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건과 신학 1기/성착취 폭력사건, n번방

슬기로운 가상경험 / 김한나

 

김한나(성공회대학교)

 

“거짓은 내가 싫어하는 것, 나는 당신 법을 좋아하고 실행합니다.” (시편 119:163)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경외한다. 참된 경외는 공포와는 달리 본질적으로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기쁨을 내포한다. 다윗은 권위를 가진 방백들의 핍박 가운데서도 사람과 환경이 아닌 오직 하느님의 말씀만을 두려워한다고 고백한다(시119:161).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지극한 열망과 열정으로 그분의 계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어떠한 유혹과 정욕에도 흔들리지 않고 지속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평안과 승리의 삶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하느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에서 비롯된 말씀의 실천은 가장 기쁜 성도의 의무중 하나이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의 가치관을 변화시키며 일상에서 구체적 실천을 통해 더욱 깊이 체득된다. 경험과 성찰의 과정을 통해 체화된 지식과 원리는 개인과 공동체의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데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기독교인은 하느님의 말씀과 신앙적 체험을 통해 형성된 기독교 세계관을 중심으로 현실의 삶을 살아간다. 개인의 영성 생활과 공동예배, 교회 공동체의 친교(코이노니아)와 이웃을 향한 섬김(디아코니아)의 경험은 하느님을 향한 신앙의 발현이자 동시에 거룩한 진리의 체험이기도 하다.


사이버 세계의 등장으로 다양한 가상 활동을 영위하게 되면서 인간 경험의 영역은 가상 세계로 확장되었다. 이번 ‘n번방’사건은 가상경험이 인간과 현실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의 아픈 단면을 드러내며 가상 경험의 중대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자아냈다. 이번 사건으로 대중들은 성착취 영상물을 제작 유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시청하는 것또한 비윤리적이며 반사회적인 행위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처럼 현실에서 뿐만 아니라 ‘온라인에서 무엇을 경험하느냐?’의 문제는 인간의 중요한 존재론적 물음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보편적인 가상경험의 본질과 현상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통해 인류에 그 방향성을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온라인 종교 경험의 의미와 현실 영향력에 대한 신학적 연구에도 주력해야 한다.


초기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의 여러 학자들은 사이버 세계를 종교적, 영적, 공동체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유토피아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사이버 세계를 인간의 순수한 의식을 통해 접근 가능한 공간으로 인식함으로써 이를 영적인 세계 혹은 철학적 이상이 반영된 이데아로 일반화하는 오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실시간 커뮤니케이션과 글로벌 네트워크가 가능하다는 장점은 현실에서 불가능했던 이상적인 공동체의 실현이 마치 사이버 세계를 통해 온전히 가능할 것이라는 낭만적 기대로 이어졌다. 반면, 사이버 세계 자체를 현실의 모조품 혹은 허황된 환영의 세계로 치부하고 기독교인으로서 반드시 배척해야 할 어둠의 공간으로 단정 짓는 학자들도 등장했다. 이러한 견해는 사이버 세계가 반드시 현실 외면과 도피를 초래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인간의 부패한 본성이 이를 부추길 것이라는 불안을 맹목적으로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양분화된 극단적 견해는 사이버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사이버 세계는 컴퓨터 시스템에 의해 구현된 비물리적인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는 실시간 소통과 네트워크가 발생한다. 하지만, ‘비물리적인’ 세계 혹은 공간이라는 것이 곧 인간의 순수한 의식의 출입만을 허용하는 ‘영적인’ 세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초기 인터넷에 대한 극단적 견해는 인간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이원론적 해석에서 비롯된다. 영혼과 육체는 서로 대립하며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는 이원론적 인간 이해는 다양한 철학과 신학 사상에 광범위하고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는 곧 물리적인 세계와 초현실적인 세계와의 대립을 설명하는 이원론적 세계관과도 연결된다. 사이버 세계의 비물리성을 오랜 철학적 이상인 초현실에 대입하는 방정식은 사이버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의 심각한 오류를 낳았다. 또한, 인간 의식의 우월성과 육체의 열등함에 대한 이원론적 사고는 상대적으로 육체적 활동이 적은 비중을 차지하는 가상 활동을 현실의 활동보다 우월하고 영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사이버 세계를 현실과 대립하는 동떨어진 세계로 인식하는 사고는 사이버 세계에 대한 양극단의 사고를 모두 불러올 수 있다. 그것이 현실을 초월한 이상적 세계라는 개념과 반대로 현실의 모방이자 비현실적 세계라는 견해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년간의 가상경험을 통해 사이버 세계가 현실 세계의 연속체(continuum)로서 현실과 활발한 상호 작용(interaction)을 통해 상호 영향(mutual impact)을 주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사이버 세계는 전통적인 미디어와는 다르게 소통이 발생하는 하나의 환경(simulated environment) 혹은 공간(space)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그 공간을 현실의 물리적 공간과 동일한 차원의 공간으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다. 사이버 세계는 현실 세계와는 질과 결이 다른 새로운 차원(new dimension)의 공간이다. 이 두 차원의 세계를 동일시할 경우 교회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 현실 외면과 도피로 인한 비인간화 현상(dehumanization)을 초래할 수 있으며 이는 인류의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다. 사이버 세계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가상 현존감(virtual presence)은 전통적으로 경험해 오던 물리적 현존감(presence)과는 다른 경험의 영역이며, 이는 물리적 현존을 통해 얻는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경험을 온전히 제공하지 못하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


