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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스카이 캐슬

스카이캐슬과 '아버지 하느님' / 최영실

스카이캐슬과 ‘아버지 하느님’ 

- 최영실(성공회대학교) 

JTBC 홈페이지 중 "스카이캐슬" 페이지


1. ‘그’가 있는 한, ‘스카이캐슬’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은 우리 사회의 교육시스템의 문제를 예리하게 고발하면서 숱한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20회 최종회를 본 시청자들은 그 결말에 실망하면서 EBS 교육방송이 되고 말았다고 비판을 쏟아냈다. 죽은 혜나를 제외한 거의 모든 가족이 마지막 회에서 나름의 길을 찾고, 가정을 유지하고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는 것이다. 한 영화평론가는 “잘나가던 스카이캐슬은 20회로 완전히 망한 드라마가 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제목에 성이 들어가는 드라마는 성이 불타면서 끝나는 것이 의무”이며, “살아남은 여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불타는 캐슬에서 빠져 나오는 결말이 가장 정상적이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고 새로운 결말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렇게 탄탄하게 세워진 스카이캐슬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을까? 드라마 스카이캐슬 최종회 마지막 장면은 감옥에 있다고 생각한 김주영 샘의 재등장으로 끝난다. 김주영 샘은 입시설명회 사회자로부터 ‘대치동 최고의 수학 학원 탑에서 최고의 입상자를 낸, 최고의 강사’로 소개받고 나타난다. 무서운 카리스마를 가지고 눈을 치켜뜨고 비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한 가정이라도 잘못된 교육과 입시제도에서 구원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처음 의도와는 달리, 입시코디네이터를 찾는 엄마들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그리고 예서 엄마 역의 배우 염정아씨가 광고모델로 나온 ‘웅진씽크빅 AI수학’은 이 드라마와 함께 대박이 났다고 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가부장적 지배질서 구조와 치열한 경쟁과 전쟁의 승리를 통해 세워진 저 캐슬들은 절대로 그렇게 쉽게 무너지고 불타버릴 수 없다. 저 높은 성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이 감옥에 가고 죽임을 당해도 일말의 가책도 느끼는 않는 사람들, 자신들을 성 안에 있는 사람과 동일시하며 그들이 입는 옷과 장신구를 사며 성 안에 들어가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 성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부장적이며 군주적인 ‘아버지 하느님’의 이미지가 고정되는 한, 저 캐슬은 무너지기는커녕 더욱 더 찬란히 빛을 내며 고고히 서 있을 것이다. 어떤 여성 신학자는 적나라하게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이 아버지면, 아버지가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자리에 앉은 ‘아버지’, 그들이 무엇을 해 왔는지는 여성과 약자에게 가해진 저들의 잔인한 역사를 보면 알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성’을 높이 쌓으려고, 총칼로 약소국가를 침략하고 힘없는 자들을 차별하고 죽였으며, 여성들을 성노예로 삼았다. 


2. 스카이캐슬과 피라미드를 무너뜨리는 ‘쌍둥이 엄마’와 ‘쌍둥이들’

   그러나 나는 이 드라마를 보는 동안 쌍둥이네 가족을 통해서 저 높고 화려하고 단단한 성, ‘스카이캐슬’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아름다운 평화의 세상이 열리는 것을 본다. 그것은 놀랍게도 20년간 전형적인 가부장적 남편에게 말없이 복종하던 쌍둥이 엄마와 그 아들들의 저항과 투쟁에 의해 일어난다. 쌍둥이 엄마는 남편에게 다음과 같은 반성문을 남기고 아들들과 함께 그 집을 나간다. “가부장적인 남편과 결혼한 것을 반성합니다. 20년 간 아이들의 고통을 방관한 것을 반성합니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참아 온 것을 반성합니다.” 


   가부장적인 아빠에게 한 마디도 못하고 메트로놈이 켜진 공부방에서 문제를 풀던 쌍둥이들은 영재 엄마의 죽음, 혜나의 죽음, 그리고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 우주를 보고 변한다. 쌍둥이들은 엄마에게 폭력을 저지르려는 아버지를 떠메어 문 밖으로 내몬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그 집을 떠난다. 집으로 돌아오라는 아빠의 요구를 듣고 쌍둥이 형은 단호하게 답한다. “아빠, 진짜 죄송한데요. 저희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 없어요. 우린 안 들어간다니까요. 다시 말씀드려요? 우린 아빠랑 못 살겠다고요. 살기 싫다고요.” 동생도 말한다. “저희는 아빠 없이 사는 게 너무 좋아요. 행복하고....” 


   쌍둥이 아빠는 홀로 컵라면을 끓여 먹으며 울다가, 그가 그렇듯 애지중지 세워 놓았던 피라미드를 향해 컵라면을 내던진다. 피라미드 모형에 붙은 그 더러운 라면 국물과 면발들... 아내와 아들들에게 버림받고 밥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술에 취해 울던 쌍둥이 아빠는 결국 항복한다. 쌍둥이 엄마가 요구한 것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쌍둥이들이 자율적으로 공부하는 동안 부엌에서 요리를 한다. 그것도 딸이 입혀준 고운 앞치마를 입고서. 현실적으로 정말 쌍둥이 아빠처럼 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유보하기로 하자. 불의한 세상에 맞서 싸우며 저항하는 작은 자들에 의해, 세상은 이미 변하고 있으니까.


3. ‘군림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식사 시중을 드는 하녀, 아버지’

   예수의 선포에서는 가부장적으로 군림하는 ‘아버지 하느님’을 전혀 볼 수 없다. 그가 선포한 ‘하느님’은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에게 모두 똑같이 해와 비를 내려주시는’(마 5:45) 자비한 분이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들을 업신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마 23장), ‘낮은 자’이다. 하느님의 형상을 그대로 보여주러 이 땅에 오셨다는 예수님은 자신을 높은 자리에 앉아서 음식 시중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도리어 ‘음식을 만들며 시중드는 사람’( 눅 22:24-27)이라고 말한다. 당시 음식 만들며 시중드는 사람은 누굴까? ‘하녀’이다. 


   예수의 선포는 놀라움의 연속이다. 그는 선포한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마 19:30, 20:16). 그리고 단언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 20:28).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막 10:42-44). 그런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향해, 무엇이 되려고 달려가고 있는가? 가부장적으로 군림하던 쌍둥이 아빠가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만드는 장면은 스카이캐슬이 진정한 ‘하느님 나라의 성’으로 아름답게 다시 세워질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