는 콩밭이고, 10대에서 70대까지 세대불문하고 구매 전선에 나서는 기형적 투자 현상이 붐을 이뤘다. 수저론을 넘어 부동산 카스트 시대다. 1216대책으로 괴현상이 주춤한다고 하나 지표면 아래 숨죽여 있는 들끓는 욕망들이 언제 터져 나올지는 모를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학적 성찰을 위해 착한 마음으로 레위기 25장을 펼쳐 든다. 이 장은 안식년과 희년의 선포, 즉 하나님이 선사하는 자유와 해방이라는 은혜의 해를 선포하기 때문이다(10절). 땅은 나의 것, 곧 하나님의 것(23절)이라는 장엄한 선언에는 토지의 영구 매매와 사적 소유권을 금지함으로써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맺은 계약을 공고히 하고, 대부와 이자 금지를 명시함으로써 빈자에 대한 사회적 보호와 노예제도 및 해방의 규례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 그리고 강대국들에 의한 지난(至難)한 역사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종교적, 사회적 실천의 근거로 삼고 인간 존엄의 가치를 우선적으로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밟고 있는 땅은 하나님의 계약과 그분의 공의가 살아있는 상생이 가능한 땅이라는 것이다. 권력자들의 횡포와 타락, 착취와 약탈에서도 이스라엘은 땅의 가치를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증명해온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땅의 의미가 이렇다 한들, 이는 그저 소리없는 아우성이요, 저 푸른 해원을 향(向)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지어의 손수건이고, 기독교인의 경제관에 관해 신학적으로 외친다 한들,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백로처럼 날개를 편 애수일 뿐이다. 이 나이 되도록 부동산 출입할 일도 없고 4대 보험도 안 되는 계약직이라 대출은 꿈도 못 꾼 채 부모 집에 얹혀사는 이가 성서에 근거하여 토지보유세나 토지공개념이라 외친다 한들, 잎새에 이는 바람에 파들거리며 괴롭기만 할 뿐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고결한 토지 대책들이야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동산 대책이 쏟아질 때마다 저마다 획기적이고, 성서적이라며 질러대 왔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면 희년 정신과 가치를 뒤적이기보다는 참수당한 요한의 뒤를 따라 바리새인들과 쌈박질하고 사람들 깊숙이 만나 울고 웃었던 예수가 심정적으로는 더 가까우리라. 인간에 대한 존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제도와 율법으로 인간과 사회를 옭아매는 세상에서 예수는 나름의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냈다. 순박한 촌농들, 무지렁이 다혈질 어부들, 셈만 밝은 영악한 먹물들에게 수수께끼로 비유로 하나님에 대해 물었고, 율법 정신에 대해 말했다. 귀신들려 괴롭고, 먹을 게 없어 아프고, 병들어 쫓겨난 이들에게 세상 눈총 아랑곳없이 재능기부를 하고 다녔고, 이 모습에 빠져든 이들은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의 유랑에 기꺼이 동참했다. 어차피 살아도 산 게 아닌 세상, 예수 따라 다니면 폼이라도 나서일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원대한 소망에서일까? 그물 끌어 올리고 밭 일궈봤자 떠돌며 빌어먹는 거나 별반 차이가 없어서일까? 어쨌든 명줄 내놓고 세상 뒤엎을 일에 과감히 뛰어든 이들은 설익은 열정에 취해 둘씩 짝지어 마을에서 마을로 유랑하였다. 무전취식해도 하늘나라의 비밀은 받을 사람만 받는 거라고, 거부하는 이들에게 발의 먼지까지도 떨고 나오던 배짱 두둑한 이들이 사도들이었다.
예수와 사도들의 거침없는 기생(과 기행)은, 그 누구도 안전과 복지를 보장해주지 않는 사회에서 정주가 아닌 유랑으로, 혈연이 아닌 믿음에 기초한 바닥공동체와 새로운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어갔다. ‘하나님의 거룩한 일’이라는 타이틀까지 붙여가면서.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며 당당히 기생하는 예수에게 사람들은 묘하게 매료되었고 기꺼이 공생의 자리를 마련했다. 물론, 모난 돌은 정을 맞았다. 예수는 매달렸고 의리로만 살 것 같았던 사도들은 흩어졌다. 겨우 모인 운동 세력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러면 어떠랴 싶다. 어차피 금따는 콩밭에서 현금으로 알짜배기를 줍줍 할 수 없을 테니, 마음 편히 흙따는 콩밭에 뒹굴며 말이라도 멋대로 내지른다면 좀 폼나지 않을까? 좀 예수 따라 사는 척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궁리해본다. 인생에 하나 둘, .... 셋 넷 빠진다고 못살까?
직장인의 저축으로 2~3억은 우습게 널뛰는 집값을 잡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청약 당첨이 가점제로 변경되면서 전문직도, 신혼부부도 아니며, 애도 없는 싱글은 ‘내 집 마련’에서 더욱 멀어졌다. “나의 대출은 세입자가 갚아줬고, 고급차와 아파트도 세입자가 구매해줬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시대의 우상인 어느 자산가의 말이다. 속쓰린 좌절과 열패감에 젖어도 피땀 흘린 남의 돈으로 우아하게 사느니, 무계획도 계획이라며 냄새 폴폴 풍기며 기생과 공생 사이에서 기꺼이 주변인으로 사는 것이 맘 편하지 아니한가. 혹시 아나? 무능력이 능력이 되고, 무자산이 자산이 되는 날이 올 수도 있을 테니, 나 같은 이들과 함께 누워 궁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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