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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성착취 폭력사건, n번방

비단 n번방만의 문제가 아니다 / 김민영

 

김민영(다시함께상담센터 소장)

 

텔레그램은 러시아 태생의 두로프 형제가 2013년에 출시한 비영리 메신저다. 당초 텔레그램이 표방한 강력한 보안 정책은 반푸틴 세력을 감시하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되었으나, 성착취물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이득을 벌어들이고자 목적하는 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안전한 플랫폼으로 기능하였다.


아르바이트 구인글을 거짓으로 올리거나 일탈 계정을 운영하는 여성들에게 접근하는 방식으로 확보한 여성들의 개인 정보를 탈취한 뒤, 이를 토대로 협박하면서 점점 수위가 높은 촬영물을 요구하거나 성폭행을 일삼은 이들의 집단적 범죄행각은 주요 운영진과 26만명의 공모자들에 의해서 견고해졌다. 여성 대학생 2명이 잠입하여 n번방 속 잔인한 성착취 면면을 고스란히 감내하며 그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낸 이번 상황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비트코인을 뛰어넘은 스페인 암포화폐 모네로를 통해 자금을 회수하고 우회하는 지점에서야 주동자 검거가 가능했던 상황에 안도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n번방은 어떤 ‘사건’이 아니라, 일관된 전개 중 튀어나온 한 조각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1961년 제정된 윤락행위등방지법 시절에도 사실상 정치사회경제문화를 통제하던 미군정 존속을 위한 기지촌이 성행하였고(이 때 국가는 직접 여성들의 성병을 관리하고 정기적인 교양교육을 통해 성적서비스를 위한 영어를 가르치고 애국심을 주문한 바 있다), 70년대 기생관광은 물론 관광협회 내 요정과를 설치하여 성매매를 본격적인 관광산업으로 육성한 역사가 있다. 80년대 3S 정책과 더불어 88올림픽을 기점으로 풍속영업에 대한 각종 규제를 완화하면서, 정치적 편의와 ‘산업 진흥’ 아젠다에 의해 오랫동안 여성의 몸은 당연한 재화로 여겨져왔다.

 

2018년 우리 센터의 고발로 세간에 모습을 드러낸 성매매알선포털사이트 <*의 **>. 전국의 성매매업소를 홍보하는 그 사이트의 회원수는 70만명이었다. 성구매자들이 업소에 다녀온 후기를 올려 포인트를 적립하고, 그 포인트로 업소 쿠폰을 경매하고, 포인트 레벨로 사이트 내 계급을 무리짓고, 그 계급에 따라 권한을 달리하고, 변호사들이 초법적인 업소 운영과 단속에 걸리지 않는 방법 등을 버젓이 자문하던 현장이다. 그 사이트는 다시 음란물사이트, 강간약물판매사이트, 도박사이트와 연동하면서 서로의 동력을 키워주고 있었다. 유흥구인구직사이트를 통해 여성들을 기망하여 성매매로 인입시키고, 인터넷방송과 엔터테인먼트 분야가 결합하여 벗방BJ를 양산하고, 하나의 주식회사가 여러 개의 랜덤채팅 어플을 운영하면서 온라인 그루밍과 불법촬영물 획득이 보다 손쉬운 방식으로 기술을 비교개발하고, 웹하드 사업자가 의무적으로 필터링해야 하는 성착취물을 일부러 남겨놓아 본인 소유의 디지털 장의업체를 통해 이중의 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는 사회가 대.한.민.국.이다.



21세기에 무려 ‘노예’라는 반인륜 메시지를 버젓이 쓰는데서 얻는 쾌감과 기대감에 잇대어 다시 그들은 텔레그램으로 모여들었다. 착취의 핵심 기저는 성욕이 아니라 능욕이다.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박사방의 ‘복종’ 키워드도 마찬가지다. 갓갓과 조주빈을 비롯한 26만명의 허황한 자신감과 가학성은 ‘지배하는 남성’을 바라는 남성연대의 응집력을 키웠고, 노예된 여성들의 이미지를 스티커와 이모티콘으로 변환하여 놀이로 가장하는 대범함과 어리석음을 보였다. 여성의 존엄을 훼손하려는 목적으로 구성된 커뮤니티에서는 ‘누가, 더 많은 여성을, 더 잔인하게 능욕하느냐’에 따라 응당 그 서열이 결정됐다. 방마다 적게는 몇 백 명, 많게는 몇 만 명이 모여 성착취물을 공유하고, 품평하고, 담합하고, 찬양하고, 환호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이런 사안에 직면할 때마다, 여성을 먼저 탓하고 모든 남성이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로 마무리하는데 능하다. ‘자발’과 ‘동의’ 패러다임은 순수한 피해자만을 선별해서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동자와 공모자들의 의도된 간악함을 드러내는데 작동해야 할 프레임이다. 이들이야말로 능동적이고 주도적이며, 명백한 의도를 가져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있다.

 

현장에서 바라보는 성착취 상황은 미투 이후에야 그나마 발화가 가능했고, 개인의 피해서사와 용기에 기대어 문제의식이 고양되는 수준이며, 수사기관과 법원은 가해자의 형편을 자주 헤아렸다. 그러는 동안 텔레그램은 보다 은밀한 디스코드로 플랫폼을 옮겨가고, n번방과 <*의 **>의 후광을 노린 유사한 닉네임방과 사이트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며, 그 곳들은 곧 십만명이 훌쩍 넘는 회원수를 보유하게 된다. 뫼비우스의 띠 혹은 좀비.


폭력이라는 폭발적인 행위에 기술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향유한 여성들의 이미지만 남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해자들의 행위 또한 그 흔적으로 남는다는 것. 자신의 디지털 잔재를 기억할 일이다.

 

지금 이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인 4월 23일, 범부처간 논의를 통해 <디지털 성범죄 근절대책>이 국무조정실 보도자료로 발표되었다. 가해자 처벌 상향, 기소전 독립몰수제 운영, 온라인 그루밍과 예비음모 처벌, 대상청소년 삭제, 인터넷사업자 징벌적 과징금제 등 그간 현장단체들이 헐거웠던 입법공백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했던 많은 내용들을 담으려 노력한 것이 느껴진다.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나, 변화는 오롯이 한 세대를 필요로 한다.

 

● 본 원고는 2020년 3월 26일(목)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진행된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 발제문 일부를 참고하여 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