사이버 세계를 통한 가상경험은 현실의 나와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다. 사이버 세계에 존재함으로써 유저는 가상 정체성을 통해 현존하는 자신을 표현한다. 개인의 가치관은 사이버 세계에서의 모든 선택과 활동에 투영되며 상호작용을 통해 타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번 ‘n번방’ 사건은 인간을 고유한 인격체로서가 아닌 소유가능한 사물로서 여기는 현실의 고질적 풍조와 왜곡된 성적 가치관이 온라인에 고스란히 투영된 것이다. 모든 사물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검증하는 과학적 실증주의의 확산은 일부에선 인간 마저도 객관화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병폐를 낳았다. 이러한 인격 감각의 상실은 다양한 사이버 범죄를 통해 그 전염성을 높이며, 이에 가담한 수많은 사람들의 실제 삶에 파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번 사건도 사이버 세계에서 발생한 사건이며 경험이기에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은, 두 세계의 연속성 때문이다.


현재 인류는 현실의 삶뿐만 아니라 가상의 삶(virtual life)을 영위하며 살아간다. 가상 세계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은 실재하는 ‘나’에게 영향을 줄뿐 아니라, ‘나’를 통해 실제 내가 속한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사이버 세계와 현실 세계의 가장 중요한 연결 고리는 바로 두 세계에서 삶을 영위하는 ‘나’ 혹은 ‘우리’이다. 그렇다면,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경험하는가의 문제는 더 이상 한 개인의 존재론적 물음만이 아닌 그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의 필수적인 물음이기도 하다. 이러한 원리는 사이버 범죄의 경우 더욱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가상 세계에서 발생한 범죄가 피해자의 물리적, 정신적 피해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심각한 사회적 혼란과 혼돈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사이버 세계의 쉬운 접근성과 익명성은 대중들의 참여를 증진시켰지만, 그 부작용으로 사이버 범죄와 피해를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기독교인은 삶을 통해 믿음을 실천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파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복음은 한 인간을 전인격적으로 변화시키며 이러한 내적 변화는 반드시 외적 변화를 이끌어 낸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의 동기가 결핍된 행동은 그리스도께서 항상 경계하셨던 외식이며, 반대로 열매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서 발현되어야 하는가? 그동안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 그러나 너무나 익숙하게 지금 우리 앞에 전개된 가상 세계를 통해서도 우리의 믿음은 실천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기적 앞에서 비로소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인정했던 로마의 군사들은 당시 그들이 서있던 삶의 현장에서 그들의 믿음을 소리내어 증거했다(마태27:54). 현재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그 자리, 그곳이 현실 세계이든 사이버 세계이든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은 아름다운 향기로 발향되어, 그것을 경험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향기로운 반향을 일으켜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나 가장 슬기로운 가상경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