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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성착취 폭력사건, n번방

[취지문] “이 사건에 본인의 책임은 없다며 선 긋지 말아 주세요.”

 

양권석(NCCK 신학위원회, 성공회대학교)


이 사건을 전하는 언론 보도를 보면 온갖 비밀스러운 암호들로 가득하다. n번방, 텔레그램, 고담방, 박사방, 이기야, 붓따, 갓갓, 와치맨, 박사.... 아직은 사이버 세계의 신인류로 충분히 거듭나지 못한 나 같은 사람들에게 이런 언어들은 때로 상상불허의 넘사벽 앞에 서 있는 느낌을 준다. 낯선 외국어 문장을 사전 찾아가며 읽듯이, 단어 하나하나를 인터넷을 통해 확인하고서야 겨우 해독이 가능할 때가 정말 많다.

 

하지만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현실과는 다른 사이버 세계, 가상의 세계, 온라인이라는 말이 주는 교묘한 위장술에 결코 속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분명하게 느끼게 된다.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격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그래서 그곳에서의 폭력과 잔인함은 아직은 현실이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어했던 마음, 그 모두가 착각이요 문제를 외면하고 싶었던 비겁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상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가해와 피해의 관계는 결코 상상의 한계 안에 있지 않았다.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폭력은 사실은 훨씬 더 기술적이었고, 생각한대로 주저 없이 실행할 수 있을 만큼 즉시적이었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노골적이었고, 매우 직접적으로 물리적이고 육체적이었다.

 

그 수많은 방들을 가득 메우고 있던 참혹한 영상들, 협박과 공갈로 약한 고리를 끝까지 물고 흔들며 힘없는 자들을 노예로 만들고 있는 그들의 언어와 눈빛, 호소할 곳도 없이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공포와 두려움에 갇혀 있을 수많은 피해자들, 그리고 서로 보이지 않음을 핑계 삼아 온갖 폭력적 언어들을 거침없이 주고받으며, 파시스트적 욕망을 마음껏 분출하며, 강간과 능욕의 놀이를 사고 즐기고 있었을 수십만을 상상하면, 그리고 그 세계가 바로 내가 얽혀 살아가는 세계의 숨길 수 없는 한 단면이라고 생각하면 그 수치와 참담을 막을 길이 없다.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그 폭력의 희생자들의 편에 서야 문제가 제대로 보일 것이라고 믿는다. 교묘하고도 잔인한 꾀임과 협박에 의해, 점점 늪으로 끌려 들어가며 정상적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상실한 채 인간됨을 철저히 부정당하며, 잔인한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갔을 그들의 입장에 서야 한다. 그들의 억눌리고 짓밟힌 목소리를 들어야 하고 세상을 향해 들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피해자들의 삶의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린 “추적단 불꽃”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이 사건에 본인의 책임은 없다며 선 긋지 말아 주세요. 텔레그램 방 모든 관전자를 가해자로 보고 그들에게 죄를 묻듯, 수십 년간 성범죄 사건을 목격하고도 피해자를 외면한 우리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이 학생들의 호소 안에 예수님의 마음이 살아있다고 믿는다. 예수님 보시기에 우리 모두는 외면하고 지나쳐간 자들이었다. 별일 아닌 것처럼, 세상은 그리고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냉소와 허무로 잔인한 폭력을 못 본척했고, 그 폭력의 피해자들은 외면했으며, 모든 것을 다 아는 척 관전자가 되었을 뿐 그들의 아픔과 상처에 공감하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희생자의 상처와 고통은 나 자신과 우리와 우리 사회의 상처와 고통이 되지 못했고, 지금도 그 폭력의 사건은 계속되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책임은 이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일 지도 모른다. 참으로 듣기 거북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많은 비평가들이 말하듯이 우리 사회 안에는 폭력적 여성 착취를 방조하는 “강간 문화”라는 것이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성을 성적 쾌락의 도구로 인식하는 오도된 성인식, 여성과 여성의 몸을 성적으로 마음껏 상품화해도 좋다는 상업주의, 성적인 가해와 피해의 문제를 언제나 음란과 간음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분위기, 끝내는 여성을 정복대상으로 바라보면서 폭력과 강간과 인격살인 행위를 놀이로 삼는 이 행태...

 

수백 개의 방에 수십만의 남성들이 연결되어서, 능욕과 폭력의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집단적 범죄행위의 배후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잘못된 현실 문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개인, 가정, 교회, 직장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바로 그 잘못된 현실 문화를 만들어 온 사람들이다. 우리는 모두 이 사건에 책임이 있다.