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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1216 부동산대책

성서적 내집 마련 / 한수현

 

한수현(NCCK 신학위원, 감리교신학대학교)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있다. 요즘은 건물주인이 하나님 보다 높다는 말이다. 좋은 길목에 있는 건물이나 아파트를 잘 사서 큰 이익을 남기고 팔았다는 이야기가 어디서나 들려온다. 그래서 빚을 내서라도 집이나 건물을 잘 사놓으면 그 빚을 갚고도 남는 돈을 벌 수 있다고들 말한다. 옛날엔 국토 개발 계획과 같은 큰 국가 계획을 미리 예측하거나 알아내어 땅을 사놓는 것이 유행이었다. 대규모 개발의 시대가 저물고 수도권을 중심으로 상권과 생활권이 집중되자 수도권의 집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건물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오르길 기대한 사람들은 빚에 빚을 물려서라도 건물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이를 방관한 정부와 기득권으로 인해 중산층 정도의 소득수준으로도 서울에 집을 마련하기 쉽지 않은 시대가 도래 했다. 그리고 이런 변화로 가장 많은 이득을 챙긴 곳 중 하나가 교회이다.

 

마을이 생기면 제일 먼저 교회를 짓고, 그 다음 학교를 짓고, 이후에 신학교를 짓는다는 말이 있다. 구한 말 한국에 도착한 외국인 선교사들은 이를 그대로 따랐다. 조선의 수도 한복판에 미국교회에서 받은 헌금으로 교회와 학교 부지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힘을 얻어 자라난 교회에서 헌금이 나오자 이곳저곳에 교회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세대 외국인 선교사들이 유명을 달리하자 그 뒤를 현지 목회자들이 잇기 시작했고, 자연히 외국의 자본으로 얻은 부동산들은 교회의 소유가 되었다. 거기에 순복음 교회로 대표되는 여의도 신화에 힘입어 한국 교회는 신도시 개발을 제일 먼저 뛰어들어 건물을 올렸고 수십 배의 시세차익을 얻기를 반복했다. 게다가 지금에는 이를 따라하다 막대한 빚에 시달리는 대형교회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한국 대형교회의 신화적 성장은 이러한 땅 투기와 부동산 투기와 함께 이어져 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땅과 건물에 대한 욕심이라면 이스라엘민족도 한민족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 원래 하나님의 의도는 알기 힘들지만, 아브람이 하란을 떠난 가장 큰 이유는 땅과 아들을 준다는 야훼의 말을 문자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세계의 수도와도 같았던 도시 ‘우르’를 떠난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의 사연을 우리는 알 수 없으나 결국 당시의 경쟁에서 밀려간 가족의 이야기로 보아도 문제없어 보인다. 하란에서 속절없이 꿈도 없이 살던 아브람을 떠나게 만들고 그의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목적을 이루게 한 힘은 결국 땅을 준다는 야훼의 꾀임이었다. 그래서 아브람은 꿈을 이루었을까? 긴 히브리성서를 요약하면 아브람의 자손들은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얻는다던 가나안 땅은 커녕 아브람이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 땅은 자기의 무덤뿐이었다. 이후 굶주림에 지쳐 이집트(애굽)로 내려가 노예가 되지 않았던가? 노예는 자신의 소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노예의 억울함을 가지고 탈출하여 국가를 세워보려 했지만 결국 더 강하고 더 욕심 많은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

 

식민지 생활을 보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은 땅에서 집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결국 땅을 정복하여 점유하는 것은 끝없는 전쟁의 연속임을 깨달은 것일까? 땅의 주인이 되려면 자신의 나라의 법에 의해 주인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는 순간 그 땅은 주인의 손을 떠나 정복자의 손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땅에 건물을 세우면 그리고 그 건물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면 그것은 인간의 법의 차원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된다. 대표적인 예가 성전이다. 신이 거하는 곳을 만들어 그곳에 신이 거하면 땅의 주인이 바뀌어도 쉽게 무너뜨리지 못한다. 다신교를 인정했던 제국은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식민지인들의 성전을 파괴하지 않았다. 땅위에 세워진 건물, 그리고 그 곳에 신이 깃들 때, 그 곳은 땅 이상의 공간이 되고 신의 자리가 된다. 식민사회에서 자연히 하나님 신앙을 세우기 위한 첫 번째 과제는 하나님의 집을 다시 건설하는 것이 되었다. 두 번째 성전 스룹바벨의 성전이 건설되고 예루살렘의 시온산은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무너져 가던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하고 크게 확장하여 예루살렘의 부흥을 꾀한 이가 헤롯대왕이었다. 그는 당시 유대 지방만이 아니라 그 일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을 짓기 위해 40년이란 시간을 투자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어 성전을 지었다. 이 성전이 예수가 무너질 것이라 예언했던 그 성전이고, 스데반이 말한 하나님이 거하지 않는 손으로 지은 건물이었다. 예수는 땅위에 신이 거하는 건물을 짓지 말고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이 거하게 하라고 말했다. 사마리아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라 영과 진심의 예배에 하나님이 거하실 것이라 말한 것이다(요한복음 4장).

 

동방박사들이 왕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곳은 사람이 아니라 동물을 위해 마련해 둔 거처였다. 건물주가 신이 된 나라, 성전이란 건물을 지은 헤롯이 왕이 된 나라에 하나님의 아들이 거할 처소는 없다.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재미있게도 예수는 가버나움의 한 곳에 들어가 그 곳이 집이라고 부르고 거한다. 가버나움은 제자들을 거둬 들인 곳이고 베드로와 그 가족들이 살 던 곳이다. 갑자기 그 곳에 집이 생겼다. 복음서는 그 곳을 누구의 집이라 기록하지 않고 그저 집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거하는 곳, 먹고 자는 곳이다. 예수와 그 제자들 사이에 더 이상 누구의 집이란 말이 붙지 않는다. 모든 형제 자매의 집이 나의 집이고 그들의 집이다. 끝없는 소유욕만을 불러 온 자본주의의 지배를 벗어나는 길 중 하나는 아마도 소유의 개념을 확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의 소유가 되게 해보는 것이다. 세습으로 대형 교회가 병드는 이유는 그 큰 땅과 건물이 모두의 소유가 아니라 목사와 그 아들의 소유가 되기 때문이다. 말씀으로 씨를 뿌리는 자는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얻을 것이라 말했다.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 우리의 소유가 될 때, 우리가 거할 곳은 삼십채, 육십채, 백채의 집이 된다.

 

이 글을 읽으며 어떤 이는 이런 ‘정신 승리’를 비웃을지도 모른다. “집 구하기가 어려우니 차라리 남의 집이 우리 집이라고 생각하자”는 말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재미있게도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전한 말이 바로 같은 말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말. 문제는 가보니 그 땅이 자기 땅이 아니라 이미 주인이 있는 땅이었고 거주지였다는 것이다. 그 후로 수 천년의 시간을 지나 예수를 통해 새로운 소유의 개념을 익힌 사람들이 세운 것이 교회였다. 눈에 보이는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었다.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며, 영원한 것을 사모하려는 마음이 예수의 제자들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소유였다.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새번역, 고전 6:10)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새번역, 빌 4:11)

 

이 말들이 소유에 눈먼 자에게 줄 가장 무거운 충고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