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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스카이 캐슬

'SKY캐슬'(하늘의 성)의 식탁과 예수의 식탁 / 한수현

‘SKY캐슬’(하늘의 성)의 식탁과 예수의 식탁

- 한수현(감리교신학대학교)

JTBC 홈페이지 중 "스카이캐슬" 페이지


   한국사회에 하늘의 성(SKY캐슬)이 나타났다. 아니 발견되었다. 한국사회를 뒤흔든 드라마 하나가 이를 고발했다. 언제부터 나타났는지 특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하늘의 성은 고고히 한국사회의 상공을 날고 있었다. 이 하늘의 성에 대해 말한 드라마의 시작은 성대한 파티이다. SKY캐슬(하늘의 성)에 열리는 성대한 잔치 가장 윗자리에 앉을 사람들은 이미 정해져 있다. 최근 서울대 의대에 합격한 아들의 부모가 그들이다. 하늘의 성은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명문 종합 병원의 교수가 되어야 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잔치에 모인 사람들은 한 시도 편안하게 즐길 수 없다. 자녀들이 서울의대를 졸업하지 않으면 하늘의 성에서 언젠가는 쫓겨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서울의대에 자녀들을 보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그래서 하늘의 성의 파티에는 온갖 권모술수가 넘쳐난다. 약속된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면 부정과 불법은 쉽게 정당화 된다. 하늘의 성의 약속은 곧 그들의 삶을 미움과 배신, 위선과 증오로 얼룩지게 한다. 삶의 파괴는 결국 죽음으로 직결된다. 파티의 가장 윗자리에서 기쁨에 몸을 떨던 아들의 어미는 곧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한국사회의 하늘의 성에 대한 본 드라마는 서열화된 교육제도와 이에 희생되는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비극이 교육 분야에만 나타날까? 부정과 불법임을 이미 알면서도 이를 저지르고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기를 반복하는 현상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풍경이다. 심심하면 터지는 정치계, 경제계, 기업계 부정부패사건의 주인공들은 얼마 전까지 그런 사람들을 핏대를 올리며 비판하던 사람들이다. 정치와 경제에 대한 한국 사회의 불신은 극에 달했다. 결국 돈이 없거나 운이 없어서 걸린 것 뿐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최근의 국정농단 사태와 사법농단 의혹에도 정작 놀라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이미 알면서도, 느껴왔으면서도 모른 척 했던 일이기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지금 법조인을 준비하던 사람들은 점점 줄어가는 특권들에 안타까워할지도 모른다. 하늘의 성에 있었던 특권의 자리들이 점점 줄어가는 것을 슬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현실의 배후에는 한국 근현대사에 새겨져 있는 자기배반의 역사가 있다. 일본 식민지 시절, 처음에는 살기위한 처세였겠지만, 얼마안가 일본이 하늘의 성주라 생각하고 그들에게 복종하며 인생역전을 노리며 친일을 자처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영원할 줄 알았던 일본제국이 후퇴하고 미군정의 시기가 되자 하늘의 성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그들을 붙들고 부귀와 영화를 탐했다. 그런 그들은 이후 한국의 정치와 사회의 노른자위에 자리를 틀고 앉아 자신의 행운을 기뻐했다. 그것이 정말 행운일까? 심판 없는 특권은 삐뚤어진 마음을 만들고 뒤틀린 마음은 그 마음의 주인의 삶을 파괴한다. 실패한 역사바로잡기의 실재 피해자는 어쩌면 하늘의 성에 오르지 못한 누군가가 아닐지 모른다. 끊임없이 그 성에 살기위해 자신을 파괴하는 성의 주민일지도 모르겠다.


   모르면서 어긴 율법은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지만 알면서 저지르는 불법은 사망의 씨앗이 된다. 1세기, 헤롯 대왕의 아들 안티파스는 야심이 있는 사내였다. 자신이야말로 로마의 선택을 받아 헤롯 대왕을 이어받아 유대지역을 다스릴 사람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로마에서 받은 선진교육을 바탕으로 저개발 지역이었던 갈릴리 지역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로마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그리고 길고긴 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대지방의 사람들 중에는 헤롯 안티파스를 따라 혁신과 번영의 언어에 도취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믿었던 전통을 버리고 로마의 날개를 달고 하늘의 성으로 오르려 했다. 


   그러나 그런 그들과는 달리 예수가 섬기는 하나님의 나라의 기쁜 소식에 마음이 이끌린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예수를 따르던 북갈릴리의 어부들이 그들이었고, 예수의 갈릴리 선교를 통해 모인 예수의 제자들이 그들이었다. 세상의 성공과 명예에 대한 약속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랑과 평화에 대한 깨달음과 실천으로 살았다. 그런 그들에게도 식탁과 축제가 있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인 예수를 더 이상 육체로는 만날 수 없게 되었을 때, 매일 먹는 빵과 포도주를 놓고 그들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초대했다. 바로 이것이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식탁 공동체로 시작된 이유이다. 당시 각지에 흩어진 신앙공동체들을 이끌었던 바울과 후대에 예수의 삶에 대한 기록을 남겼던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공동체를 이끌었던 지도자들과 제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예수의 식탁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했다. 바로 예수와 함께 먹고 마신 기억들, 밤이면 고픈 배를 움켜쥐고 몇 조각의 빵과 음료를 나누면서도 마음은 평안과 소망으로 가득했던 밤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 기억이 엄혹한 제국의 박해와 고난을 이기는 힘이 되었다.


   이제 번영의 복음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세상의 명예와 부를 얻을 수 있다는 헛된 생각이 하나님 나라의 식탁을 침범하고 있다. 바로 SKY 캐슬의 첫 장면인 호화로운 만찬의 식탁은 예수의 복음으로 시작된 한국의 기독교가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예수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주인공 염정아(한서진, 강준상의 처)가 다른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시어머니 윤여사는 극중 ‘윤권사’로 불린다. 그것은 한국사회에 드리운 엘리트 기독교인들의 군상을 표현할 뿐 아니라 시대를 통찰할 수도,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는 기독교의 아픈 모습을 묘사한다. SKY(명문대)에게 빼앗긴 하늘나라의 소식과 캐슬에 빼앗긴 예수의 식탁을 벗어나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가 축원한 빵과 포도주가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하는 숙제가 우리에게 있다. SKY 캐슬은 아마도 그 어려운 숙제를 우리에게 던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